과거 프런티어 시대 미국에서는 마을 중심지마다 큰 상점이 자리잡았지만 매번 그곳까지 한참을 가서 물건을 싣고 오는 것은 꽤 번거로운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이내 이것보다 더 편리한 방법을 원하기 시작했다. 1872년 시카고의 사업가 몽고메리 워드(Montgomery Ward)는 편지로 주문할 수 있는 제품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이 욕구를 충족시켰다. 워드는 시골 지역의 방문 판매원(Traveling salesman)으로 몇 년간 일하면서 외떨어진 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도시의 물건들을 적극적으로 원한다는 것을 관찰하고 이 사업 방식을 구상했다. 지금보다도 교통이 훨씬 열악했고 자동차가 나오기 수십 년 전이었던 그 시절, 기차는 물건을 빠르게 배달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워드는 처음에 가로 20cm, 세로 30cm의 카탈로그를 만들어서 163개의 상품 리스트를 실었다. 누구든지 여기에 있는 물건을 편지로 주문하면 약속된 시간에 기차역에 나가서 찾을 수 있다는 개념의 판매 방식이었다. 옛날식의 온라인 상거래가 최초로 시작된 것이었다. 사업 초기 각 시골의 소매상인들이 반발하고 카탈로그를 공공연히 태우면서 워드사를 협박하기도 했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람들은 동네 상점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어려운 상품들을 편리하게 살 수 있다는데 매력을 느꼈고, 사업은 계속 성장했다. 물건을 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1875년에는 제품의 질을 보장하고 맘에 안들 경우 환불해주는 제도를 마련하고, 광고 문구(Satisfaction guaranteed or your money back)도 만들어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판매하는 회사의 이름으로 제품의 질을 보장해 소비자가 안심하고 구입할 수 있게 한 것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판촉 기법이었다. 사업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난 1883년, 카탈로그는 무려 240페이지에 1만 개의 상품을 싣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그러나 워드사는 이후 변화하는 소비문화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다른 사업자들이 경쟁적으로 우편 판매에 뛰어들면서 매출이 감소했고, 1950년대 여러 마트들이 확장되는 도시 교외 지역에 속속 거점 매장을 마련할 때 오히려 다운타운 매장에 집중하면서 소비 트렌드의 변화도 놓쳤다. 중소도시 곳곳에 더 큰 마트들이 생기고 개인 자가용까지 보급되면서 카탈로그 판매도 점차 시들해졌다. 결국 워드사는 1985년에 카탈로그 발행을 중단했고 이후 몇 차례 위기를 넘지 못하고 2000년에 파산하고 말았다. 워드사 파산은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소매업 부도로서 기록되었는데, 한 때의 혁신 기업도 지속적인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도태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으로 더욱 쉽게 수십 만 가지의 물건을 검색하고 주문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급증하는 전자상거래 시장은 기존 소매점들의 생존을 다시 한 번 크게 위협하면서 물자가 이동하는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꾸고 있다. 길을 걷다가 맘에 드는 물건을 발견해 스마트폰을 클릭하기만 하면 바로바로 편하게 집에서 물건을 받아볼 수 있게 된지 오래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류창고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은 고객이 주문한 물건들을 자동으로 분류하고 있고, 대륙 구석구석의 트럭들은 정해진 루트를 돌면서 이 상자들을 쉴 새 없이 실어 나르고 있다. 이 트럭들은 심지어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면서 들어가는 시간과 유류비를 절감하기 위해 우회전만 하면서 물건을 배달할 수 있도록 운송 루트를 짜서 움직일 정도로 바쁘게 구석구석을 누비고 있다.
물류의 이동거리가 매우 길거나 속도가 크게 중요한 경우에는 비행기가 동원되기도 한다. 비행기를 통한 물자 이동 네트워크는 20세기 후반에 완성되어 국제 무역이 발전한 오늘날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다. 1962년 예일대 학생이던 프레드릭 스미스(Frederick Wallace Smith)는 당시 첨단 기술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트랜지스터와 같은 고부가가치 상품을 비행기로 빠르게 배달하고자 하는 수요가 더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작은 제품을 꽉 채워서 신속하게 운송하면 비행기의 비싼 운송료를 감당할 수 있는 사업이 될 것이라고 본 것이었다. 그는 소형화물 특급운송 비즈니스를 위해 허브&스포크라는 개념을 생각했다. 배달 의뢰 받은 물건을 일단 모두 중심 공항(허브)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분류해 자전거 바퀴살(스포크)처럼 펼쳐진 목적지별로 분산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서울에서 인천으로 보내는 택배를 서울에서 바로 인천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대전으로 우선 모았다가 다시 인천으로 운송하는 셈이었다. 모든 물건을 이런 식으로 보내면 이동거리가 길어져서 불리할 것 같지만 항공기의 경우 물건을 꽉 채워서 정기적으로 운송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각각의 지점들을 그때그때 잇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일 것이라는 게 스미스의 생각이었다. 당시 지도교수는 이런 아이디어는 실용 가능성이 없다고 논문에 C학점을 줬지만 스미스는 오랜 후에 실제 회사(FedEx)를 설립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비행사로 근무하고 제대한 후 상속받은 400만 달러와 투자자에게 모은 돈 9,100만 달러를 합쳐 8대의 비행기를 구입했다. 허브&스포크의 허브에 해당하는 센터는 테네시주 멤피스의 한적한 공항에 마련했다. 때마침 오일쇼크가 불어 닥쳤고, 소형 화물 특급 배송이라는 개념에 대한 홍보 부족으로 고객의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창업 2년 만에 1,300만 달러의 부채가 발생했고 파일럿의 임금과 비행기 연료를 살 수 있는 운영자금조차도 떨어졌다. 사업을 지탱하기 위해 스미스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았다. 오너의 솔선수범과 무슨 일이 있어도 직원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 직원들은 자신의 돈으로 차에 기름을 채워 물건 배송 일정을 지키기까지 하면서 회사의 회생에 동참했다. 결국 회사는 기사회생했고 외부 투자도 유치해서 창업 4년 후인 1975년부터 비로소 흑자 상태에 들어섰다. 결국 프레드릭 스미스의 패기어린 도전은 주문받은 물건을 다음날 반드시 배송한다는 기업 가치를 고수하면서 여러 난관들을 극복하고 또 다른 형태의 물류 시장을 개척해 내었다.
비행기 배송은 비행기가 이륙하는 시간을 놓치면 안 되는 정시성 때문에 이후 물자 운송에 널리 쓰이는 많은 첨단 기법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물류 자동화 시스템은 개별적으로 바코드를 부여한 물건들을 바로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 목적지별로 향하는 비행기에 빠르게 선적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물건마다 붙여진 고유 코드는 고객이 배송 중에도 언제든 위치를 추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운반의 오류도 크게 줄여 주었다. 현재 많은 기업들은 다양한 기술들을 이용해 항공 물류의 효율을 높이고 있고, 하루에도 수백 대의 화물 전용 비행기가 수백만 개의 물건을 싣고 세계 곳곳을 이동하고 있다. (게재 21.11월)
미국은 혁신으로 농업 강국을 이루었다. 프런티어로 이주를 해 가던 시대의 19세기 미국에서는 부족한 것, 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는 그 자체가 농업의 혁신을 불러온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초기 개척민들이 새로 얻은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지을 때 가장 부족하고 필요로 했던 것은 바로 일손이었다. 당시의 홈스테드법에 따라 한 농부가 160에이커(65만㎡)의 경작할 땅을 받았다고 하면 온 가족이 달려들어도 노동력은 항상 모자랐다. 개간도 안 된 여의도 공원(23만㎡) 3배 정도의 넓은 땅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일구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 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처음에는 사람과 가축의 힘에만 의지했지만 미국인들은 이내 기계를 농사에 이용하는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점차로 자리 잡은 기계 농업은 미국 농업의 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미국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며 생활을 영위해야 했지만, 이제는 전체 취업자의 1~2%만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세계 최대 농산물 수출국으로서의 생산력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소수의 경작자들이 일구는 농지 면적은 우리나라 전체 면적의 37배에 달하는 9억 2,200만 에이커(369만㎢)에 이른다.
농업 생산성을 높인 중요한 초기 발명품 중 하나는 1793년 엘리 휘트니(Eli Whitney)가 발명한 조면기(Cotton Gin)였다. 목화 농사에 들어가는 일손을 줄인 이 기계는 역설적으로 농장에 더 많은 노예를 필요로 하게 만들어 19세기 미국의 역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나 독립전쟁 후 새로운 기회를 찾아 조지아주로 왔던 휘트니는 이 지역의 주산업인 목화 농사에 많은 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 문제점을 눈여겨봤다. 목화 농사에서는 재배와 수확도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 목화씨와 면섬유를 분리하는 것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목화에서 450g(1파운드)의 섬유를 분리하려면 한 사람이 약 10시간을 일해야 했다. 우리가 요즘도 쓰는 솜이불이 하나가 대략 4kg이니 여기에 쓰는 솜을 모으기 위해 장장 90시간의 노동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과정을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춘 휘트니는 돌기가 나 있는 롤러에 솜을 넣고 돌리는 조면기를 만들어냈다. 2인이 1조가 되어 한 사람은 솜을 넣고 다른 사람이 분리돼 나오는 섬유를 꺼내기만 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한 대의 조면기를 쓰면 둘이 하루에 무려 23kg(50파운드)이나 되는 솜을 분리할 수 있었다. 일인당 작업속도가 기존보다 25배 이상 빨라졌고, 작업의 고단함도 크게 줄어든 것이었다.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는 빠른 속도로 복제됐고 목화 농사의 수익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로 인해 1800년대부터 남부 목화의 생산량은 10년마다 2배씩 증가해 1860년에 이르자 세계 목화 소비량의 70%를 공급할 정도로 성장했다. 문제는 재배 면적이 늘어나면서 농장들이 더 많은 흑인 노예를 필요로 했다는 점이었다. 1790년 70만 명이던 흑인 노예는 1850년 320만 명까지 빠르게 증가했다. 풍부한 목화 원료는 북부의 섬유산업을 발전시키고 공장도 늘어나게 했다. 결국 조면기는 남과 북의 경제를 다른 방식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노예를 허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지역 간 갈등은 계속 고조되어 1861년 남북전쟁의 발발로까지 이어졌다.
농업 생산성을 높인 또 다른 혁신적인 발명품은 트랙터였다. 소나 말이 아니라 증기로 움직이는 기계를 농업에 활용해 보자는 아이디어는 1812년 영국에서 먼저 등장했다. 이후 유럽과 미국의 농부들은 증기 기관차를 농사에 폭넓게 이용해 보려 했지만 작업의 효율이 너무 낮아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92년 미국 중부 아이오와주의 존 프로이리히(John Froelich)가 최초의 가솔린 트랙터를 만들자 상황은 달라졌다. 효율성 높은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트랙터는 농사에서 소와 말의 역할을 급속도로 대체했다. 트랙터는 쟁기를 더 센 힘으로 끌었고, 뒤에 트레일러를 달면 훌륭한 운반차 역할도 했다. 밀고 끄는 힘은 물론이고 지구력 면에서 인간과 가축은 기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밭에서 트랙터를 널리 사용하면서 작업 속도는 빨라졌지만 바퀴가 진흙에 자주 빠지는 것은 골치 아픈 문제였다. 트랙터가 질척한 흙에 빠져버리면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었다. 여러 사람이 소와 말까지 동원해 힘을 합쳐 밀고 당겨도 이 무거운 기계는 꿈쩍도 하지 않으면서 농부들의 속을 썩였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1904년 캘리포니아 스톡톤(Stockton)시에 살았던 벤자민 홀트(Benjamin Holt)였다. 그는 여러 개의 원판을 나무판으로 감싸 땅과의 접촉 면적을 넓히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바퀴를 개발했다. 이 바퀴는 오늘날 농업용·건설용·군사용으로 널리 이용되는 무한궤도(Caterpillar)의 시초가 되었다.
트랙터는 1910년대에 크기도 더 작아졌고 비용도 더 저렴해졌다. 자동차를 만들던 포드사가 1917년 대량 생산까지 시작하자 보급 속도는 더 빨라졌다. 존 스타인백의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조드(Joed) 가족이 트랙터 작업자들에 밀려 오클라호마주에서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해야 했던 것처럼 20세기 초 많은 농민들은 트랙터에 의해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가야 하는 고통을 겪었다.
농업 생산성을 높인 또 다른 기계는 곡물을 수확할 때 쓰는 콤바인(Combine)이었다. 전통적으로 추수는 농사에서 가장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곡식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수확(Reaping), 타작(Threshing), 키질(Winnowing)의 세 단계가 필요한데, 콤바인은 말 그대로 이들 모두를 결합한 것이었다. 1835년 일리노이주에 살던 히람 무어(Hiram Moore)는 말이 끄는 콤바인을 처음 개발해서 특허를 냈다. 이후 사람들은 콤바인에 엔진을 부착했고, 1923년에는 캔자스주의 기술자들이 곡물 손실량을 줄이고 속도를 높인 현대식 콤바인까지 만들어냈다. 콤바인의 이용으로 추수 때 여러 사람이 줄 지어 서서 낫으로 곡식을 베고 그것을 모아 타작한 후 키로 알갱이와 쭉정이를 분리하는 길고 힘든 과정은 모두 불필요해졌다. 오늘날에는 콤바인 한 대가 넓은 면적의 경지를 오고 가며 자동으로 곡식을 가마니에 담아오는 장면이 일반적인 추수 풍경이 됐다.
한편 농업에서 일손만큼 절실히 필요했던 다른 원료는 물이었다. 특히 비가 적게 내리는 중부 평원에서는 땅은 넓지만 농사지을 물이 별로 없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문제는 지표면 아래에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대수층(Aquifer)을 찾으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우리나라 면적의 4.5배 정도인 45만㎢에 이르는 넓은 대수층은 와이오밍, 콜로라도, 뉴멕시코, 사우스다코다, 네브라스카,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에 걸친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1940년 콜로라도의 프랭크 지바크(Frank Zybach)는 이 물을 이용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중앙 피벗 관개(Center-pivot irrigators)라고 불리는 이 장치는 가운데 파이프에서 뽑아 올린 물을 팔처럼 길게 쭉 뻗은 호스로 이송해 농작물의 위에서 뿌려 주는 것이었다. 중간 중간에는 바퀴 달린 기둥이 있어서 길이 400~500m의 긴 트러스 구조물과 호스를 지탱했다. 이처럼 길쭉한 호스 팔이 가운데 파이프를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 반지름 400~500m의 대형 원 안에 있는 농작물에 모두 물이 뿌려지는 방식이었다. 이 발명이 확산되면서 각각의 호스가 그려내는 거대한 원들이 대평원을 가득 채우게 됐고, 메말랐던 땅에 대규모 농사가 가능해졌다. 오늘날 위성사진으로 이 지역을 내려다보면 정유탱크 같은 대형 원구조물이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데 자세히 관찰하면 동그란 농장들이 수 없이 들어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 높낮이가 없는 중부 대평원에 중력의 힘으로 흐르는 수로를 길게 건설한다는 것은 비용 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수층의 발견과 피벗 관개 시설의 고안은 수만 년 동안 잡목만이 자랐던 황량한 평원을 옥수수, 콩, 밀 등이 가득 찬 세계적 곡창지대로 변화시켰다. (게재 21.11월)
소리를 순식간에 먼 곳으로 이동시키는 라디오라는 신기한 물건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 데는 독보적인 선구자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이제 막 인류가 발견한 전파의 세계에 매료된 이들은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을 파헤쳐 세상에 없었던 발명품들을 계속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특허권과 시장 선점을 둘러싼 치열한 싸움을 벌이면서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다. 초기 라디오의 개척자들이 보여준 얽히고설킨 다툼은 각자의 꿈과 야망을 걸고 벌어진 길고 긴 싸움이었다.
1904년 영국의 플레밍(John A. Fleming)은 전파 수신을 위한 2극 진공관을 만들었다. 진공관은 공기가 없는 유리관 속에 필라멘트와 플레이트를 마주보게 해서 전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장치로 1947년 등장한 트랜지스터가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쓰이게 될 때까지 50년 넘게 전자제품의 가장 핵심적인 부품 역할을 했다. 진공관은 음극 역할을 하는 필라멘트가 달구어져서 전자를 발산하면 양극 역할을 하는 플레이트가 이를 수신하는 장치였다. 일반 전선과 다른 진공관만의 장점은 이 전자의 운동을 조절해서 전기를 한 쪽 방향으로 흐르게도 하고 멈추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06년 미국의 디포리스트(Lee de Forest)는 필라멘트와 플레이트 사이에 그리드를 추가해서 전류의 흐름을 키우는 3극 진공관을 만들었다. 이 3극 진공관은 신호를 매우 잘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훗날 대중적인 라디오 수신기 개발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품이 되었다. 그러나 발명 당시 디포리스트는 수천 배의 전파 증폭까지 가능한 이 진공관의 엄청난 잠재력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고 단지 약한 전파를 잘 잡는 성능 좋은 부품으로서만 인식하고 상품화를 시도했다.
디포리스트가 3극 진공관을 개발한 1906년에는 무선 통신을 이용해 최초로 소리를 전달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캐나다에서 미국에 온 이민자였던 레지널드 페센덴(Reginald Fessenden)이 매사추세츠주에서 대서양에 있는 배로 음악을 송신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무선 통신 방법을 고민하던 중 물에 돌을 던졌을 때 물결이 퍼지는 것을 보고 AM(Amplitude Modulation) 방식을 생각해냈다. 소리의 강약을 전류로 바꾼 후 이를 다시 전자기파의 높낮이인 진폭의 크기로 변환해 공중에 쏘는 원리였다. 그는 정교하게 전파를 조작할 수 있는 발신기 제작을 의뢰해 구입한 후 충분한 용량을 갖추도록 스스로 개량했다. 그런 후 190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스피커의 소리를 잘 들어보라는 모스 부호를 먼저 송신하고 나서 바이올린 연주와 노래를 실은 전파를 내보냈다. 그의 전파 진폭에 표현된 소리는 무선 전신을 수신하는 음향기가 달려있던 대서양 연안의 배에 전달됐다. 선원들은 당연히 뚜- 뚜- 소리만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스부호 수신 스피커에서 난데없이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선율과 크리스마스 송가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파에 소리를 싣는 방법까지 개발되고 1912년 타이타닉 침몰 사고 이후에는 모든 선박에 무선 통신 장비를 장착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생겼지만 무선 통신이 장거리 정보 전달 수단이 되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았다. 그중 가장 큰 문제는 전파의 강도가 공간을 퍼져나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약해진다는 점이었다. 발신 지점과 멀리 떨어진 지점에서는 전파를 간신히 잡는다 해도 유도되는 전류가 너무 미세했다. 수신기의 안테나가 매우 크고 성능이 우수하거나, 발신되는 전파가 엄청나게 강력하지 않은 이상 이 전류로 재생하는 소리는 헤드폰을 껴야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았다. 이런 상황에서 안정적이고 저렴한 무선 통신망을 구축해 상업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1912년 당시 22세였던 뉴욕 컬럼비아 대학생 에드윈 암스트롱(Edwin Howard Armstrong)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젊은 암스트롱은 6년 전 디포리스트가 발명한 3극 진공관으로 신호를 아주 크게 증폭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플레이트로 수신된 신호를 다시 필라멘트로 돌려보낸(Feed back) 다음 중간 그리드의 전하를 조절해서 똑같은 전자의 흐름을 재차 유발하는 과정을 수만 번 반복하면 매우 강한 전류를 생성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이를 재생회로(Regenerative circuit 또는 Feed back circuit)라 이름 붙이고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특허를 받았다. 1913년 말에는 자신이 만든 회로를 이용해 그 때까지 커다란 장비로도 잡을 수 없었던 초 장거리 전파를 또렷하게 수신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술을 발전시켰다. 1914년 1월 31일 그는 뉴저지에 있던 마르코니 무선회사 미국지사(Marconi Wireless Telegraph Company of America)의 안테나를 이용해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심지어 독일에서 발신한 전파까지 생생하게 잡아내는 믿기 어려운 광경을 동년배 기술자에게 보여줬는데, 그가 바로 향후 RCA(Radio Corporation America)의 사장이 되어 라디오와 텔레비전 시장을 개척하게 될 데이비드 사노프(David Sarnoff)였다.
이때부터 라디오 발명의 큰 공헌자였던 디포리스트, 암스트롱, 사노프 간의 뒤얽힌 운명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터진 1차 세계 대전에 뒤늦게 참전한 미국은 작전에서 무선 통신의 중요성을 깨닫고 당시 여러 회사가 가지고 있었던 통신 관련 특허를 전부 징발해서 전쟁에 사용했다. 전후에 미국 정부는 이것이 다시 여러 곳에 분산되어 기술이 퇴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주요 통신 특허들을 보유한 단일 회사(RCA)를 출범시켰다. RCA를 설립할 때 부수적인 역할 분담 협약에서 기존의 무선 통신 회사들은 송신 장비, RCA는 수신 장비 제조를 맡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당시는 송신기와 수신기가 한 쌍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분업 방식이 그다지 특이할 것은 없었지만 RCA의 간부가 된 사노프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면서부터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사노프는 무선 통신을 유선 통신처럼 1대 1 대화 용도로 쓰는 것을 넘어서 1대 다수의 정보 전달에 사용하는 사업을 구상했다. RCA는 1921년 뉴욕의 유명한 권투 시합 결과를 길거리에 설치한 라디오를 통해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이벤트로 대중의 큰 관심을 일으킨 다음, 회사가 보유한 특허 기술을 이용해 집에 놓고 들을 수 있는 수신용 라디오를 출시했다. 당시 라디오는 가격도 비쌌고(1920년대 당시 라디오 가격은 저가형은 65달러(현재 가치 850달러), 고가형은 240달러(현재 가치 3,200달러) 정도였다) 덩치도 큰 물건이었지만 사람들은 곧 이 신기한 물건을 필수 가구처럼 구입하기 시작했고, 상업적 용도의 정규 AM 라디오 방송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마침 1920년대의 미국 경기 호황과 맞물려 라디오는 사회 전체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의 상업주의가 고도화되는 과정에서 라디오는 기업가와 소비자 모두를 만족시키는 신발명품이었다. 기업가는 라디오를 통해 상품을 광고하길 원했고, 소비자도 막 일어난 재미있는 소식과 신제품의 정보를 계속 접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1920년대 중반 미국 전체에는 1,400개 방송국이 생겼고, 라디오 수신기의 가격도 25달러 이하로 떨어져서 전체 가구의 3분의 1이 라디오를 구입할 정도로 시장이 커졌다. 1927년 찰스 린더버그가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단독 횡단할 때에는 미국 전역에서 무려 3,000만 명이 라디오를 통해 실시간으로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 이 시기 우리나라에서도 1926년 경성방송국이 설립되었고, 1927년 첫 라디오 방송이 시작됐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라디오 산업이 퍼지면서 RCA는 사세를 크게 확장했고 젊은 암스트롱도 큰 부자가 되었다. 암스트롱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준 것은 그가 1차 대전에 육군의 통신 책임자로 참전하던 중 개발한 슈퍼헤테로다인 회로(Superheterodyne)였다. 슈퍼헤테로다인 회로는 수신한 전파의 주파수를 일단 파장이 길어 증폭이 용이한 낮은 주파수로 변환한 다음, 재생회로에 넣어 강한 전류를 생성하는 장치였다. 이 기술로 라디오 수신기의 감도는 더 좋아졌고 여러 방송 간의 혼변조도 크게 줄어들었다. RCA의 사노프는 오랜 친구가 개발한 기술의 특허권을 후한 가격으로 구입해 1920년대 급팽창하는 라디오 시장을 석권했다.
한편 이 시기 암스트롱은 자신이 디포리스트의 발명을 훔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재생회로를 사용한 라디오가 막 출시된 1915년, 디포리스트는 암스트롱이 자신의 3극 다이오드 특허를 침해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1921년과 1923년의 법정에서는 암스트롱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디포리스트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좀처럼 타협을 모르는 암스트롱도 물러서지 않아 무려 20여 년 간 계속된 긴 다툼 끝에 1934년 미국 대법원은 암스트롱의 최초 특허가 디포리스트의 아이디어와 유사하다는 직전 하급법원의 판결을 인정했다. 자존심 강한 암스트롱에게 이와 같은 결론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대부분 기술자들도 디포리스트는 원래부터 신호를 증폭한다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암스트롱이 독자적인 발명을 한 것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남의 기술을 도용해 부당한 이득을 얻은 사람이라는 법원의 판결은 암스트롱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진행되는 중에도 암스트롱은 라디오 역사에서 중요하게 남을 다른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이미 더 이상 일을 안 해도 될 만큼 부자였지만 컬럼비아 대학교의 지하에 마련된 연구실에서 수년을 매달린 끝에 1933년 FM(Frequency Modulation) 라디오를 발명했다. 이 방법은 1906년 페센덴이 개발해서 그때까지 쓰이고 있었던 진폭 변조(AM, Amplitude Modulation) 방식을 보완하는 전파 송수신 방법이었다. FM은 음성의 전기신호를 진폭이 아닌 주파수의 높낮이로 변환했기 때문에 수신 지점에서의 전파 강약 변화나 주변 전파의 간섭으로 발생하는 잡음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암스트롱은 20대였던 1914년 그랬던 것처럼 새로 개발한 기술을 이제 RCA의 사장이 된 사노프에게 보여줬지만 암스트롱의 생각과 달리 사노프는 FM 라디오 제품을 출시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그때까지 RCA와 자회사인 NBC 방송국이 구축한 막대한 AM 인프라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FM을 도입하기 보다는 이미 많은 자금을 투입한 텔레비전 투자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사업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집념 강한 암스트롱은 금전적인 이유와 자신이 볼 때는 아직 시기상조의 텔레비전 연구 때문에 훨씬 우수한 신기술을 외면하는 사노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암스트롱의 눈에 사노프는 더 이상 20년 전 같이 하와이발 전파를 잡으면서 뛸 듯이 기뻐했던 순수한 혁신가가 아니었다. 그는 RCA와 결별하고 혼자 FM 방송국을 만들어 송신을 시작했다. AM 방송만큼 콘텐츠가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음질에서 탁월한 FM 방송은 조금씩 저변을 넓혀갔고, 1939년 새롭게 시작된 텔레비전의 음파 전송 방식으로도 채택되었다.
이 시기 연방 통신 위원회(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FCC)는 FM의 표준 주파수 대역을 논의했는데 전파의 안정성 문제가 대두돼 100MHz 부근이 표준 대역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이는 50MHz 대역에 투자한 암스트롱의 FM 인프라를 일순간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일이었다. 암스트롱에게 있어서 설상가상으로 RCA는 자신들이 암스트롱의 기술과 무관한 독자적인 FM 방식을 개발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RCA가 FCC의 주파수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믿었던 암스트롱은 RCA가 자신의 특허권을 침해했을 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자신의 특허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송을 제기하며 맞섰다. 그는 그 동안의 특허 판매로 얻은 RCA 주식을 전부 매각하는 등 자신의 전 재산을 동원해서 오랜 분쟁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길고 긴 법정 소송과 결과적인 실패로 낙심한 암스트롱은 1954년 1월 31일 자신의 뉴욕 아파트 발코니에서 떨어져 자살했다. 1914년 사노프와 함께 하와이에서 발신한 전파를 잡는 흥분을 경험한 때로부터 정확히 40년 되는 날이었다.
이들의 다툼은 서로에게 모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시대가 낳은 천재였던 암스트롱은 모든 재산을 잃고 자살로 삶을 마감해야 했다. 디포리스트는 3극 다이오드를 둘러싼 암스트롱과의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세상의 존경을 받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대학생이던 암스트롱이 재생회로를 만들기 전까지 자기가 발명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발명가였다고 그를 비웃었다. 그 스스로도 과도한 욕심으로 많은 사업에 실패하고 사기죄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암스트롱의 발명품을 통해 라디오 제국을 만들고 그와의 우정을 쌓았던 사노프는 냉혹한 독점자본가라는 그간의 비판에 더해 돈 때문에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부모님을 따라 9살에 러시아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내며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시대를 개척했고 컴퓨터들이 광케이블 네트워크로 연결된 미래를 예견하는 혜안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오랜 병과 싸우다 1971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50여 년 동안 몸담았던 거대 기업 RCA는 그의 사후에 책임을 맡은 아들의 방만한 경영으로 이후 기술 변화를 더 이상 주도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게재 21.11월)
라디오 덕분에 인류의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동하기 시작한 정보는 텔레비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더욱 생생해졌다. 소리뿐 아니라 영상까지 무선으로 전송하는 꿈같은 기술은 오랫동안 여러 발명가들의 야심찬 도전 영역이었다. 텔레비전 탄생의 기반이 된 것은 1897년 독일의 칼 브라운(Karl Braun)이 개발한 브라운관(Braun tube, 정식명칭은 Cathode-ray tube: CRT)이었다. 전자총에서 음극 전자를 쏘아 형광물질이 칠해진 화면을 때려 빛을 내는 이 기술은 30년 후 텔레비전의 개발에 이용됐다. 1926년 영국의 존 로지 베어드(John Logie Baird)는 사람의 얼굴을 찍어 최초로 브라운관에 표출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베어드의 발명은 구멍이 뚫린 판(Scanning disk)을 빠르게 돌려 물체에서 나오는 빛의 명암을 감지해 전자 신호로 변환하는 기계식 장치였기 때문에 정교한 영상을 만드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촬영, 송출, 수신, 표출이 모두 전자식으로 이루어지는 텔레비전은 일 년 후인 1927년 9월 7일 당시 21세 젊은이였던 필로 판스워드(Philo Farnsworth)의 샌프란시스코 연구실에서 탄생했다. 아이다호주와 유타주의 농장에서 자라면서 홀로 텔레비전 아이디어를 구상한 판스워드는 개인 투자자와 지역 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아 사람들의 오랜 상상을 실현시켰다. 그는 화질이 매우 낮았던 발명품의 초기 문제점들을 보완해 1928년 9월 1일에는 언론을 대상으로 텔레비전 영상 송출을 시연했다.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RCA 사무실에 앉아 멀리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어난 탐탁지 않은 신문기사를 접한 사노프는 자신의 영향력 밖에서 이런 역사적 발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미 라디오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사노프는 곧 러시아 태생인 블라드미르 즈보르킨(Vladimir K. Zworykin)을 고용해 본격적으로 상업용 텔레비전 개발에 착수했다. 당초 즈보르킨이 10만 달러 정도 필요할 것이라고 보고한 텔레비전의 개발에는 예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RCA는 수백만 달러의 막대한 자금과 많은 연구 인력을 투입한 끝에 1931년 카메라와 텔레비전의 시제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판스워드의 아이디어를 참고해 제작한 이 제품은 1930년 이미 최종 승인이 난 판스워드의 텔레비전 특허를 상당 부분 침해하고 있었다.
RCA 내에서는 판스워드의 특허를 구입해 저작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사노프는 예전 암스트롱의 라디오 특허에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서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던 것과 비슷한 일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라디오 시장의 제왕이 된 사노프는 자신과 RCA가 텔레비전 발명에서도 독보적인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RCA는 판스워드에게 추정 가치보다 훨씬 낮은 금액인 10만 달러(현재 가치 170만 달러 정도)를 특허료로 제안했고, 자신의 기술의 값어치를 알고 있던 판스워드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RCA는 오히려 오래 전인 1923년 즈보르킨이 텔레비전 관련 특허를 먼저 신청했던 사실을 이유로 들어 즈보르킨의 텔레비전 아이디어가 판스워드보다 앞섰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패배로 끝난 소송을 끌어가면서도 오랫동안 막대한 추가 연구비를 투입한 RCA는 1939년 4월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상업용 전자 텔레비전을 정식 출시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RCA는 박람회 장면을 각 백화점 매장에 설치된 텔레비전에 전송하면서 텔레비전 개발 선도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일단 과감한 마케팅을 펼쳤지만 여전히 RCA의 제품은 판스워드의 특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마침 1939년 9월 유럽에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전쟁 소식을 화면으로 전달할 수 있는 텔레비전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자 RCA는 마침내 판스워드에게 1백만 달러의 일시금과 텔레비전 판매대금의 일정 비율을 로열티로 지불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1939년에는 미국 최초로 정규 텔레비전 방송이 송출되면서 공식적으로 텔레비전 시대가 열렸다. 영국에서는 1929년 기계식 텔레비전의 방송이 있었으며, 독일에서는 1935년 1주일 3회 정규방송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는 1956년에 최초로 방송을 송출하였다.
그러나 초기 텔레비전 시장은 예상과 달리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텔레비전은 화질이 그렇게 좋지 않았고 방송 콘텐츠도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랫동안 사랑 받은 라디오의 인기를 단숨에 누르지는 못했다. 텔레비전이 각 가정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후 호황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RCA는 1947~1948년간 백만 대 이상의 텔레비전을 판매하면서 단번에 시장의 80%를 점유했고, 17년간의 투자금을 일순간에 회수하며 큰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반면 판스워드는 1930년 얻은 최초 특허권이 이즈음 만료되었던 바람에 급성장하는 시장의 과실을 누리지 못했다. 판스워드는 자신의 이름을 따 만든 텔레비전 제조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이를 다른 회사에 매각하고 핵융합 발전기를 발명하는 일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다.
오랜 준비를 거쳐 비로소 상승 국면에 접어든 텔레비전은 1950년대 컬러텔레비전까지 등장하자 다른 모든 매체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미국 대부분의 가정이 텔레비전을 구입했고, 사람들은 여가 시간을 주로 텔레비전이라는 신기한 물건을 쳐다보며 보냈다. 텔레비전은 뉴스와 문화가 퍼지는 방식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텔레비전 전파를 타고 빠르면서도 생생하게 전달되면서 그 동안 분리되어 각자 방식으로 살아오던 여러 지역들이 같은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텔레비전의 광고, 드라마, 쇼 등을 통해서 시각적으로 화려한 대중문화도 급속히 발전했으며, 상품 광고 시장도 보다 다채로워지고 거대해졌다. 세계 곳곳의 뉴스가 실시간으로 텔레비전에 비춰지면서 지구촌 사회도 한층 더 가까워졌고, 여러 나라의 문화적인 교류도 훨씬 활발해졌다. (게재 21.11월)
항공 기술은 1차(1914-1918), 2차(1939-1945)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크게 발전했다. 큰 전쟁을 겪으면서 각 국은 비행기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하게 인식했고 경쟁적으로 기술을 개발했다. 독일군은 1915년부터 비행기에 총을 장착해 전투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1939년 2차 대전 중에는 최초로 프로펠러가 아닌 고압, 고속 공기 분사에 의해서 추진되는 제트기(Heinkel He 178)를 실험적으로 생산했다. 1942년에는 로켓 연료를 이용한 첫 번째 비행기(Me 163 Komet)도 만들었다. 1943년에는 메사슈미트 262(Me 262)라는 실전용 제트기를 만들어 1944년 전투에 투입하기도 했다. 이 제트 전투기는 시속이 550마일(880km)에 달했는데, 당시 연합군의 가장 빠른 프로펠러 전투기도 시속이 430마일(700km)에 불과한 때라 전쟁 막바지에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지만 이미 독일군의 패색이 짙은 이후였기에 전세 자체를 뒤집는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2차 대전 중 미국에서 발전한 주요 항공 기술은 여압기술(Pressurization)이었다. 당시 전투기 조종사들은 엄청난 추위와 고통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건 바로 높은 비행 고도에서 겪는 극단적인 기온과 기압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1만m 상공의 기온은 영하 57도이고, 기압은 지상의 25%, 습도는 0.001%밖에 안 된다. 이 때문에 조종사들의 공중 작전은 살인적인 인내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여압기술로 조종실의 온도와 압력을 조절할 수 있게 되자 훨씬 쾌적한 조건에서 운항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여압기술은 2차 대전 말기 미군의 B-29가 고도 9,100m 상공에서 일본에 폭격을 가할 때 일본 공군이 효과적으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투기 수요가 줄어들면서 비행 산업은 본격적으로 상업 부분에서 활로를 찾기 시작했다. 이미 미국을 중심으로 원거리 상업 비행의 씨앗은 뿌려져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전인 1927년 5월 20일, 미국의 찰스 린더버그는 세인트루이스(Spirit of St. Louis)호를 타고 뉴욕에서 파리 간 3,600마일(5,800km)을 33시간 50분에 주파하는 최초의 대서양 횡단에 성공해 장거리 비행시대의 가능성을 알렸다. 1927년 6월 28일에는 미 육군의 메잇랜드와 헤겐버거(Lester Maitland and Albert Hegenberger)가 미국 본토에서 하와이까지 2,400마일(3,900km)을 비행해 최초의 태평양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1918년부터는 미국 내에서 항공기를 통한 우편배달도 상용화되기 시작했고, 1919년에는 미국-캐나다간 국제 운송도 이루어졌다.
1929년에는 여객 운송만을 위한 비행기(Boeing Model 80A-1)도 제작됐다. 18명 정도의 승객만 탑승하는 이 비행기는 525마력의 엔진을 이용해 14,000ft(4,200m) 상공을 시속 125마일(200km)의 속도로 날았다. 이 비행기에는 승객을 위한 가죽 의자, 개인 독서등, 화장실, 냉온수 시설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에는 엔진의 소음이 심해서 비행기 안에서 거의 대화가 불가능했고, 겨울에는 객실이 지나치게 춥고 여름에는 지나치게 더웠으며, 내부 기압도 낮아 비행할 때 단단히 고생을 각오해야 했다. 초기 비행기는 이처럼 여건이 열악했기 때문에 1930년 엘렌 처치(Ellen Church)라는 간호사가 색다른 제안을 하였다. 그 전까지는 보조 파일럿의 임무였던 승객 서비스 업무를 별도의 승무원에게 맡기자고 건의한 것이다. 그녀는 승객을 살피고 식사와 커피를 제공하는 승무원이 특히 여성일 경우 승객의 공포를 줄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아이디어를 냈다. 그녀의 재미있는 발상은 큰 호응을 얻어 그녀를 포함한 7명의 간호사들이 최초로 시작한 스튜어디스 서비스는 오늘날까지 항공 서비스의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초기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2차 세계 대전 후 본격적으로 여객 비행의 시대가 열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특히 미국은 여압장치 등 전쟁 중 개발한 기술과 국내외의 풍부한 이동 수요를 바탕으로 전후 항공기 제조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1949년에는 세계 대전 당시 장거리 수송기의 기술을 활용한 민간 여객기(Boeing 377 Stratocruiser)가 운항을 시작했다. 아직은 프로펠러 비행기였지만 넓은 객실에 압력과 온도가 조절되는 쾌적한 환경은 본격적인 비행 여행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비행기 여객 수가 선박 여객 수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최초의 제트 여객기인 영국의 DH코멧(de Havilland Comet)이 운항을 시작했다. 81개 좌석이 있는 73톤가량의 이 육중한 비행기는 시속 500마일(805km)이라는 놀라운 속도로 1,500마일(2,400km)을 비행했다. 압도적인 속도를 바탕으로 제트기는 이내 프로펠러 비행기를 제치고 여객기의 주종으로 자리 잡았다. 초기 제트기 생산에서도 큰 시장을 가진 미국 회사가 우위를 차지하였다. 1958년 뉴욕-파리 간을 취항한 보잉 707은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해 1979년까지 전부 865대가 생산되었다. 미국 더글라스사의 DC-8도 1959년 운항을 시작해 1972년까지 556대가 만들어졌다. 1968년에 취항한 보잉 737은 지금까지도 계속 생산이 이어져 세계적으로 일 만대 이상 만들어지고 있다.
1970년부터는 점보 여객기 시대가 열리면서 비행기를 통한 이주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1970년 미국의 보잉은 412명의 승객을 태우고 시속 550마일(885km)의 속도로 운항하는 비행기(Boeing 747)를 출시해 대중이 저렴하게 비행기로 여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2005년 유럽의 에어버스는 최대 600명까지 탑승(A380) 하는 항공기를 만들었다. 비행기를 더욱 빠르게 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1963년 미국 록히드사의 전투기 YF-12A는 마하3.3(2,200mph, 3,550km/h)의 속도를 기록했다. 1976년에는 영국, 프랑스가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Concorde)의 운항을 시작했다. 콩코드는 마하2(1,350mph, 2,200km/h)의 속도로 일반적으로 7시간 반이 걸리는 대서양을 3시간 30분 만에 주파했지만 고비용 문제로 2003년 운항을 중단하였다.
2000년대 들어 저가 항공이 활성화되면서 항공은 우리 생활에 더욱 가까운 교통수단이 되고 있다. 중국, 인도 등 신흥 시장의 항공 수요도 점점 커지고 있어 현재 연 40억 명 이상인 전 세계 항공 승객은 2037년이 되면 82억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1년 개항한 우리나라의 인천공항도 짧은 시간 안에 한해 6,600만 명의 승객이 오고가고 하루 1,000대의 비행기가 1분에 한 대 꼴로 뜨고 내릴 정도로 분주한 세계 주요 공항 중 하나로 성장하였다. (게재 21.11월)
1869년 대륙횡단철도의 개통으로 미국인들은 당시 돈 150달러(현재 가치 3,000달러 정도)로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전에 몇 달씩 걸리던 이동 시간도 7일 정도로 단축되었다. 1876년에는 속도가 더 빠른 급행열차(Transcontinental Express)까지 생겨 3일 반 만에 대륙을 가로지를 수 있게 되었다. 대륙횡단철도의 개통으로 서쪽과 동쪽을 왕래하는 이주는 급속히 빨라지고 빈번해졌다. 사업, 정착, 관광을 원하는 동부 사람들이 서부로 쏟아져 들어왔고, 이들이 서부의 광산과 산림에서 캐낸 자원과 들판에서 재배한 농산물은 동부로 흘러 들어갔다. 철도가 중간 정차하는 중부 내륙 지역도 그동안의 고립을 벗어나서 새로 정착민들을 받아들여 성장하기 시작했다. 대륙횡단철도의 건설에는 당시 기준으로 1억 2천만 달러(현재 가치 23억 달러 정도) 정도가 소요 되었지만 북미 대륙의 연결은 그 이상의 가치를 발휘했다.
한편 토지 공여 등으로 큰 이득을 본 투자자들은 이후 서부 지역의 철도를 비롯한 산업 전반을 지배했다. 이들은 운송과 개발을 독점하고 토지와 부를 독식하면서 사회 전반에 많은 부작용도 낳았다. 빠르게 성장한 철도는 너무 급격한 발전에 따른 후유증으로 경제위기를 유발하기도 했다. 첫 번째 위기는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된 지 4년이 지난 1873년에 있었다. 당시 미국 전역에는 감염률 100%, 치사율이 10%에 이르는 치명적인 말 독감이 유행하던 참이었다. 이미 물류의 대부분은 증기 기관차가 담당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기차 연료인 석탄을 여전히 마차가 공급한다는 점이었다. 말 독감으로 말이 부족해지자 일순간 전국의 철도 운송에 차질이 발생했다. 설상가상으로 유니온퍼시픽의 책임자였던 듀란트(Thomas C. Durant) 등이 대륙횡단철도 건설 과정에서의 횡령 혐의로 1872년 의회 조사를 받는 스캔들이 터지자 그간 철도 건설의 부정과 과잉 투자에 대한 불안감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철도 회사들의 도산을 우려한 투자자들은 대대적으로 철도 채권을 투매하기 시작했다. JP 모건을 비롯한 금융권이 이 채권을 인수해서 급한 불은 껐지만 이후 금융재벌이 철도 산업 전반을 지배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 1893년에 일어난 또 다른 위기는 당시 미국 건국 이래 최대의 경기 침체라 불릴 정도로 심각했다. 그 동안 몇 차례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금융자본들은 철도 건설을 계속했는데 수익을 거두지 못하는 노선이 늘어난 데다 외국 발 초대형 금융 위기까지 터지자 많은 은행들 도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94년까지 4분의 1의 철도 노선이 파산했고 전국적으로 4만 마일(64,000km)의 철도가 운행을 멈췄다. 이 일을 계기로 많은 철도 회사들의 병합이 이루어졌고, 1906년에는 7개 대형 회사가 전체 철도 노선의 70%를 장악하게 되었다.
부침을 거듭하던 철도는 자동차의 등장으로 1920년대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새롭게 발명된 자동차는 철도의 여객 수요를 빠르게 잠식해 들어갔다. 석탄, 철강 같은 벌크 화물을 운반하는 철도의 역할은 계속됐지만 탑승객의 감소로 전반적인 수익성은 점차 악화됐다. 급기야 1970년에는 뉴욕 기반의 주요 철도 기업이었던 펜센트럴(Penn Central Transportation Company)이 도산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는 당시 최대 규모의 기업 파산으로 시장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펜센트럴의 도산을 계기로 미국 의회는 주로 여객 운송만을 담당하는 국영 철도 회사(Amtrak)를 설립했고 경제성 있는 노선 중심으로 철도 산업을 구조조정 하였다. 오늘날 미국의 철도는 유니온퍼시픽(Union Pacific), CSX, 벌링턴노던산타페(BNSF), 암트랙(Amtrak) 등 몇몇 큰 회사를 중심으로 전체 육상 화물 운송의 절반 정도 물량 및 워싱턴-뉴욕-보스턴 구간(Northeast Corridor) 등 경쟁력이 있는 노선에서의 여객 운송을 담당하고 있다. (게재 21.11월)
혁신을 통해 나아가는 미래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난 과거 혁신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여정이었을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실제 우리의 앞날은 불확실 속에서의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오늘날의 뉴욕을 둘러싼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쟁을 보면 미래의 예측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네덜란드는 1614년 뉴욕 일대를 자국의 영토로 천명하였다. 문제는 영국도 이미 뉴욕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점이었다. 1606년 영국의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컴퍼니에 이 일대의 특허장(Charter)을 주었다. 실제로 이후 버지니아 컴퍼니는 1620년에 청교도들의 이주 제의가 들어오자 오늘날 뉴욕 허드슨강 하구에 정착할 것을 허가했다. 만약 청교도들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당초 예정대로 이곳에 도착했으면 뉴욕을 둘러싼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쟁은 조금 더 일찍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1624년경부터 뉴욕에 정착 거점을 설치한 네덜란드는 40여년 후인 1667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후 뉴욕을 영국에 내어 주고 대신 세계 다른 지역의 식민지를 차지하는 선택을 했다. 당시 승전국인 네덜란드가 뉴욕을 포기한 것은 미래의 가치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다. 1667년은 네덜란드가 영국과 17~18세기 해상 권력을 두고 여러 차례 다툰 영국-네덜란드 전쟁(Anglo-Dutch War)의 2차 전쟁에서 승리한 해였다. 그 결과 그 해 7월 31일 네덜란드 도시 브레다에서는 승전국 네덜란드와 패전국 영국의 협약이 있었다. 이 협약(Treaty of Breda)에서 네덜란드는 뉴욕을 공식적으로 영국에 넘기는 대신 동남아의 인도네시아(Indonesia)와 남미의 수리남(Suriname)을 전리품으로 챙겼다. 당시 대규모 농장이 형성돼 열대 지방 농작물을 재배했던 이 두 곳은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아메리카의 여러 모피 교역지 중 하나인 뉴욕에 비해 훨씬 가치 있는 곳이었다. 미래의 부는 아메리카가 아니라 열대 지방에 있다는 판단이었다. 어차피 영국 식민지들에 둘러싸여 있고 수년 전부터 영국이 실효 지배하고 있었던 뉴암스테르담을 영국의 영토로 인정하는 대신 자신들은 더 크고 확실한 이득을 챙기겠다는 셈법이었다. 네덜란드의 이 결정은 지역의 매력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하는 것이고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간의 중요성은 시대 흐름과 사람들의 힘이 만들어내는 산물인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가 하는 많은 선택들도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그 생각이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이 매우 많을 것이다. (게재 21.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