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19세기 초반의 프런티어 오두막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어린 링컨의 오두막집에서 책이 비에 젖어 버렸던 일화는 오늘날에도 독서와 정직의 중요성을 어린이들에게 가르칠 때 많이 인용하는 이야기이다. 책을 좋아했던 소년 링컨은 어느 날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조지 워싱턴 전기를 빌려 읽다가 머리맡에 놓고 잤다. 그런데 밤사이 내린 비로 천장에 물이 새는 바람에 책이 젖어 버리고 말았다. 링컨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책 주인을 찾아가 사실대로 설명하고 용서를 빌었다. 이 이야기는 책 주인이 어린아이의 정직함에 감동하여 그 책을 링컨에게 그냥 선물로 주었다는 흐뭇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전국 정치 무대에 혜성처럼 등장해 1860년 대통령에 당선되고, 1863년 노예 해방을 선언하고, 1865년 분열될 위기의 미국을 다시 하나로 통합한 링컨은 1809년부터 1831년까지 20여 년간의 성장기를 이렇게 비가 새는 오두막집들에서 보냈다. 그가 살았던 집들은 아버지와 가족들이 직접 만든 어설픈 통나무집이었다. 그곳은 책을 하나 구하려고 해도 몇 시간을 걸어가야 할 정도로 이웃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읽던 책을 그대로 머리맡에 놓고 잘 수밖에 없을 만큼 비좁았다.
개척민으로서의 생활은 링컨의 아버지 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브라함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미국의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1778년, 13개 식민지의 하나였던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토머스 링컨이 5살 소년이던 1783년에는 영국과의 전쟁이 끝나고 신생국가 미국이 탄생했다. 미국 독립 후 그의 가족은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가 당시로서는 먼 서부였던 오늘날의 켄터키주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토머스 링컨이 8살이었던 1786년에 밭을 일구던 그의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주민의 습격으로 살해당하는 변고가 일어났다. 당시에는 이처럼 원주민들이 외딴 농장에서 일하는 이주민들을 공격하는 일이 빈번했다.
부친을 여의고 어렵게 자란 토머스 링컨은 1802년 24세 되던 해에 집에서 독립했고, 켄터키 엘리자베스타운(Elizabethtown) 북쪽 지역에 238에이커(1㎢)의 땅을 사서 농사를 시작했다. 1806년에 결혼을 했고 1807년에는 첫째 딸 사라 링컨(Sarah Lincoln)을 얻었다. 1809년에는 엘리자베스타운 남쪽 호지빌(Hodgenville)이라는 곳으로 이사해 300에이커(1.2㎢)의 땅을 구입했다. 그의 가족들은 여느 개척자들이 그러했듯 흙과 통나무로 만든 17㎡ 면적의 작은 집에서 생활하며 넓은 토지를 일궜다. 통나무집을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1809년 2월 12일에는 둘째 아들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이 태어났다. 이제 두 명의 아이를 책임진 가장이 되었지만 토머스 링컨의 생활 형편은 좀처럼 안정되지 않았다.
가장 심각했던 문제는 토머스 링컨이 1809년 호지빌에 산 땅이 경계와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땅이었다는 점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도 아니었던 그는 소유권을 둘러싼 오랜 법정 다툼 끝에 절반 가까운 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보통 나무나 돌 같은 자연물을 구획의 기준으로 삼았고 정확한 측량 문서도 없었던 당시의 토지 거래에서 이과 같은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땅을 잃은 링컨의 가족은 잠깐 도시로 이사했다가 아브라함 링컨이 2살 되던 1811년에 230에이커(0.9㎢)의 땅을 사서 다시 개척민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가족의 불행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 링컨의 동생이 태어났지만 얼마 안 돼 죽었고, 1815년에는 다시 토지 소유권에 대한 소송이 일어나 많은 땅이 또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낙심한 토머스 링컨은 결국 1816년 남은 토지를 모두 처분한 후 북쪽의 인디애나주로 이사해 160에이커(0.6㎢)의 땅을 사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816년 이제 막 연방에 가입한 인디애나는 당시 켄터키보다 더 외떨어진 프런티어였다. 토머스 링컨은 그곳의 측량이 켄터키보다 정확하고 토지 소유권이 안정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린 아이들까지 동행한 2주간의 긴 이주를 감행했다. 이사할 당시 7살의 꼬마였던 아브라함 링컨은 21세의 청년이 될 때까지 14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외진 곳까지 왔지만 링컨 가족의 생활이 어렵기는 그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어린 사라와 아브라함까지 힘을 합쳐 숲의 나무를 베고 농지를 개간했지만 가난한 개척민의 일상은 궁핍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난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슬픔이 이내 이들 가정에 닥쳤다. 이사 온 지 2년 후인 1818년 링컨의 어머니 낸시가 우유병(Milk sickness)에 걸려 갑자기 사망한 것이었다. 우유병은 독초를 먹은 젖소에서 짠 우유를 먹었을 때 걸리는 병이었다. 불행히도 이 일대 소들이 풀을 먹는 하천가에 그 독초가 자라고 있던 것이었다. 낸시뿐만 아니라 같이 인디애나로 이주한 아브라함 링컨의 이모, 외삼촌도 사망했고 친한 이웃들도 여러 명이 죽었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에는 아브라함 링컨의 누나인 11살 사라가 집안일을 도맡아야 했고, 9살 링컨도 지금까지보다 더 큰 역할을 완수해야만 했다.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보살피기 어려웠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1819년 12월 세 명의 아이가 있었던 미망인 사라 부시 존스턴(Sarah Bush Johnston)과 재혼했다. 새어머니와의 만남은 아브라함 링컨의 인생에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링컨은 어렸을 때부터 밭에 나가서 일하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링컨의 성격을 못 마땅해 했지만, 새어머니는 그가 독서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4마일(6.4km)이나 떨어져 있던 학교에 자주 가지 못했던 링컨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책을 통해 소중한 학습을 이어갈 수 있었다. 링컨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성경, 이솝우화, 로빈슨 크루소, 조지 워싱턴 전기, 벤저민 프랭클린 자서전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말과 글의 구조를 깨우쳐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이 19살이 되던 1828년에 누나 사라가 21살의 나이로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는 불행이 또 다시 찾아왔다. 당시 기본적인 의료 시설도 없었던 외진 마을에서 자녀를 가지는 것은 이처럼 큰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30년 인디애나에 다시 우유병이 돌기 시작하자 이를 두려워 한 링컨의 가족은 한 번 더 이사를 결정했다. 이번 목적지는 인디애나보다 더 먼 프런티어였던 일리노이였다.
일리노이로 이사한 지 1년이 지난 1831년, 22세의 아브라함 링컨은 집을 떠나 독립했다. 상점의 점원으로 취직한 젊은 링컨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처음 뉴올리언스까지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곳에서 난생 처음 흑인 노예를 목격했다. 그 순간부터 시작해 대통령이 된 그가 노예 해방을 선언하기까지는 3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아브라함 링컨의 훗날 생애는 잘 알려진 대로이다. 그는 아직 젊은 나이였던 1832년 일리노이주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했고, 1834년 당시 신생당이었던 휘그당(Whig Party) 소속으로 주 의회에 진출했다. 그 시기 독학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해 1836년 변호사가 된 후에는 오랫동안 법률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846년 첫째 아들 로버트 링컨(Robert Todd Lincoln)을 얻어 훗날 정치가로 키워냈지만, 이후 얻은 둘째, 셋째, 넷째를 모두 어렸을 때 결핵, 열병, 심장병으로 잃고 말았다. 링컨은 1847년 처음 하원의원에 당선돼 연방 의회에 진출했고, 1856년에는 당시 탄생한 지 2년밖에 안 된 신생정당인 공화당에 가입했다. 그는 1858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미국이 분열하면 안 된다는 강렬한 신념과 웅변으로 순식간에 전국적인 유명인사가 되었다. 1860년 51세의 링컨이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이것을 빌미로 연방에서 탈퇴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61년부터 1865년까지는 사망자만 60만 명에 이르렀던 끔찍한 남북전쟁이 미국을 휩쓸었다. 링컨은 전쟁 중인 1863년 1월에 노예해방을 선언했고, 1863년 7월 게티스버그에서 승리함으로써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다. 1864년 재선에 성공했지만, 남군이 최종적으로 항복한지 5일 만인 1865년 4월 14일 암살자의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외딴 곳에서 개척민의 아들로 자란 아브라함 링컨은 전 생애에 걸쳐서 극한의 어려움을 이겨낸 강인한 정신을 보여주었다.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9살에 누나를 잃고, 3명의 어린 자녀를 먼저 떠나보내는 고통을 겪고, 남과 북이 자신의 당선을 빌미로 갈라서는 것을 보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당당하게 역경을 이겨낸 그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그런 그를 길러낸 공간은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의 외로운 개척지였다. 사람도 만나기 어려웠고, 가난 속에서 힘겹게 살아야 했던 프런티어에서 어린 소년은 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배웠고, 거친 자연 속에서 강인한 마음을 키웠다. (게재 21.11월)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자체 R-7로켓을 이용하여 스푸트니크 1호(Sputnik 1)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83kg의 소형 위성이었던 스푸트니크는 160마일(250km)의 고도에서 하루 16회 지구를 회전하며 20MHz, 40MHz의 라디오 신호를 발신했다. 스푸트니크가 미국 상공을 지날 때에 미국인들도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우주에서 전송하는 삐-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머리 위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경쟁국 소련의 위성이 회전하고 있고 이 기계는 언제든지 무기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은 미국인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해 11월 3일 소련은 스푸트니크 2호(Sputnik 2)에 라이카(Laika)라는 이름의 개를 태워서 7일간 궤도에 머무르게 했다. 지구로 다시 돌아오게 하지는 못했지만 우주 공간에서 생물이 생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한 달 뒤인 12월 6일 미 해군 연구소(Naval Research Laboratory)가 발사한 미국 첫 번째 위성(Vanguard TV3)이 공중에 뜨지도 못하고 폭발했을 때 미국인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우주에서 자신들을 계속 능가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초조한 경쟁 속에서 미국은 다음 해인 1958년 1월 29일 NASA(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1월 31일에는 독일에서 망명한 로켓 기술자 폰 브라운(Von Braun) 등이 참여해 만든 로켓(Juno 1)을 이용해 13.4kg의 위성(Explorer 1)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우주 개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새롭게 출범한 나사는 인간을 지구궤도에 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해 10월 7일 머큐리 프로젝트(Mercury project)를 개시했다. 그리스 신화 속 헤르메스의 이름을 빌린 머큐리 프로젝트는 이후 1963년까지 5년간 20개의 무인 우주선과 6개의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다. 달까지 가는 것은 당연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이 당시 프로젝트의 목표는 유인 우주선을 지구 주위로 궤도 비행하게 하고, 우주에서 인간의 활동 능력을 조사하고, 비행사를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이때에는 우주에 관한 모든 것이 미지수였다. 사람이 탄 대형 로켓을 폭발 없이 무사히 발사할 수 있을지, 발사 시 엄청난 속도로 인한 중력을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지, 대기권으로 다시 진입할 때 공기와의 마찰로 발생하는 수천 도에 이르는 높은 온도를 어떻게 처리할지, 우주의 방사선과 운석으로부터 우주선이 안전할 것인지, 무중력 상태에서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을지 등은 모두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5년 후 종료된 머큐리 프로젝트는 당시 가치로 2억 7,700만 달러(현재 가치 24억 달러, 2.9조 원 정도)의 예산을 사용하였고, 몇 번의 실패는 있었지만 결국 초기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머큐리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중에도 소련은 계속해서 미국을 앞서 나갔다. 1959년 1월 2일 루나 1호(Luna 1)는 최초로 태양 궤도를 공전한 인공위성이 되었고, 그해 9월 13일에는 루나 2호(Luna 2)가 달 궤도에 진입해 달 표면에 경착륙(Hard landing)했다. 10월 7일에는 루나 3호(Luna 3)가 최초로 달의 뒤편 사진을 지구로 전송했다. 미국은 1960년 4월 1일 첫 번째 기상위성(Tiros 1)을 발사하기는 했지만 7월 29일 아틀라스 로켓을 활용한 머큐리 프로젝트 무인 발사(Mercury-Atlas 1)가 3분 18초 후 실패하면서 다시 한 번 자존심을 구겼다. 미국은 1961년 1월 31일 침팬지를 태운 로켓 발사에 성공(Mercury-Redstone 2) 하였지만 소련은 이내 몇 발짝을 성큼 앞서갔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이 보스토크 1호(Vostok 1)를 타고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지구 궤도에 올라간 것이다. 당시 27세였던 가가린은 고도 203마일(327km)까지 올라가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한 바퀴 돌고 108분 만에 지구로 다시 내려왔다.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도 한 달 후인 5월 5일 머큐리 프로젝트의 첫 번째 유인 우주선(Mercury-Redstone 3, Freedom 7)을 발사하여 알랜 셰퍼드(Alan Shepard)를 117마일(188km) 상공(우주의 기준은 정의하는 기관에 따라 81~122km 범위이다)에 올렸다. 이날 비행으로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 된 셰퍼드는 가가린처럼 완전한 진공 상태인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돈 것은 아니었고 준우주(Suborbit)에 도달했다가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내려왔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우주 탐험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대단해서 모두 4,500만 명이 이날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셰퍼드의 15분 22초간의 비행을 지켜보았다.
이처럼 양측 간 경쟁이 치열하던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달탐사를 선언했다. 미국은 이제 막 첫 번째 우주인이 117마일의 준우주 고도까지 곧장 올라갔다가 바로 내려오는 탄도비행을 마친 단계였다. 24만 마일이나 떨어진 달에 착륙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미 달의 뒤편 사진을 촬영할 정도인 소련에 비해 무인 비행 기술도 뒤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케네디는 언제(10년 안에), 어디서(달에), 어떻게(착륙하여 무사히 돌아온다) 한다는 비전을 명확하게 제시하였고 꿈같은 이 일의 실현을 위해 국가적 자원을 투입했다. 17세기 초 대서양 연안에 도착한 이래 끊임없이 이주를 계속해온 미국인들도 큰 관심으로 우주를 향한 다음 탐험에 호응했다.
케네디의 발표 이후 양측의 레이스는 한층 속도가 붙었다. 1661년 8월 6일 소련의 티토프(Titov)는 보스토크 2호를 타고 25시간 동안 지구 궤도를 17.5바퀴나 돌았다. 인간이 오랫동안 우주에 체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미국도 유인 우주 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머큐리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는 한편 12월 7일에는 제미니(Gemini) 프로젝트를 최종 승인하고 개발에 착수했다. 이후 8년 동안 제미니 프로젝트는 많은 실험을 거치면서 달 착륙 기술을 점점 발전시켰다. 이것이 얼마나 길고 복잡한 과정이었는지 실감하기 위해 이 시기 발사된 대부분 우주선들의 임무를 자세히 언급해 보도록 하겠다.
제미니 프로젝트는 1962년부터 1967년 사이에 2개의 무인 우주선과 10개의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다. 제미니의 목적은 2인 1조의 비행사가 달에 갔다 돌아오는데 필요한 정도로 장기간(최대 2주) 동안 우주에 체류하는 기술을 연구하고, 우주 랑데부(Rendezvous), 도킹(Docking)(랑데부는 두 비행체가 근접 거리에서 똑같은 궤도 속도를 맞추는 것을 의미하고, 도킹은 실제로 물리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우주유영(Space walking) 등 달 탐사에 중요한 기술을 검증하고, 달에서 지구로 다시 돌아오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에는 당시 기준 총 13억 달러(현재 가치 100억 달러, 12조 원 정도)의 비용이 소요되었다.
제미니 프로젝트가 준비 중인 중에도 머큐리 프로젝트는 1963년까지 이어지면서 장시간 궤도 비행 기술을 완성했다. 1962년 2월 2일 우주비행사 존 글렌(John Glenn)은 머큐리-아틀라스 6(Friendship 7)을 타고 미국 최초로 지구 궤도 비행에 성공했다. 162마일(261km) 상공까지 올라간 그는 5시간 동안 궤도를 3바퀴 돌고 무사히 귀환했다. 글렌은 후에 정계에 진출해 상원의원이 되었고 1998년에는 77세의 나이로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탑승해 최고령 우주인 기록도 세웠다. 머큐리 프로젝트는 1963년 5월에 34시간 비행에 성공해서 하루 이상 궤도에 머무르는 기술도 확보했다. 이처럼 하나씩 우주 기술을 늘려가고 있을 때에 전 미국인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발생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에서 저격을 당해 사망한 것이었다.
케네디의 죽음은 1960년대가 저물기 전에 달에 도달하고자 하는 꿈을 더욱 간절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제미니 프로젝트를 통해 유인 우주선을 계속 발사하면서 달 착륙의 목표에 조금씩 다가갔다. 1965년 3월 23일에는 제미니3이 바로 며칠 전 소련이 성공한 2인 1조의 유인 우주 비행을 완수했고, 6월 3일(제미니4)에는 미국으로서는 처음으로 22분 동안의 우주 유영(Space walk)에 성공했다. 8월 21일(제미니5)에는 1주일 이상 우주에 머물면서 우주 랑데부 기술을 테스트 하였다. 12월 4일(제미니7)에는 달까지 왕복하는데 필요한 시간인 2주 동안의 유인 비행을 실험했다. 다음해인 1966년 3월 16일(제미니8)에는 첫 번째로 도킹에 성공했고, 9월 12일에는 그 전에 발사된 추진체와 도킹한 제미니 11이 추가로 고도를 높여 당시 지구 궤도 비행 최고 고도인 854마일(1,374km)까지 올라가는 신기록도 달성했다. 제미니 프로젝트는 1966년 11월 제미니 12가 5시간 30분 동안의 선외 활동(Extravehicular activity: EVA)과 통상 4번째 도킹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을 끝으로 모두 종료됐다. 1965년 3월부터 1966년 11월까지 1~3개월 간격으로 2인 우주선을 모두 10차례 발사한 숨 가쁜 일정이었다. 제미니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1966년 2월 제미니 9의 발사를 연습하던 파일럿 2명이 전투기 시험 비행 중 비행장에 추락해 사망한 일은 우주 탐사 프로젝트 중 발생한 첫 번째 인명 피해가 되었다. 한편 이 기간 중 소련은 최초로 우주 유영에 성공했고(1965.3.18), 무인 비행선을 달에 연착륙(Luna 9, 1966.2.3)시켰고, 최초로 다른 행성인 금성 궤도에 탐사선을 보냈으며(1966.3.1), 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Luna 10, 1966.3.31)도 발사했다. 하지만 제미니 프로젝트가 종료될 즈음에 유인 우주 기술에서는 미국이 소련을 조금씩 앞서가기 시작했다.
치열하게 경쟁하던 미국과 소련은 달에 착륙한 아폴로 프로젝트 이후 국제 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1975년 소유즈 19호와 아폴로 18호가 도킹한 것을 계기로 우주 탐사는 미소 양국 간 경쟁이 아니라 협동의 시대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1986년 소련은 독자적으로 미르 우주 정거장을 만들어 운영했지만 소련의 해체 후 냉전이 누그러진 다음에는 여러 국가가 협력해 우주 정거장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1993년에 국제 우주정거장(ISS)에 대한 국가 간 협약이 체결되었고, 1998년부터 이 우주정거장이 활동을 시작했다.
우주를 보다 쉽게 왕래할 할 수 있는 우주 왕복선도 개발되었다. 아폴로 프로젝트에서 썼던 방식처럼 지구로 돌아올 때 비행사들이 캡슐을 탄 채 바다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행기처럼 생긴 왕복선을 타고 활주로에 착륙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우주 비행선은 바다에 그냥 버려지는 캡슐과 달리 여러 번 재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1981년 4월 12일에 첫 번째 우주왕복선인 컬럼비아호(Columbia)가 출발하였고, 이후 챌린저, 디스커버리, 아틀란티스 등이 뒤를 이었다. 그렇지만 1986년 1월 28일 7명의 비행사가 탑승한 챌린저호가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가운데 발사 73초 만에 폭발하고, 2003년 2월 1일 컬럼비아호가 지구로 귀환하는 중 갑자기 터진 충격적인 사건은 지금까지 우주 탐사 역사상 큰 아픔으로 남아 있다. 결국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는 2011년 7월 21일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현재 우주정거장으로 향하는 사람과 물자는 러시아의 소유즈(Soyuz) 우주선에 태워지고 있고, 이 우주선은 우주왕복선처럼 여러 번 반복해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주탐사에서는 민간의 영역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또한 나사는 달이나 화성과 같은 곳에 영구적인 기지를 만들어 인간을 이주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검토하고 있다. 태양계를 벗어나 먼 우주(Deep space)로 나가는 기술도 연구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주는 정말로 크기 때문에 과연 인간의 이주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예측할 수가 없다. 실제로 2004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20년까지 달에 다시 가는 것을 포함해서 화성 등 태양계로 인간의 거주 지역을 확장시키는 야심찬 계획(Vision for Space Exploration)을 발표했고, 2005년에는 나사가 실행 프로그램(Constellation Program)까지 만들었지만 예산 문제로 오바마 정부에서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현재 나사는 2033년까지 화성으로 사람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고, 민간 회사들도 독자적인 탐사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확실하게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없는 상황이다. 지금으로서 분명한 것은 인간이 우주로 계속 나아갈 것이라는 점밖에 없을 것이다. (게재 21.11월)
아메리카 대륙의 자연은 가혹할 때가 많다. 서부 해안 지대에는 지진의 공포가 상존한다. 1906년 4월 18일 발생한 리히터 규모 7.9의 샌프란시스코 지진은 그 가장 큰 피해 중 하나였다. 지진 자체의 파괴력도 컸지만 화재로 인한 추가적인 손실이 심각했다. 당시 신문물이었던 전기선과 가스관로에서 발생한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도시의 3/4을 초토화 시켰다. 시 당국은 계속 옮겨 붙는 불길에 맞서 건물들을 일부러 폭파시켜 가며 방화선을 만들었지만 결국 골든게이트 파크 인근 서쪽 일부만을 간신히 지켜냈을 뿐이었다. 1848년 골드러시 이후 60여 년간 샌프란시스코라는 새로운 땅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이 지진으로 자신들이 그동안 일군 많은 것을 한 순간에 잃어야만 했다.
서부 해안가에는 이 이후로도 10~20년마다 한 번씩 규모 6 이상의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비교적 최근인 1989년에는 샌프란시스코 남쪽 해안가인 산타크루즈에서 규모 6.9의 로마 프리에타(Loma Prieta) 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63명, 부상자는 3,757명에 달했고, 피해액은 당시 금액으로 70억 달러나 됐다. 5년이 지난 1994년에는 LA 북쪽 지역에서 또 한 번 큰 지진이 있었다. 노스리지 지진(Northridge)으로 불리는 이 지진으로 57명이 죽고 8,70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 다행히 노스리지 지진 이후 수십 년 간 인구 밀집 지역에 피해를 끼치는 큰 지진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작은 지진은 수시로 일어나 주민들을 긴장하게 하고 있다. 오늘날의 발전된 기술로도 자연이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의 삶을 위협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한편 동부 해안 지역은 매년 여름, 가을이면 허리케인에 대비해야 한다. 보통 6월에서 11월 사이 5~9개 정도 발생하는 대서양 허리케인은 이곳 사람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존재이다. 대서양 허리케인은 바다에서 만들어진 후 수일간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해 절정에 이른 상태에서 육지로 상륙하기 때문에 강우량과 바람의 속도가 엄청나다. 가장 큰 피해를 준 허리케인 중 하나였던 2005년 카트리나(Katrina)는 저지대에 위치한 뉴올리언스시의 80%를 물에 잠기게 했다. 이로 인해 1,833명이 죽고 당시 기준 1,250억 달러에 달하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 2017년은 유례없이 4개의 대형 허리케인이 동부 해안가에 상륙해 여러 곳에 재난이 일어났던 해였다. 8월 17일 발생해서 9월 2일 소멸한 하비(Harvey)는 강우량이 많은 특성을 보여 일부 지역에서는 단 며칠 동안 우리나라 1년 평균 강우량을 능가하는 1,500mm의 비를 뿌렸다. 대부분 지역에 1,000mm 이상 비가 왔고, 텍사스의 휴스턴을 비롯한 많은 도시들이 물에 잠겼다. 하비로 인해서 모두 107명이 사망했고, 카트리나와 동일한 1,250억 달러의 재산 손실이 발생했다. 연이어 닥친 어마(Irma)는 최대 풍속 180mph(285km/h, 초속 80m)의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 헤리케인이었다. 어마는 미국 뿐 아니라 인근 카리브해의 섬들에도 큰 피해를 끼쳐, 134명이 죽고 650억 달러의 재산 손해가 나게 했다.
많은 비와 바람을 동반하게 마련인 허리케인은 이처럼 파괴력이 크고 피해 범위가 넓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였다. 만약 집 전체가 물에 잠겨 떠내려가거나 바람에 날아가기라도 하면 이재민들은 그 동안 일궈 놓은 많은 것들을 한 순간에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인공위성과 항공기 탐사로 허리케인 발생 시점부터 이동 경로가 자세하게 예보되기 때문에 강제 피난 명령이 내려지는 경우도 많다. 어마가 상륙할 때에는 플로리다 주민 중 무려 600만 명이 강제 퇴거 명령을 받아 집을 떠나야 했다. 이들이 일시에 이동하면서 고속도로에 긴 이주의 대열이 만들어졌고, 주유소에서는 기름을 확보하기 위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최근의 기후 변화는 북쪽 도시들도 허리케인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했다. 뉴욕을 예로 들면, 그 전에는 상대적으로 안심하던 허리케인이 이제는 언제 도시를 마비시킬지 모르는 두려운 존재가 되어 시민들을 위협하고 있다. 2012년 10월에 뉴욕에 상륙한 허리케인 샌디(Sandy)는 그런 경각심을 크게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 이 태풍으로 당시 뉴욕에서만 53명이 죽고 190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전통적으로 폭우의 피해를 거의 겪지 않는 맨하탄은 샌디로 인해 큰 혼란을 경험했다. 1888년 폭설 이래 처음으로 증권거래소가 또 다시 이틀 동안 폐쇄되었고, 해안가 지하터널로 물이 들어와 남부 맨하탄(Low Manhattan)의 지하철과 차량 교통이 며칠간 중단되었다. 25만 대의 차량이 파손되고 수천 채의 집이 침수되었고, 강풍으로 곳곳에서 신호등과 가로수가 쓰러졌으며, 정전으로 80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뉴욕의 상징과도 같은 자유의 여신상도 피해를 입어 247일 동안 관광이 중단되기도 했다.
허리케인의 큰 충격은 이제 뉴욕도 폭우에 대비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을 불러 일으켰다. 바다의 온도가 상승해 해수면이 지금보다 높아진다면 해안가 도시 맨하탄은 허리케인이 닥쳤을 때 더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지적도 일었다. 만약 홍수가 빈번해지고 그때마다 금융과 상업의 중심기능이 멈춘다면 그로 인해 뉴욕과 전 세계가 입는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이런 우려에 따라 뉴욕시는 해안가에 언덕 형태의 공원 제방을 만들어 높은 파고가 닥쳤을 때 도시를 방어하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전기와 통신 장비를 홍수위 이상으로 올려 침수에 의한 정전과 통신두절을 방지하고, 해안가의 지하철과 지하터널이 폭우 시에도 정상적으로 작동되게 하는 대책도 마련했다. 이처럼 뉴욕의 허리케인 대응 태세를 강화하는 데에는 중장기적으로 많은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자연재해로 입을 수 있는 인명과 재산 피해의 위험이 현실로 닥친 상황에서 재난을 대비하는 것은 비용의 문제를 떠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 되었다.
넓은 대륙의 곳곳에서는 이 밖에도 다양한 종류의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서부 지역에는 건조한 여름부터 겨울 사이에 대형 산불이 일어나 막대한 피해를 끼치곤 한다. 1910년 8월에 발생한 대화재(Great fire) 때는 워싱턴, 아이다호, 몬태나 주에 걸쳐서 모두 12,100㎢의 면적이 불탔다. 우리나라의 경기도와 서울을 합친 것(10,200㎢)보다 큰 산림이 불 속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장비와 기술이 발달한 최근에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연 발화하는 산불을 진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예로 2017년 12월에 발생한 토마스 산불(Thomas fire)은 한 달여 간 서울 면적(605㎢)보다 큰 1,140㎢의 캘리포니아 산림을 태워 없앴다. 이 산불로 산간 지역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의 1,063채의 집이 전소 되었고,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8,500명의 소방관이 투입되어 불을 진압했지만 60mph(97km/h, 25m/s)로 불어오는 이 지방 특유의 산타애나 바람(Santa Ana Wind)에 실려 맹렬히 번져나가는 불을 초기에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의 북동부 지역은 겨울철 무시무시한 추위와 폭설을 견뎌내야 한다. 해마다 겨울이면 뉴잉글랜드와 뉴욕 지역에는 30cm가 넘는 눈이 쌓여 교통과 전력을 마비시키곤 한다. 위스콘신, 미네소타 등 오대호 연안 북부 지역에는 100cm가 넘는 눈이 쌓는 일도 잦다. 이 때문에 해마다 교통사고, 낙상, 심장마비, 눈사태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이어진다.
중부 대평원에서는 회오리바람인 토네이도가 주민들의 생활을 위협한다. 토네이도의 바람은 105mph(170km/h, 47m/s)에 달할 정도로 강력해서 한번 지나가면 수천 채의 건물을 파괴하고, 수백 명이 목숨을 앗아가는 경우도 있다. 남서부 지역의 경우에는 만성적인 물 부족이 문제이다. 이 일대 사막은 1년에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수로망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사람이 이주해 살 수 없던 곳이었다.
이렇듯 강력한 자연의 힘은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어렵게 하였지만 그들의 의지 자체를 꺾지는 못했다. 강력한 자연의 힘 때문에 일순간에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는 위험 속에서도 사람들은 상황에 대응해 싸우는 방법을 찾아나갔다. 거친 자연을 용기 있게 개척하면서 스스로의 운명을 일구어 나가는 자세는 미국 프런티어 정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게재 21.11월)
1893년 미국의 역사학자 프레드릭 잭슨 터너(Frederick Jackson Turner)는 시카고 세계 박람회 기간 동안 열린 역사학회에서 ‘아메리카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중요성’(The Significance of the Frontier in American History)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개최된 시카고 박람회는 신생국가 미국의 발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자리였다. 1851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1회 세계 박람회가 수정궁(Crystal Palace)으로 유리의 아름다움을 알렸고, 18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4회 박람회가 에펠탑으로 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면, 1893년 미국 시카고 박람회는 전기의 시대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Stephen Grover Cleveland)이 전기 스위치를 누르자 미시간호 옆 습지대에 새로 조성한 화려한 박람회장 전체에 전기불이 켜졌고, 6개월 간 불을 밝힌 행사장에는 전 세계에서 3천만 명이 몰려들어 반짝이는 전구처럼 빛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1893년 세계 콜롬비아 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 of 1893)는 아메리카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만큼 상징성이 큰 행사였다. 이 때문에 미국 내에서 시카고, 뉴욕, 워싱턴 등 여러 도시가 치열하게 유치 경쟁을 벌였고, 결국 시카고가 개최지로 최종 선정되는 행운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시카고는 이 박람회를 통해 1871년 당시 32만 명 주민의 30%가 집을 잃었던 처참했던 대화재(Great Chicago Fire)의 상처를 극복해냈음을 만방에 보여줬다. 비록 화재의 충격이 있었기는 했지만 시카고는 다수의 대륙 횡단 노선들이 지나는 철도 교통의 중심으로서 여전히 북미 대륙 서부로 향하는 관문과 같은 곳이었다. 동과 서의 물자와 사람은 여기에서 서로 교류했고, 서부의 풍부한 지하자원, 농산물, 축산물은 이곳으로 우선 집결돼 가공된 다음 대륙 전체로 퍼져 갔다. 철도의 건설에 힘입어 한적한 변방 군사기지에 불과했던 시카고는 19세기 말 빠른 시간 안에 뉴욕에 이은 미국 2대 도시로 성장했고, 프런티어의 중심이라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아메리카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터너의 논문이 바로 이 시카고의 박람회 장에서 발표된 것은 퍽 의미심장하다. 터너는 논문에서 프런티어의 존재 자체가 미국 역사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고 기술했다. 또한 건국 이후 200여 년에 걸친 프런티어 시대가 이제 끝났고 이로서 미국의 첫 번째 역사가 마무리되었다고 논증했다. 이 논문은 당시에 바로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지만 차차 여러 학자들의 공감을 얻어 이후 몇 십 년 간 프런티어를 미국 역사와 경제 연구에서 중요한 주제로 만들었다.
터너가 논문에서도 언급했듯이 1890년 미국 인구조사국(Census Bureau)은 이제 미국 내에는 더 이상 프런티어 라인(Frontier Line)이라는 것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주민들의 정착지가 이미 대륙 전체에 다 퍼졌기 때문에 미개척지와 맞닿은 경계선이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터너는 이를 인정한 상태에서 그 동안 프런티어가 미국식 민주주의를 만들고 국민성을 형성한 중요한 요소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1600년대 초반 유럽인들이 이주를 시작하고 1783년 미국이 독립한 후 1890년 프런티어 라인이 사라질 때까지 미국에서는 기존 사회 체계를 벗어나 가족 기반의 원시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일들이 반복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은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프런티어로 전진하는 일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터너는 이로 인해 미국의 역사에서는 독특한 개인주의가 발달했고, 통제에 대한 반감이 생겼으며, 관료제를 벗어난 자유가 선호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미국인들은 거친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용적이어야 했으며, 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필요한 것을 스스로 발명해 내야만 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특징들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개척자의 문화를 발달시켰으며, 서부의 정신이 끊임없이 동부 세계에도 영향을 주어 유럽과는 다른 미국식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고 풀이했다.
터너의 논문은 프런티어의 중요성을 일깨웠고 이후 사람들이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적지 않은 비판도 받았다. 많은 비평가들은 미국의 역사와 민주주의 발전에는 프런티어의 개인주의 외에도 남북전쟁의 갈등, 이후의 재건, 이민자의 지속적 유입, 산업자본의 발달, 혁신적 발명 등 다양한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식민지 시절부터 존재했던 지역 커뮤니티, 독립 이후 연방 정부라는 통합적 개념의 형성, 산업혁명 이후 기업 발달 등 다양한 형태의 사회 조직 및 상호 협력 체계가 미국의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꼬집었다. 또한 논문에서 프런티어의 확장을 강조하면서 아메리카에 ‘주인 없는 땅’(Free land)이 펼쳐져 있었다고 전제한 것도 큰 비판을 받았다. 기존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 뿐 아니라 흑인 노예, 히스패닉 등 다양한 인종들에 대한 고려 없이 백인만을 중심으로 프런티어 확장을 설명한 역사 인식도 박한 평가의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처럼 미국의 역사 전반을 오직 프런티어의 영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고 프런티어의 전진이 만들어냈던 여러 가지 부정적 요소도 간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100년도 훨씬 더 전에 쓰여진 터너의 논문에서 여전히 주목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메리카 대륙에 펼쳐진 이주의 장이 오늘날 미국 사회의 특징을 만들어 내는 데 꽤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그의 핵심 메시지이다. 우리는 그 이후 역사를 통해서도 위험한 경계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역동성이 사회 구성원 모두의 미래를 바꾸는 광경을 수차례 목격해 왔다.
새로운 곳을 개척하고 개인의 자유를 누린다는 의미의 ‘프런티어’라는 단어는 매우 매력적이어서 미국인들은 이 말을 비유로서 즐겨 사용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은 미국 사회의 발전 그 자체를 프런티어 개척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을 즐겼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0년대의 대공황을 극복하면서 고통 받는 미국인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설치하는 것을 남아있는 미개척 프런티어라고 규정했다. (There is still today a frontier that remains unconquered - an America unreclaimed. This is the great, the nation-wide frontier of insecurity, of human want and fear. This is the frontier - the America - we have set ourselves to reclaim. (Franklin D. Roosevelt, Radio Address on the Third Anniversary of the Social Security Act, 1938))
1960년 존 F 케네디는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미국인들에게 마음은 젊고, 영혼은 굳센 프런티어의 신개척자(New pioneers)가 되라고 요청했다. (I am asking each of you to be new pioneers on that New Frontier. My call is to the young in heart, regardless of age - to the stout in spirit, regardless of party. (John F. Kennedy, Democratic National Convention Nomination Acceptance Address, 1960))
케네디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프런티어를 자신이 추구하는 과학 혁신과 우주 개발의 구호로 자주 사용했다. 1996년 시인이었던 존 팔로우(John Perry Barlow)는 당시 새롭게 태동한 인터넷을 전자적 프런티어(Electronic frontier)라고 비유했다. 새로 나타난 이 가상의 세계를 인종, 경제력, 군사력, 신분에 의한 특권과 편견이 없는 공간이라고 표현한 그의 비유대로 인터넷은 오늘날 인류에게 그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기회의 장을 제공해 주고 있다. (We are creating a world that all may enter without privilege or prejudice accorded by race, economic power, military force, or station of birth. (John Perry Barlow, A Declaration of the Independence of Cyberspace, 1996))
가보지 않은 무궁무진한 세계를 개척한다는 측면에서의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의 긍정적인 면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개인의 소중함, 자기 결정의 원칙, 민주주의와 인권, 구성원 간의 평등 같은 것들이다. 생활의 단순함, 자유로운 의사결정, 새로운 발명과 발견, 경험과 실용, 당당한 용기, 자연주의도 모두 프런티어와 맥이 닿아 있다. 한편 프런티어의 전진과 확장의 이면에는 탐욕과 수탈이라는 부정적 요소도 동시에 존재한다. 물질적 탐욕에 휩싸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의 영토 확장에만 골몰하는 것이다. 이 욕심에는 피해 받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위험이 도사린다. 미국의 확장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많이 드러났다. 자본의 독점, 불평등의 심화, 원주민의 아픔들은 개척의 어두운 단면이었고, 이는 미국 사회의 곳곳에 많은 병폐를 만들어냈다. (게재 21.11월)
터너가 논문에서 규정했던 미국의 프런티어 시대는 개척자들이 미지의 땅을 탐험해 나가던 시기였다. 기차와 자동차 없이 말, 배, 도보만으로 이동하던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몹시 광대했다. 이 때문에 프런티어를 확장하던 사람들은 때로는 큰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개척자들 앞에 놓인 경계의 크기를 실감하기 위해 한 번 가정을 해 보자. 17세기 영국인들은 현재의 워싱턴 DC 남쪽으로 120마일(190km) 떨어진 제임스타운 섬에 대륙 진출 거점을 설치했다. 만약 제임스타운의 정착민이 오늘날의 시카고까지 870마일(1,400km)을 걸어간다면 매일 낮 동안에 쉬지 않고 걸어도 44일이 걸렸을 것이다. 오늘날 보스턴 인근의 뉴잉글랜드 플리머스 식민지의 정착민이 지금의 샌프란시스코까지 직선거리 2,700마일(4,400km)을 걸어서 여행한다면 130일, 말을 타고 하루에 40마일(65km)씩 꾸준히 이동한다 해도 68일이나 걸렸을 것이다. 단, 이것은 어디까지나 직선거리이기 때문에 산과 강을 만나 돌아가다 보면 실제로는 2~3배 더 시간이 소모됐을 것이고, 중간에 만나게 될 사막이나 산맥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지 않았을 때에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럽에서 아메리카까지 이르는 뱃길도 멀기는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아메리카 진출 초기 실패한 식민지였던 로어노크섬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1585년 4월 9일 영국을 출발해서 6월 26일 오늘날의 노스캐롤라이나에 도착했다. 이들은 중간에 폭풍을 만나 푸에르토리코섬에서 며칠 동안 정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을 포함해 총 78일이 걸린 것인데 이는 해상 직선거리 3,700마일(6,000km)을 시속 2.0마일(3.2km)로 이동한 것과 같다. 20여년 후인 1606년 12월 20일 영국을 출발한 제임스타운 정착민들도 중간에 여러 섬을 거쳐서 1607년 4월 10일 버지니아에 도착했다. 무려 111일이 걸린 이 여행의 직선거리 시속은 1.4마일(2.2km) 밖에 안 된다. 1620년 9월 6일 영국 플리머스항을 출발한 메이플라워호는 11월 11일에 뉴잉글랜드 지역에 도착했다. 66일 동안 직선거리 2,000마일(3,200km)을 이동한 이 항해의 속도는 시속 1.3마일(2.0km) 정도였다. 결국 이론적으로 배의 최대 속력은 사람이나 말보다 빨랐지만 당시의 대서양 횡단 배들은 출발지와 목적지의 순수 거리만 단순히 따졌을 때 2~3km/h의 느린 속도로 바다를 이동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바람의 힘을 이용하던 배의 느린 속도는 1807년 최초의 상업용 증기선이었던 노스리버(North River)호와 이를 보완한 클러몬트호(Clermont)가 진수되어 뉴욕과 오대호를 잇는 이리운하를 운행하면서부터 비로소 빨라지기 시작했다.
바닷길이 이처럼 아득하다 보니 대서양을 건너는 사람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가 102명의 청교도, 일반 이주민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널 때 이들이 거주했던 공간은 세로 15m, 가로 7.5m (50ftx25ft)의 갑판 아래 화물 저장칸으로, 면적으로는 115㎡ 밖에 안 되는 곳이었다. 오늘날의 아파트 하나 정도 되는 크기에 무려 100여 명이 각자 자리를 잡고 66일 동안 항해를 한 것이다. 메이플라워에 탄 청교도들은 그 해 9월 6일 영국 플리머스에서 최종 출항하기 전 네덜란드에서 영국까지 이동하는 동안 배에서 이미 한 달 반을 보낸 상태였다. 게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후에는 추위가 극심해 배에서 네 달 반 동안 겨울을 나야했기 때문에 거의 8달을 이 좁은 공간에서 지낸 셈이었다. 짐 둘 곳도 별로 없는 협소한 장소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을 생활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했다. 식사가 충분하지 못했고 신선한 채소도 없어서 모두 영양부족과 괴혈병에 시달렸다. 좁은 선실 안에는 폐렴, 결핵 등 전염병도 돌았다. 결국 1620년 겨울을 보내면서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9명이 죽었고, 1621년 3월 모두 배에서 내려 실질적으로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이사를 마쳤을 때 처음 출발했던 102명 중 남은 사람은 53명에 불과했다.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에 우마차를 끌고 대륙을 횡단하던 사람들의 고초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1846년 오늘날 미주리주 서쪽에서 87명이 출발해 오직 48명만 살아서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던 도너 일행(Donner Party)은 특히 두드러진 시련을 겪었다. 도너 일행은 서부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보다 한달이나 늦은 9월말에야 원래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트레일에 다시 들어섰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 경로에 접어든 다음에도 그들의 괴로움은 끊이질 않았다. 일대 원주민들이 소를 훔쳐가고 쏴 죽이는 바람에 일행 중 일부 사람들은 끌고왔던 우마차와 짐을 버리고 빈손으로 걸어가야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급기야 일행은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길에 놓인 거대한 시에라 사막을 넘으면서 평소보다 일찍 내린 눈에 갇히고 말았다. 굶주림 속에 눈 속에 붙잡힌지 두 달이 되던 1846년 12월, 지친 무리 중 일부 사람들이 산을 빠져나가는 길을 찾아 나섰고, 천신만고 끝에 다음해 1월 수색대에 의해 발견될 수 있었다. 그나마 산에 들어서기 전 우발적인 살인으로 일행에서 추방된 한 명이 혼자 먼저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후 가족을 찾기 위해 수색대를 조직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수색대가 이들을 찾으면서 사람의 시체까지 먹을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서 산에 고립된 실종자들이 있다는 것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언론은 이 충격적인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서부로의 이주행렬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접하고 있던 동부 사람들은 이들의 소식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오늘날까지도 프런티어로 나아가던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를 예시하는 일로 전해지고 있다. (게재 21.11월)
콜롬버스 항해 이전 북아메리카에는 400~1,200만 명, 아메리카 전체에는 5,000만 명~1억 명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메리카로 진출한 유럽들인은 처음에는 이들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주민들에게 원주민들의 도움은 낯선 땅에서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고, 원주민들에게도 이주민들이 가져온 새로운 도구와 물건은 생활에 편리를 더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메이플라워호가 상륙한 플리머스 주변 원주민들은 굶주린 이주민들에게 농사짓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 그들이 살아남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의 뉴욕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은 인근 원주민들에게 맨하탄의 땅을 구입할 때 그들의 눈에 신기한 여러 물건을 건내주었다.
그러나 일부 우호적이었던 관계는 이주민들이 정착에 성공하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깨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유혈 충돌까지 일어나자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원주민들은 더 많은 땅을 원하는 이주민들에 맞서 저항했지만 치명적인 전염병과 무기의 열세로 어느 곳에서나 예외 없이 점차 힘을 잃어갔다. 세력이 약해진 원주민들은 적은 숫자로 흩어지거나 더 먼 곳으로 쫓겨나가야만 했다.
영국인들이 처음 정착한 제임스타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원주민과 이주민은 잠시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다. 제임스타운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이들이 더 많은 땅을 필요로 한 것이 원인이었다. 영국인들은 이주 초기 원주민과 체결한 평화협정의 범위를 넘어서 원주민의 땅을 점차 잠식해 들어갔다. 이런 와중에 양측간 초기 평화 협정에 도움이 되었던 원주민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가 영국을 방문했다가 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 1년 후인 1618년에는 이주민에게 우호적이었던 포카혼타스의 아버지 와훈소나코크(Wahunsunacawh)도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동생인 오페칸카누(Opechancanough)가 포와탄 연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점점 숫자가 늘어나고 여성들까지 이주시켜 이곳에서 가족을 이루기 시작한 백인들을 전부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강경주의자였다. 결국 영국인들이 처음 정착한지 16년째 되는 1622년, 그가 이끄는 포와탄 연맹은 제임스타운의 외곽지역 농장을 기습 공격하여 350여 명의 정착민을 살해했다. 이는 당시 인구의 3명중 1명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 공격은 당시 담배 농사로 성장하고 있던 제임스타운에게 있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영국 내에서는 향후 이 식민지를 계속 운영해야 하는가를 두고 큰 논란이 일었다. 1607년부터 1622년까지 모두 6,000명의 영국인이 제임스타운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중 단 수백 명만 살아남은 것이었다. 논란 끝에 제임스 1세는 버지니아 컴퍼니에 준 특허권을 회수하였고, 이에 따라 제임스타운을 개척한 민간회사는 1624년 해산되었다.
그러나 왕은 아메리카 식민지 자체를 해체하지는 않았고, 제임스타운을 아메리카 대륙의 첫 번째 왕령 식민지로 만들어 확장을 계속했다. 전열을 가다듬은 이주민들은 원주민들을 더욱 압박해 나갔다. 원주민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지만 무기의 열세와 탄약의 부족으로 세력이 점점 약해져 갔다. 1644년에는 원주민들이 또 다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미 힘의 균형은 기울어져 있었다. 이제 고령에 이른 오페칸카누는 붙잡혀서 살해되었고, 이 일대의 원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이는 이후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서 벌어졌던 원주민들 비극의 시발점 같은 것이었다. (게재 21.11월)
미국 독립 후인 1785년, 아직 헌법을 제정하기 전의 미국 연합의회(United States Congress of the Confederation)는 기존 13개 식민지의 경계 역할을 했던 애팔래치아산맥을 넘어 서부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이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토지 측량을 표준화한 토지 조례(Land ordinance)를 만들었다. 독립 이전부터 13개 주들은 애팔래치아산맥부터 미시시피강까지 이르는 넓은 토지 중 자신의 주와 동일 위도 범위에 있는 지역에 대해서 각각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독립 이후 이들은 그 전까지 주장하던 영유권을 연합의회에 양도했고, 이에 따라 의회는 새로운 땅을 분배하는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의회는 1785년 제정된 토지 조례에 따라 서쪽 지역 미개척지의 땅을 네모반듯하게 잘라 우리나라 하남시 면적(93.0㎢)과 비슷한 36제곱마일(93.2㎢)의 타운십(Town ship)이라는 정사각형 단위로 구획했다.
이 타운십은 다시 36개의 동일 섹션들로 나누어졌다. 섹션 하나당 면적은 우리나라 여의도 면적(2.9㎢)과 비슷한 1제곱마일(2.6㎢, 640에이커)의 크기였다. 연방 정부는 이중 4개 섹션을 매각하지 않고 공공용지로 남겼고, 그 외 1개 섹션의 판매 대금을 공립학교 설립 용도로 따로 배정했다. 이주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1섹션을 에이커당 1달러에 매각했다. 땅을 사 이주하고 싶은 사람은 1섹션을 당시 돈 640달러(현재 가치 17,000달러 정도)에 살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준으로 2천만 원 정도에 여의도만한 땅을 소유할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맨손으로 아메리카에 온 이민자들에게는 이마저도 부담스러운 금액이었고, 게다가 부지를 구입한다 해도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아무 기반시설도 없고 거의 황무지와 다를 바 없는 이 땅을 개간하기 위해서는 몇 년 동안 수익도 없이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힘들여 농작물을 생산한다 해도 기차가 없었던 18세기 말에는 이것을 외부에 가져다 팔기가 어려웠다. 이처럼 서부에 정착한다는 것은 실제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주민들은 좀 더 완화된 토지 분배 제도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1800년 의회는 한 사람이 구입하는 최소 단위인 한 섹션의 크기를 320에이커로 줄였고, 에이커당 1.25달러의 대금을 4차례에 걸쳐서 분할 납부 할 수 있게 했다. 이후 50여 년이 지난 1854년에는 30년간 안 팔린 땅의 가격을 원래 가격의 1/10인 에이커당 12.5센트로 인하했고, 퇴역 군인들 및 멀리 오레곤 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추가 토지를 지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넓은 땅에 네모 모양의 타운십을 만들고 이를 다시 바둑판 형태의 섹션 단위로 구획하는 1785년 토지조례는 1800년대 중반까지 60~70년간 새로 개척되는 서부 땅의 모습을 결정했다. 이 법은 토지 소유를 간단하고 명확하게 해서 땅을 원하는 더 많은 사람들과 자본을 서부로 끌어들였다. 또한 균일한 격자형으로 형성된 미국 도시들의 모습과 큰 구역을 차지하고 멀리 뚝뚝 떨어져서 살아가는 미국인들의 주거 문화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이주민들이 땅을 구입해서 어렵게 개간을 마친다 해도 이 땅을 계속 소유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농사가 쉬워진 땅에는 이내 대 자본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자작농들의 땅을 사서 흑인 노예의 노동력을 활용해 농장을 크게 넓혀나가는 것은 당시 대형 농장주들에게 있어 매우 수익성 높은 사업 방식이었다. 19세기 들어 농업 생산량이 점점 늘어나고 1830년대부터 증기선이 대서양을 오고가면서 유럽으로의 수출도 쉬워지자 농장의 대형화 추세는 더욱 빨라졌다. 이들은 넓은 땅에서 면화, 밀, 옥수수 등을 대량 재배해 이익을 극대화했다. 경쟁력을 잃은 소규모 지주들은 결국 애써 일군 땅을 판 후 아직 소유권이 결정되지 않은 다른 토지를 찾아 더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한편 이 시기 땅의 분배 과정을 살펴볼 때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 지역에는 여전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오래 전부터 살아오던 땅에 어느 날 갑자기 재산권이라는 것을 얻어 이주해 오는 사람들에 대항해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뿔뿔이 흩어지거나 보호구역으로 격리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게재 21.11월)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그해 2월 2일 체결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으로 오늘날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콜로라도, 뉴멕시코 일대 52.5만 제곱마일(140만㎢)에 달하는 대규모 땅을 새롭게 획득했다. 또한 이에 앞선 1845년에는 10년 동안 독립 공화국으로 존속했던 텍사스를 정식으로 연방에 포함시켰다. 텍사스의 면적까지 감안하면 미국의 영토는 짧은 기간 안에 75만 제곱마일(190만㎢)이 늘어난 셈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동부에서 중부 대평원까지는 철도가 놓여 접근성이 크게 좋아진 상황이었고, 중부에서 오레곤이나 텍사스까지 향하는 우마차 트레일도 활성화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주자들은 이제 미시시피강 건너편의 더 먼 서부로 진출하는데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서부의 땅을 대농장주가 아니라 자작농(Yeoman)에게 돌려주자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자유토지당(Free Soil Party 1848–52), 신공화당(New Republican Party, 1854~) 등 새로운 정당이 생겨나 토지를 자유민에게 분배하자는 운동을 펼쳤다. 이들 세력들과 토지의 대형화를 원하는 농장주들과의 갈등도 점차 깊어졌다. 자신들의 토지를 원하는 사람들의 강한 열망은 1852년, 1854년, 1859년 세 차례에 걸쳐 하원 의회에서 홈스테드법(Homestead Act)이 통과되게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상원 의회는 이 법안을 부결했다. 1860년에는 가까스로 상원을 통과했지만 이번에는 당시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James Buchanan)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오랜 진통을 겪은 이 법은 남북전쟁이 발발한 1861년의 이듬해인 1862년 북부 주들만이 참여한 연방 의회에서 결국 통과되었다. 링컨 대통령은 1862년 5월 20일 이 법안에 서명했다.
홈스테드법의 내용은 누구든지 소유권 없는 땅에 가서 신고를 하고 5년 동안 그 땅을 경작하면 160에이커(65만㎡)를 무상으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돈을 주고 320에이커를 살 수 있는 기존의 토지법에 비해 분배 면적은 작았지만 ‘누구’나 ‘공짜’로 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이 법의 핵심이었다. 아직 땅 주인이 결정되지 않은 서부 지역에 가서 5년 동안 ‘고생’하면 우리나라 여의도 공원 면적(23만㎡)의 거의 3배에 달하는 땅을 무료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 이주자는 소정의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우선 가로 12ft(3.66m), 세로 14ft(4.27m)가 넘는 크기의 주택을 지어서 5년 동안 실제 거주를 해야 했고, 제3자를 통해 거주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이 법은 당시 미국 시민뿐만 아니라 귀화를 희망하는 이민자들(Intended citizen)에게도 동일한 혜택을 약속했고, 남북전쟁 중 북부군 소속이었던 군인들에게는 복무 기간을 거주 기간으로 산정해 주기도 했다.
이 법에 대한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땅을 얻기 위해 서부로 몰려들었고, 1862년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토지가 분배된 1934년까지 70여 년 간 42만 제곱미터(110만㎢)의 땅이 160만 명의 개척자들에게 분배됐다. 이는 미국 면적의 10%, 우리나라 면적의 10배에 달하는 매우 넓은 땅이었다. 홈스테드법은 누구나 건강한 몸과 강한 정신만 있으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아메리카 드림을 상징하는 법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홈스테드법의 혜택을 노리고 서부로 이주한 사람들의 삶이 결코 꿈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16㎡ 크기 밖에 안 되는 방 하나짜리 좁은 오두막 안에서 온 가족이 살면서 땅을 소유할 때까지 5년을 견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을 지을 땅이 모자란 건 아니었지만 특별한 재료나 기술 없이 자기 힘만으로 건물을 올리려면 집 면적은 이렇게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시시피강 너머 서부의 주인 없는 땅은 대부분 건조하고 황량한 곳이었다. 주변에서 나무를 구할 수 없었던 이주민들은 그냥 흙과 풀을 이겨 집을 지었고, 연료와 물이 부족해서 요리와 난방도 최소화하며 살았다. 대평원의 강풍, 토네이도, 우박, 메뚜기 떼들은 애써 지어놓은 농사를 일순간에 망쳐 놓기 일쑤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법으로 받을 수 있게 돼 있는 160에이커(65만㎡)의 땅도 넓은 게 아니었다. 워낙 농사가 안 되니 이 정도 넓이에서 나오는 수확으로는 생활이 어려웠고, 땅에 풀도 별로 없어 가축을 키우는 것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 법으로 땅을 얻었지만 고군분투하던 많은 가족들은 결국 거주 기간을 못 채우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했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분배 면적을 확대하자는 요구가 늘어났고, 1873년 연방 의회는 식목법(Timber Culture Act)을 제정해서 황무지에 40에이커(16만㎡)의 나무를 심는 사람들에게는 기존 홈스테드 토지에 더해서 추가로 160에이커를 더 공여하기로 결정했다. 이주민들은 기존 면적까지 합쳐 총 320에이커(1.3㎢)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밖에도 토지를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여러 특수한 조건이 덧붙여졌다. 예를 들어 1904년에는 건조한 네브라스카 서쪽 지역에 한해서 640에이커까지 토지를 공여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추가(Kinkaid Act)됐고, 1909년에는 오클라호마, 캔자스 등에는 나무를 심지 않아도 320에이커까지 토지를 무상 공급할 수 있는 법이 제정(Enlarged Homestead Act) 되었다. 이로 인해 그 동안 이주민이 없었던 이들 지역에 사람들이 들어가 새로 밭을 일구기 시작했고, 이로 인한 토양 침식은 1930년대에 극성했던 모래 폭풍(Dust Bowl)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홈스테드법은 1976년 연방 토지 정책 및 관리법(The Federal Land Policy and Management Act)이 통과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이제 서부의 땅을 개인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는 시대는 끝났고, 모든 공유지는 연방 정부가 보존에 더 중점을 두고 관리하게 되었다. 다만 알래스카주에 한해서는 홈스테드가 몇 년 연장되어 1988년 케네스 디아도프(Kenneth Deardorff)가 80에이커(32만㎡)의 토지를 불하받으면서 마지막 홈스테드의 수혜자가 되었다. 이 법에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정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자원, 광물, 목재 등을 차지해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5년간 살고 개간했다는 것을 허위로 증명하기 위해서 주변 증인들을 뇌물로 매수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큰 회사와 대가족이 부당한 카르텔을 맺고 일대 토지를 전부 독점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렇지만 서쪽에 땅이 널려 있고, 누구나 그곳으로 이사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내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프런티어 정신의 일정 부분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정직하게 열심히 일하고 용기와 인내를 가지면 내 몫을 차지할 수 있다는 개척자(Pioneer)의 희망은 미국인들이 지금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되고 있다. (게재 21.11월)
유럽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의 행렬은 17세기부터 본격화되었다. 특히 이 시기 영국에서는 양털로 만드는 울(Wool)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해 농촌 경작지를 수익성 높은 양 목초지로 바꾸는 인클로져 현상(Enclosure movement)이 활발했다. 이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농지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고향에서 밀려나 런던 같은 대도시로 이주해 낯선 도회지 생활을 시작했다. 도시에서도 생활이 여의치 않았던 몇몇 사람들은 과감히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향하는 이주를 감행하기도 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는 세계 곳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들의 원국적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독립 초기인 1800년부터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860년까지는 식민지 시절부터 이민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영국, 아일랜드, 독일, 네덜란드 출신들이 그대로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 60년 동안에만 독립 당시 미국 인구를 훌쩍 뛰어 넘는 5백만 명의 사람들이 미국에 들어와 새 터전을 꾸렸다. 이에 따라 신생국가 미국의 인구는 불과 60년 만에 무려 6배로 증가했다. 이는 연 평균 꾸준히 3% 이상의 인구가 늘어나야 달성할 수 있는 수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당시 경제사정이 열악했던 아일랜드인들의 이민이 활발했다. 아일랜드 출신들은 당시 이민자의 40%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았다. 18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이들은 주로 당시 한창 건설되던 운하, 철도의 공사 현장 등에서 일했다. 1845년부터 1852년까지는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이었던 감자에서 전염병이 발생해 대기근(Great Famine)이 일어났기 때문에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거의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향하는 배를 탔다. 이 때문에 오늘날 미국에서 스스로 아일랜드계 후손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10%인 3천만 명을 넘는다.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벌어졌던 남북전쟁이 끝나자 유럽에서 미국으로 유입되는 이주민의 규모는 더 커졌고, 민족 구성이 한층 다양해졌다. 남북전쟁이 시작할 당시인 1860년 미국에는 모두 3,100만 명이 살고 있었는데, 1865년부터 1915년까지 50년 동안에는 또 다시 2,500만 명의 사람들이 미국으로 들어왔다. 영국, 아일랜드, 독일 등 기존 주류 국가들로부터의 이민자가 꾸준히 도래하는 한편 북유럽, 남유럽, 동유럽 출신의 이민자들도 차례로 증가했다. 먼저 1870년대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15년까지 미국으로 이민을 택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200만 명가량이었고, 주로 미네소타, 위스콘신 같은 오대호 북서쪽의 대평원 지역에 정착해 농업에 종사했다. 1890년대부터는 이탈리아, 그리스 등 남유럽 사람들과 체코, 폴란드, 러시아 등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의 비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이 시기 신규 유입 인구만 놓고 봤을 때 이들 라틴계와 슬라브계의 신이민자들은 앵글로계의 구이민자들 숫자를 훨씬 앞서 나갔다. 19세기 말부터는 중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의 이주도 많아졌다. 19세기 초부터 조금씩 미국으로 이주를 시작한 중국인들의 경우 남북전쟁 이후 수십만 명이 서부 태평양 해안으로 이주해 농장, 금광, 철도 건설 현장 등에서 일했고, 그보다 수는 적었지만 일본인들도 하와이나 캘리포니아 등지에 터전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1902년 첫 번째 이주민들의 하와이 정착과 함께 미국으로의 이민을 시작했다.
이 당시 미국으로 와 새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세계 각국 이민자들의 마음의 준비가 아무리 단단했다 해도 이들이 낯선 환경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은 고단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19세기 말 뉴욕, 시카고 등 대도시의 경우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 비율이 80%를 훌쩍 넘어섰는데 이들 대부분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지 못한 채 어렵게 생활해야 했다. 게다가 이 무렵 도시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각종 문제들이 만연했다. 악취와 전염병을 야기하는 비위생적인 상하수도 시설, 수십 명이 좁은 공간에서 뒤얽혀 사는 열악한 주택, 수많은 안전사고가 발생하는 혼잡한 거리, 불결하고 위험한 뒷골목 등 당시의 도시는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당면해야 했다. (게재 21.11월)
점점 많은 사람들이 미국에 이주해 오려 하자 각종 문제들도 불거졌다. 기존 주민들과 신규 이민자들 간의 불화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민에 대한 각종 규제도 생겨났다.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먼저 도착한 사람과 나중에 도착한 사람 간의 갈등이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미국 독립 때부터 19세기 말까지 100여 년 간 사실상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미국에 와서 살 수 있었지만, 1892년 뉴욕 맨하탄섬 앞 엘리스섬(Ellis Island)에 입국 심사 사무소가 생겨 당시 15세 소녀였던 애니 무어(Annie Moore)가 최초의 심사 대상자가 된 것을 시작으로 점차 여러 가지 제한이 생겨났다. 심사소가 옮겨간 1954년까지 60여 년 동안 엘리스섬에서는 총 1,200만 명의 사람들이 혹시 미국에 들어오기에 부적합한 요소가 없는지 검사를 받아야 했다.
20세기 초부터 미국 의회는 국가별 이민자의 수도 규제하기 시작했다. 1921년 미국에 이민 올 수 있는 민족별 숫자를 규정하는 긴급이민 할당법(Emergency Quota Act)을 제정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 법은 1910년의 민족별 인구를 기준으로 잡고 각각의 3%에 해당하는 수를 한 해에 입국할 수 있는 이민자의 최대치로 정했다. 이를 통해 기존 인구가 많았던 서유럽 국가들의 이민자 숫자는 계속 높은 수준에서 유지됐고, 남동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신이민자의 유입은 크게 제한되었다. 1924년 존슨-리드 법(Johnson–Reed Act 또는 National Origins Act)은 이런 의도를 더욱 강화한 것이었다. 이 법에서는 민족별 할당량을 계산하는 시점을 남동부 유럽인들이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오기 전인 1890년으로 잡았고, 최대치를 계산하는 비율도 2%로 낮추었다. 이들 법의 제정 이후에도 비자, 영주권, 시민권과 관련된 미국의 이민 규제는 계속 추가돼서 오늘날에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복잡해졌다. 2차 대전 후에는 세계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에서 살기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이민뿐 아니라 단지 미국에 일정 기간 합법적으로 체류하면서 일할 수 있는 자격을 심사하는 장치도 더 강화되었다.
1920년대부터 이어오던 미국 이민 제도의 큰 골격은 1965년 제정된 이민과 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Hart–Celler Act)으로 다시 한 번 크게 변화했다. 당시 미국은 1963년 마틴 루터 킹의 워싱턴 DC 대행진으로 대표되는 인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의 열풍 속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은 인간을 인종과 피부색에 의해서 평가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자질에 의해서 평가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 마틴 루터 킹 연설)
이와 같은 생각은 이민자를 대하는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1924년부터 적용해 오던 영주권의 민족별 할당제는 폐지되었고, 대신 가족 초청 영주권과 이민자의 기술에 근거한 취업기반 영주권이 생겨났다. 이러한 제도 변화는 그전까지 이민이 어려웠던 소수 민족들에 대한 문호를 개방한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1970-8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선택한 우리나라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는 데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미국에 발을 디딘 우리 교민들은 다른 국가 출신들보다 한참 늦게 미국 땅에 도착한 이민자들이었지만 특유의 끈기와 근면함으로 빠른 시간 안에 새로운 환경에 안착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이민과 관련한 논쟁은 오늘날에도 미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논쟁 주제이다. 자국민들의 일자리 보호, 불법 체류자 관리, 국경 검문, 각종 비자 및 영주권 심사 절차 등 논쟁은 여러 사회 문제와 연관된 뜨거운 감자이다. 이주를 둘러싼 이와 같은 갈등을 어떻게 논의하고 해결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걸어갈 길의 방향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게재 21.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