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라는 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풍경은 언덕과 안개이다. 동·서·북쪽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지형으로서 폭 7마일(11km), 면적 46.9제곱마일(121㎢)밖에 안 되는 좁은 샌프란시스코시 안에는 무려 50여 개의 크고 작은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은 북극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태평양 해류 때문에 수시로 안개에 뒤덮인다. 이런 언덕과 안개가 워낙 인상적이기 때문에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비탈길에 줄지어 늘어선 색색의 집들, 하얀 안개 속에 드러난 오렌지 색 금문교(Golden Gate Bridge) 등은 이 도시를 대표하는 유명한 풍경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동쪽에 거대하면서도 은밀한 만을 끼고 있는 천혜의 항구도시이다. 태평양에서 접근해 폭 1.5km 정도 육지가 벌어진 좁은 해협(Golden Gate)을 지나면 남북 길이 100km, 동서 폭 20km에 이르는 넓은 샌프란시스코만이 드러난다. 물살이 잔잔하고 비교적 수심이 깊은 이 만은 골드러시 때부터 금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향했던 배들의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만의 해안가를 따라서는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오클랜드, 버클리 등의 도시가 들어섰고, 강을 거슬러 멀리 새크라멘토까지 이르는 수운 교통로도 일찌감치 발달했다.
이미 1500년대부터 캘리포니아를 탐험하기 시작했던 유럽인들은 1769년까지 이 만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1542년 카브리요(Cabrillo), 1579년 드레이크(Drake)가 배를 타고 이 옆을 지났지만 엄청나게 큰 만을 품은 육지의 좁은 입구(골든게이트 해협)가 있다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1602년 필리핀 마닐라와 멕시코 아카풀코를 오가는 갤리온선이 중간에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찾는 임무를 받고 탐험에 나선 비즈카이노(Vizcaíno)도 정작 가장 좋은 기착지가 될 수 있는 이곳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1769년 11월 2일 포톨라(Portola)의 탐험대는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곳에 발을 디뎠다. 당시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러시아와 영국의 움직임에 대응해 멕시코 북서부인 캘리포니아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려고 했다. 스페인의 군인이었던 포톨라는 캘리포니아의 첫 번째 총독으로 임명된 후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해 육로를 따라 몬터레이로 북상했다. 그의 탐험대는 170여 년 전 비즈카이노가 다소 과장되게 묘사한 몬터레이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전진을 계속하다가 바다 쪽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던 샌프란시스코만과 골든게이트의 존재를 확인했다.
포톨라의 탐험 이후 스페인은 샌디에고에서 시작해 샌프란시스코 북쪽 소노마까지 이르는 21개의 수도원 네트워크와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주요 거점을 확보해 갔다. 거의 북쪽 끝 부분에 있던 샌프란시스코만에는 포톨라 탐험으로부터 7년이 지난 다음에야 군사기지, 수도원, 주민 정착지가 만들어졌다. 1776년 후안 바티스타 안자(Juan Bautista de Anza)는 캘리포니아에 거주할 가족들을 포함해 193명의 군인, 주민 등을 인솔해 샌프란스시코에 도착했다. 그는 먼저 오늘날의 금문교 남쪽 언덕에 군사기지 프레지디오(Presidio of San Francisco)를 만들었다. 이곳은 샌프란시스코만의 입구를 지키는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에 스페인은 영국, 러시아와 아메리카 서부 해안을 두고 경쟁하던 50여 년 간 200~400명 정도의 군인을 배치해 이 일대를 방어했다. 스페인은 좋은 약초가 자란다는 뜻으로 이 지역을 예르바 부에나(Yerba Buena, 영어로 Good Herb)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1847년까지 70여 년 간 이곳의 공식적인 이름으로 쓰였다.
프레지디오를 설치한 안자는 몇 킬로미터 떨어진 동쪽 해안가 언덕에 수도원을 건립하는 것도 지원했다. 이 수도원은 처음에는 미션 샌프란시스코(Mission San Francisco de Asís)로 명명되었다가 안자의 건의에 따라 미션 돌로레스(Mission Dolores)로 이름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가 인솔한 주민들 중 14명은 1년 후인 1777년 조금 남쪽의 오늘날 산호세 지역으로 이동해 캘리포니아 최초의 주민 정착지(Pueblo)를 만들었다. 그들은 오늘날 실리콘밸리가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의 비옥한 농토에서 옥수수와 과일을 생산해 인근 프레지디오의 군인들과 수도원의 수도사들에게 공급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다.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가 캘리포니아를 지배하면서 예르바부에나에에도 멕시코 군대가 주둔하기 시작했다. 1841년에는 영국이 멕시코로부터 예르바부에나를 상업적, 군사적 목적으로 구입하려고 했지만 멕시코 정부의 반대로 최종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1840년대부터는 육지에 개척된 캘리포니아 트레일을 따라 동쪽의 미국인들도 이 일대로 이주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100마일(160km) 떨어진 오늘날의 새크라멘토 서터 기지(Sutter’s fort)가 미국 이주민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이주민들 중 일부는 샌프란시스코까지 들어와서 정착지를 마련했다.
1846년에 멕시코와 전쟁을 시작한 미국은 그해 7월 9일 발 빠르게 이곳을 점령했다. 1847년 미국의 치안판사로 임명된 워싱턴 바틀렛(Washington A. Bartlett)은 예르바부에나의 이름을 샌프란시스코로 변경해 공표했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 1848년 2월 2일 샌프란시스코는 인구 800여 명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천혜의 항구이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군사적인 목적을 제외하고는 외부 선박의 왕래는 드물었다. 이곳에는 교역할 물건도 마땅치 않았고, 언덕 지형과 좁은 농지 때문에 큰 도시를 만들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해 1월 서터 기지 상류 아메리카강가에서 발견된 금은 이 변방 항구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스위스 이민자 출신으로서 1839년부터 서터 기지의 터전을 닦은 존 서터(John Sutter)는 자신이 만들던 제재소 근처에서 금이 발견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비밀로 하려 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샌프란시스코까지 퍼져 나갔다. 일확천금의 기대에 들떠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메리카강 상류로 향했고, 샌프란시스코는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다. 심지어 배의 선원들도 금을 쫓는 대열에 동참하는 바람에 항구에는 그들이 버리고 떠난 배들이 그냥 방치된 채 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금이 있는 땅을 처음 개척했고 멕시코 정부로부터 4.8만 에이커(192㎢)의 넓은 땅까지 받았던 서터는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많은 돈을 투자한 제재소를 완성하지도 못했고 이후 사업에도 계속 실패하면서 1880년 무일푼으로 쓸쓸하게 죽는 불운을 겪었다.
금이 발견된 지 1년여가 흐른 1848년 12월, 포크(Polk) 대통령이 캘리포니아에 금이 매장돼 있다는 사실을 의회 연설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자 일확천금을 쫓는 사람들의 이주 물결은 더욱 거세졌다. 미국 동부는 물론이고 유럽, 아시아 등 전 세계의 야심가들이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몰려들었다. 재빨리 소문을 쫓아 움직인 사람들은 지표면에 널린 금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캐낸 금은 배에 실려 아메리카강, 새크라멘토강을 따라 내려와 샌프란시스코의 은행에서 종이 지폐로 교환된 후 다시 배에 올려져 동부의 은행으로 운송됐다. 갑자기 사람, 금, 돈이 흘러넘치면서 샌프란시스코는 순식간에 북적이기 시작했다. 부둣가에는 금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품을 공급하는 상점을 비롯해 은행, 호텔, 살롱 등의 건물이 속속 들어섰다. 금 발견을 소리친 브라난 같은 사람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판매해 벼락부자가 되었다. 800명이던 도시 인구는 1년 만인 1849년 말에 25,000명을 넘어섰다. 당시 LA의 인구가 1,600명, 샌디에고의 인구가 500명, 캘리포니아 전체 인구가 92,000명에 지나지 않을 때였기 때문에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었던 샌프란시스코는 순식간에 캘리포니아의 중심 도시로 부상했다. 금광 붐이 사그라들던 1859년에는 시에라네바다산맥 동쪽 오늘날의 네바다 지역에서 은광까지 발견되면서(Comstock lode silver) 도시는 계속 팽창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인구는 1860년 조사에서 56,000명을 기록해 10년 전에 비해 다시 또 2배가 늘어났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도시 곳곳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돈을 쫓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크고 작은 범죄, 폭력, 도박, 매춘이 횡행했다. 도시 위생 관리도 부실해 1855년에는 콜레라가 전역을 휩쓸었다. 체계적인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시가지가 조성됐기 때문에 도심의 길과 주택 상황도 매우 열악했다.
하지만 당시 도시 성장의 속도는 그런 문제점들을 덮어 버릴 정도로 빨랐다. 1869년 완공된 대륙횡단철도의 종점이 동쪽 새크라멘토가 되자 그곳에서 바로 배로 오갈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사람과 돈이 유입되는 속도는 더 증가했다. 187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 샌프란시스코는 스스로 서부의 파리라 부르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항구를 내려다보는 놉힐(Nob hill)을 중심으로는 광산, 철도, 금융, 상업으로 큰돈을 번 부유층들의 저택과 화려한 호텔이 들어섰고, 밝은 색으로 칠한 빅토리아풍의 고급 주택이 도시 곳곳을 채웠다. 독특한 발명품들도 이 시기 도시에 활력을 더해줬다. 1873년 앤드류 할리디(Andrew Smith Hallidie)는 바닥에 강선을 깔아 가파른 경사도 올라갈 수 있는 케이블카를 만들었고, 그 덕분에 그 동안 비어있던 언덕 위쪽까지 주택과 상점이 빼곡하게 자리를 잡았다. 1873년에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레비 스트라우스(Levi Strauss)가 고객이었던 제이콥 데이비스(Jacob Davis)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주머니에 구리 핀이 박힌 청바지의 특허를 내고 대량 생산을 시작했다. 도시의 지도층들은 1857년 만들어진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본 따 1871년부터 도시 서북쪽 외곽에 골든게이트파크를 조성하기 시작해 당시 서부 최고 도시로서의 자부심을 한껏 과시했다. 샌프란시스코는 1890년에 인구 30만 명을 돌파해 미국에서 8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40년 전 사람도 얼마 살지 않았던 작은 마을이 전국적인 도시로 발전한 엄청난 속도의 성장이었다.
골드러시로부터 60여 년 동안 빠른 속도로 눈부시게 발전한 샌프란시스코는 1906년 대지진으로 한순간에 폐허가 되었다. 도시를 만들 당시에는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서쪽 해저에는 샌안드레아스 단층(San Andreas)이 놓여 있었다. 남북 길이가 한반도보다 긴 700마일(1,100km)에 달하는 이 단층은 지금도 일 년에 5cm(2in) 씩 이동하고 있는 활성 단층이다. 이렇게 거대한 단층을 움직이는 커다란 힘이 어느 지점에서 응축되다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한 순간 강력한 에너지가 분출된다. 1906년 4월 18일 오전 5시, 45초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뒤흔든 대지진은 원자폭탄 30개와 맞먹는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순식간에 건물이 무너졌고, 항구 근처 매립지에서는 액상화가 발생해 땅이 꺼졌다. 당시 도시 발전의 자랑스러운 상징이었던 촘촘한 전기선과 가스관로에서 발생한 화재는 삽시간에 목재 건물로 옮겨 붙었다. 설상가상으로 도시 내에 불을 끌 수 있는 물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프레지디오에 주둔해 있던 육군의 포병부대는 간신히 지진을 견뎌낸 집들을 다이나마이트로 폭파해 가면서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막았다. 이 방법으로도 이틀 동안 불길이 잡히지 않자 20일 아침에는 도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로인 반네스길(Van Ness Avenue)을 저지선으로 삼아 주변 건물을 모두 파괴하는 과감한 작전을 펴야할 정도였다. 큰 희생을 치른 끝에 그 날 오후 불길은 잡혔지만 샌프란시스코가 입은 피해는 참담한 것이었다. 서부의 상업 중심지로서 기능을 잃기를 두려워했던 당시 시 당국이 공식 사망자를 498명으로 축소 발표했지만 실제 사망자는 6,000여 명에 달했고 부상자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다. 화려했던 도시의 3/4이 문자 그대로 완전히 파괴됐고, 주민 40만 명 중 20만 명이 집을 잃고 거리에서 생활해야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이 지진을 통해 그간 항구 주변 바다를 우후죽순으로 매립하고 소방용수 등 재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대가를 크게 치렀지만 피해를 빠르게 복구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불에 탄 도심지에는 건물이 다시 들어섰고, 놉힐의 부유층 저택 자리에는 큰 호텔들이 만들어졌다. 동쪽의 항구 부근도 핵심 상업지구로서 다시 안정을 찾아갔다.
한편 화재의 피해를 입지 않은 북서쪽 지역(Richmond district)은 신주거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지진 복구 기간 중 골든게이트 파크에서 천막을 치고 생활했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집기를 이용해서 이곳에 새 보금자리를 차렸다. 북서쪽과 기존 도심 사이에는 큰 언덕이 없어 전차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은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교외지역으로서 인기를 끌었다. 당시 주민들이 막 장만하기 시작했던 자동차를 주차할 공간이 도심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넓다는 점도 이 지역이 각광받는 이유 중 하나였다. 부동산 개발기업들은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부지를 크게 잘라 길에 면한 모서리 쪽으로 문과 창문들을 내고, 안쪽으로는 집집마다 개별적인 정원을 제공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주택을 만들어 분양했다.
지진 이후 샌프란시스코시는 앞으로 혹시 있을지 모르는 화재를 대비해 물을 확보하는 데에 큰 공을 들였다. 1912년 시는 토목기술자 마이클 오쇼네시(Michael O’Shaughnessy)를 고용해 도시 중앙의 트윈픽스(Twin Peaks)산에 댐, 저수지, 상수도, 하수도 시스템을 구축했고, 산을 관통하는 트윈픽스 터널을 건설했다. 터널 덕분에 동쪽 도심지로 출퇴근이 가능해지자 산 서쪽 지역(Sunset district)에도 주택들이 대규모로 들어찼다. 오쇼네시는 192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쪽으로 150마일(250km) 떨어진 요세미티 국립공원 내 헤츠헤치 계곡(Hetch Hetchy Valley)에 댐을 만드는 데에도 기여했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 이 댐은 이후 시의 안정적인 식수원을 확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청정 지역에 세워진 오쇼네시 댐은 당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건설을 승인한 1913년 즈음부터 오늘날까지 자연 파괴에 관한 큰 논란을 불러오고 있다. 2007년 연방 정부는 7백만 달러의 자금을 투입해 샌프란시스코가 이 댐 대신에 이용할 수 있는 대체 수자원을 연구하기도 했다. 2012년에는 샌프란시스코시가 자체적으로 연구 예산 8백만 달러를 편성할지 여부를 주민투표(Proposition F)에 부쳤다. 이 투표에서 주민들은 77%의 높은 반대율로 연구 예산 편성조차 부결해 댐의 물을 그대로 쓰기를 원하는 뜻을 표명했다.
한편, 안정적인 수자원을 확보한 샌프란시스코는 1915년에는 파나마 운하 개통을 기념한 세계 박람회(Panama-Pacific International Exposition)를 유치해 지진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그간의 성과를 과시했다. 1930년대에는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대형 교량을 완공하면서 샌프란시스코만 일대 도시들을 잇는 광역교통망을 구축했다. 1936년 완공된 오클랜드베이 브리지(San Francisco-Oakland Bay bridge), 1937년 완성된 금문교(Golden Gate Bridge)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현수교로서 유명세를 탔다. 1940년대 2차 대전 중에는 미 해군의 태평양 함대가 도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동쪽의 군함 건조장(Hunters Point Naval Shipyard)에서는 끊임없이 배들이 만들어졌고, 북쪽의 해군기지(Fort Mason)에서는 군함들이 태평양으로 속속 출항했다. 조선업 호황과 전장으로 떠나기 전 미국 땅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는 병사들로 인해 당시 샌프란시스코 도심은 밤이 늦도록 북적였다.
전쟁이 끝난 후 샌프란시스코는 새로운 변화에 직면해야 했다. 만 동쪽 편에 새로 개발된 오클랜드항이 해상 화물 운송 수요를 많이 가져갔고, 해군의 주요 기능도 샌디에고로 대거 이전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도시의 산업은 조금씩 쇠퇴했고 인구도 감소세로 돌아섰다. 이런 가운데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에는 새롭게 히피(Hippie) 문화가 등장했다. 꽃의 힘(Flower power movement)과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로 대표되는 문화적 흐름으로 샌프란시스코는 반전과 평화를 상징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1964년 UC버클리 대학에서는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자유 발언 운동(Free Speech Movement)이 호응을 얻었고, 1967년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 행사에는 전 세계에서 10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시 유행했던 마마스앤 파파스의 San Francisco 노래는 ‘샌프란시스코에 오려거든 머리에 꽃을 꽂고 오세요’라는 은유적 가사로 평화를 소망하는 도시의 분위기를 표현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다음에도 변화를 열망하는 도시의 문화는 지속되어서 1970년대의 샌프란시스코는 성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인권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LGBT(Lesbian, Gay, Bisexual, Transgender)와 무지개 색깔의 깃발로 표현되는 이 운동은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샌프란시스코의 문화를 대변했다.
1990년대 샌프란시스코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금맥을 발견했다. 닷컴 붐(Dot-com boom)이 터지자 1848년의 골드러시 때처럼 많은 사람들이 꿈을 안고 샌프란시스코와 주변 도시로 몰려들었다. 산업 기능을 잃었던 샌프란시스코 도심은 다시금 활기를 찾았고, 인구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닷컴 붐은 2000년대 초반 꺼졌지만 곧 소셜미디어 붐이 이어졌다. 누구든 미디어 콘텐츠를 생산하고 공유할 수 있는 혁명적인 소통 방식은 라디오, TV로 이어지던 기존의 대중 매체 환경을 변화시키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한편 제조와 물류 기능이 쇠퇴하던 1950년대부터 샌프란시스코는 관광업을 중요 산업으로 육성했다. 그 덕분에 샌프란시스코는 300여 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포함해 한해 수천만 명이 방문해서 100억 달러에 달하는 소비를 하는 거대 관광도시가 되었다. 오늘날 관광업은 샌프란시스코의 최대 산업으로서 가장 많은 고용을 창출하고 있다. 여름철 온도가 낮고 겨울철에도 그렇게 춥지 않은 온화한 기후는 관광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도시 개발에는 불리했던 많은 언덕들도 관광 산업에는 유리한 요소였다. 비탈길로 인해 자연스럽게 필지가 작아지고 건물들이 서로 붙어버리기 때문에 미국에서 보기 드물게 차를 타지 않고 걸으며 도시를 구경할 수 있다는 점도 샌프란시스코의 매력이 되었다. 좁은 거리 건물들 곳곳에 오밀조밀 자리 잡은 소규모 레스토랑과 상점들은 저마다 독특한 개성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의 발전에 밝은 면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집값과 임대료가 오르면서 심화된 주거 문제는 지속가능한 도시 성장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개발할 땅이 좁은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일대에서 주택 가격 상승은 주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해치는 심각한 위협이다. 몇 십 년에 걸쳐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 모두 개발되었고 이제 주거지로서 쓸 땅은 더 이상 남아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지진, 교통, 환경 문제 등으로 고층 아파트를 건설하는 것도 여의치 않기 때문에 주택 부족 현상은 만성적인 사회 문제가 되었다.
1990년대 닷컴 붐은 이러한 현상을 유발한 초기 원인이 되었다. 세계적인 기업들이 사람들과 돈을 몰고 오면서 주택 가격을 지속적으로 높였지만 샌프란시스코는 이를 보완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살고 있던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고, 도시 전역에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홈리스(Homeless) 문제가 심각해졌다. 오늘날에도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내에서 홈리스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로 꼽힌다. 집이 없이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무려 수 만 명에 이를 정도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샌프란시스코를 넘어서서 로스앤젤레스와 샌디에고 등 캘리포니아의 다른 대도시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 엄청난 사회 혼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주민들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적정 가격의 양질의 주택을 확보하고, 거리의 홈리스들이 자립 의지를 갖고 일어서게 도와주어야 하는 미묘하고 어려운 과제는 오늘날 이들 도시들이 맞이한 중요한 도전이다. (게재 21.11월)
주변으로 60만 명 정도의 우리나라 교민들이 살고 있는 LA는 우리에게 특히 친숙한 미국 도시 중 하나이다. 1903년부터 도산 안창호 선생님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한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고, 1960년대부터는 더 많은 교민들이 LA에 삶의 터전을 꾸렸다. 우리나라 이민자들은 1970년대에 코리아타운을 만들었고, 1980년 LA 시의회는 코리아타운 구획안(Koreatown specific plan)을 의결해 이를 공식화했다. 2018년 시의회는 이 안이 통과된 12월 8일을 코리아타운의 날(Koreatown day)로 선포하면서 우리나라 이민자들과의 우호를 더욱 강화했다.
LA 메트로폴리탄은 고도 3,000m(10,000ft) 이상의 높은 산들(San Antonio, San Gorgonio, San Jacinto 등)로 둘러싸인 면적 4,500㎢(1700mi2, 서울의 7배가량) 정도의 거대한 분지이다. LA시 인구 400만 명을 비롯해 모두 1,300만 명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 이 분지를 포함해 우리가 남가주(Southern California)라고 부르는 남부 캘리포니아 전체는 무려 2,400만 명이 살고 있는 미국 최대의 인구 밀집 지역이기도 하다. 기후가 온화하고 개발할 수 있는 평지가 넓었기 때문에 철도가 연결된 187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이주해서 오늘날의 대규모 도시 권역을 형성했다.
LA는 태평양 해상 무역의 주요 요충지이고, 영화, 음악, TV 등 세계 엔터테인먼트의 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각종 테마파크와 긴 해변 등을 활용한 다채로운 관광업도 발전했고, IT, 헬스케어 등 첨단 산업도 번성하고 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길게 뻗은 야자수와 큰 파도를 가르는 서핑(Surfing)의 이미지는 할리우드 영화와 대중음악을 통해서 세계인들의 인식에 깊이 각인돼 있다.
1542년 카브리요(Joan Rodriguez Cabrillo)는 캘리포니아 연안을 탐험하던 중 이곳을 둘러싼 연기를 관찰해 LA 분지의 존재를 처음 기록으로 남겼다. 스페인은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이곳에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1769년 포톨라의 탐험 이후 수도원과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포톨라는 몬터레이를 찾아 북상하던 중 8월 2일 오늘날의 로스앤젤레스 강 근처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일행은 도착한 날의 프란시스코회 축일 이름을 따서 이곳을 ‘포르치운쿨라 강 천사들의 여왕이신 성모마리아의 마을’(The Town of Our Lady the Queen of the Angels on the River Porciuncula) 이라고 불렀는데, 이중 천사들(스페인어로 Los Angeles) 이라는 단어가 LA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포톨라의 탐험 이후 2년이 지난 1771년, 이미 샌디에고부터 북쪽으로 3개의 수도원을 건립한 세라 신부는 이곳에 4번째 수도원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이에 따라 9월 8일 로스앤젤레스강 인근에 천사장 가브리엘의 이름을 딴 수도원(Mission San Gabriel Arcángel)이 만들어졌다. 몇 년이 지나 오늘날의 파사데나(Pasadena)시 남쪽으로 이전한 이 수도원은 지금까지 그 모습이 남아 있다.
가브리엘 수도원이 건립되고 10년이 흐른 후에는 일반 주민 정착지인 푸에블로(Pueblo)도 만들어졌다. 1781년 9월 4일 모두 11가족으로 구성된 44명(남자 11명, 여자 11명, 아이 22명)은 수도원 인근에 자리를 잡고 마을을 조성했다. 북쪽 산호세에 첫 번째 주민 정착지가 생긴 지 4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당시 가브리엘 수도원과 로스앤젤레스 푸에블로의 주요 소득원은 농업이었다. 1800년대 초반에는 가브리엘 수도원에서 캘리포니아에서는 처음으로 오렌지와 포도 재배가 시작됐다. 기후가 좋고 비교적 큰 강이 흐르는 이곳은 곧 21개 전체 수도원 네트워크에서도 가장 중요한 농업 생산지가 되었다. 그러나 외부와의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당시 농작물을 대량으로 재배해 판매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던 때에 LA는 인구 650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었다.
캘리포니아를 관할하게 된 멕시코는 1833년 수도원들의 자산을 민간에 이양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가브리엘 수도원이 소유한 넓은 토지는 멕시코 주민들과 전직 관리들 등에게 분할되었다. 1848년까지 총 800개의 토지가 공여되었고 이에 따라 엄청나게 큰 면적의 땅을 소유한 지주들도 등장했다. LA 일대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진 사람 중 한 명이었던 세펄베다(Francisco Sepulveda)가 소유한 땅은 서울 면적의 20%가 넘는 33,000에이커(132㎢)에 달했고, 오늘날 오렌지카운티 쪽 대지주였던 포스터(Juan Foster)가 멕시코 지배 후기에 가졌던 땅은 서울보다도 넓은 200,000에이커(800㎢)에 이르렀다. 이들이 소유한 광대한 면적의 땅은 대부분 목장(Ranch)으로 쓰였다. 목장주들은 소를 방목하다가 필요할 때 잡아 가죽, 수지 등을 얻어 외부에 내다 파는 방식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 미국 동부의 상인들은 배로 남아메리카를 돌아 서부 해안을 왕래하면서 이들의 물건을 구입하고 호화로운 소비재들을 지주들에게 판매했다. 부유한 지주들의 수요가 뒷받침 되면서 수도원 시절부터 재배했던 와인 산업도 크게 호황을 누렸다. 1845년에는 LA에서 태어나 식민지 총독이 된 피오 피코(Pio Pico)가 수도를 몬터레이에서 LA로 옮기면서 이 일대가 잠시 캘리포니아 행정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848년 2월 2일 과달로페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으로 공식적으로 캘리포니아가 미국에 양도되자 주로 북부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던 미국인 이주자들은 남쪽으로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홈스테드 권리를 주장하면서 자신들 몫의 땅을 요구했다. 멕시코 정부로부터 많은 땅을 받은 목장주들은 이들과의 오랜 소송 끝에 조금씩 땅을 잃어버리거나 소송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땅을 매각해야만 했다. 한편 이 시기 많은 이주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면서 LA는 폭력과 범죄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다. 1848년부터 1870년까지 LA의 살인율은 인구 10만 명당 158명에 달할 정도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기준과 비교했을 때는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뉴욕 등 다른 도시에 비해 10~20배나 높은 수치였다.
LA가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서부의 다른 지역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철도가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대륙횡단철도가 놓인 1869년, LA 내부에서도 첫 번째 철도가 등장했다. LA에서 샌페드로(San Pedro) 항만까지 놓여진 21마일(34km)의 철도가 그것이었다. LA 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배닝(Phineas Banning)은 철도를 이용해 샌페드로 항만을 활발하게 개발했고, 이후 이곳이 미국 서해안 최대의 수출입항으로 성장하는 초석을 닦았다.
첫 철도가 건설되고부터 7년이 지난 1876년에는 LA에도 드디어 대륙횡단철도가 당도했다. 당시 캘리포니아 철도 산업을 지배했던 서던퍼시픽 철도(Southern Pacific Railroad)가 샌프란시스코와 LA를 이으면서 동부의 사람들이 캘리포니아 북부를 거쳐 LA까지도 기차를 타고 도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철도 덕분에 개발 붐이 일어 1870년 5,000명이던 LA시의 인구는 1880년에 50,00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1881년 멀리 뉴멕시코주의 산타페 철도(Santa Fe Railroad)까지 연결되자 LA는 명실상부한 남서부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1887년에는 독자 노선을 건설한 산타페 철도와 기존 서던퍼시픽 철도의 운임 경쟁이 벌어지면서 시카고에서 LA까지 편도 요금이 단돈 1달러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운송비까지 싸지니 LA의 부동산 붐은 더 큰 날개를 달았다. 철도역이 있던 LA시내에서 10마일(16km) 정도 서쪽으로 떨어진 할리우드에 신흥 주거지가 개발된 것도 이 즈음이었다. 1900년에 시의 인구는 10만 명을 돌파해 당시 40만 명이 거주하던 샌프란시스코에 이어 캘리포니아 제2의 도시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철도와 함께 LA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다른 이유는 바로 유전의 발견이었다. 1892년 오늘날의 프로야구 다저스 스타디움 근처에서 석유가 처음 시추된 것을 시작으로 1900년에는 서쪽 베버리힐스 인근을 비롯해 시내 곳곳에서 석유가 채취됐다. 캘리포니아의 석유는 1923년까지 전 세계 공급량의 25%를 차지했는데 LA는 그 중 절반 정도의 생산을 감당했다. 이 지역의 석유 생산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 가동 중인 유전만도 700여 개에 이른다.
한편 철도와 유전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도시의 물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 LA시는 1913년 233마일(370km) 떨어진 북쪽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를 만들어 이 문제를 극복했다. 물 문제가 해결되자 LA는 더욱 빠르게 커지기 시작했다. 1914년 발발한 1차 대전과 이후 1920년대의 경제 호황은 특히 영화산업의 성장을 촉진했다. 당시 LA는 세계 영화의 80%를 생산하면서 1930년대 대공황의 위력도 이겨내고 계속 도시의 규모를 불려갔다. 1914년 개통된 파나마 운하도 LA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운하의 완공으로 태평양의 물동량이 늘어나면서 샌페드로에 위치한 LA 항만이 크게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와 교역하는 많은 물건들이 LA에서 철도를 통해 미국 내륙으로 들어갔고, LA항은 곧 샌프란시스코를 능가하는 항구로 발전했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자 LA시는 횡 방향으로 계속 팽창했다. 인근의 소규모 시들을 합병해 시의 자체 면적은 469제곱마일(1,210㎢)까지 커졌고, LA 주변으로도 신규 도시들이 계속 생겨났다. 1908년부터는 자동차가 대량생산되고 가격도 저렴해지면서 LA 도심에 살던 사람들이 속속 교외로 이주했기 때문에 도시가 확장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교외로 나간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마을을 만들기도 했다. 백인 주민들 간에 협약(Covenants)을 맺고 아시아인과 흑인들과 같은 소수 인종에게는 주택을 팔지 않았던 이 같은 행동은 1955년 연방법, 1963년 캘리포니아법으로 제지될 때까지 여러 곳에서 암암리에 벌어졌다.
LA는 교외 확장과 자동차를 가장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도시 중 하나였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LA의 전차는 다른 곳들에서처럼 도시 교통의 주축을 담당했다. 1898년, 1900년 설립된 두 개의 전차회사(Los Angeles Railway, Pacific Electric Railway)는 도심 및 외곽의 여러 노선을 운영하며 당시 세계 최대의 전차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LA 전차의 운송능력은 연일 늘어나는 인구를 따라가지 못했기에 전차 안은 항상 혼잡했고 서비스도 열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편안하게 내가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는 자가용의 등장은 시민들에게 있어 획기적인 교통 혁명이었다. LA 분지는 샌프란시스코와 달리 평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길을 내기도 좋았고, 당시 기준으로는 도시 주변으로 개발할 수 있는 땅도 무궁무진했기 때문에 자가용이 널리 보급되는 데에 거침이 없었다. 전차는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철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도 교외 도시가 속속 등장했다. 1950년대의 주 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 System) 등 간선교통망이 더 발달하자 이런 움직임은 더 가속화돼 LA는 철도를 버린 후 도로로 촘촘히 연결된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으로 성장했다.
1930년대에 주민 수 100만 명을 넘은 LA는 인구에서 샌프란시스코를 추월했고 1932년 첫 번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세계 속의 대도시로 자리매김했다.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 대전은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랬던 것처럼 LA의 제조업을 크게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태평양 전쟁에 쓰일 주요 무기와 군수물자들이 LA에서 생산되면서 곳곳의 공장이 활발하게 가동됐다. 샌페드로 항구에서는 군함이 건조됐고, 6개의 항공기 제조 기업에서 수많은 비행기들이 만들어졌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는 많은 참전용사들이 LA지역에 정착하면서 인구도 더 늘어났고 신규 주택단지도 더 많이 들어섰다.
전후의 경기 팽창은 관광산업 발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1955년에는 세계 최초의 테마파크인 디즈니랜드가 LA 남부 애너하임에 만들어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휴가 때 온 가족이 디즈니랜드로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떠나는 것이 유행처럼 퍼졌다. 전후에 정비되기 시작한 고속도로 시스템은 아이들까지 동반한 온 가족의 자동차 여행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멀리서 출발한 가족들은 중간지점에 있는 여러 도시의 관광지들을 들리면서 며칠에 걸쳐 디즈니랜드에 도착했다. 그들은 보통 3일을 방문할 수 있는 티켓을 끊어 당시로서는 마냥 신기했던 놀거리를 즐긴 다음 선물 보따리를 트렁크에 채워 다시 몇 날 동안 집으로 돌아갔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하루 15마일씩 30일을 꼬박 걸어야 했던 샌프란시스코와 LA 사이의 450마일(720km) 거리도 이제 가족들이 휴가를 즐기기 위해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1964년부터는 영화 스튜디오들도 테마파크를 운영하면서 할리우드 영화라는 소재를 이용한 관광 산업도 날개를 달았다. Surfin’ USA(1963), California Dreaming(1965), California Girls(1965) 등의 노래가 인기를 끈 것도 이즈음으로서 이러한 노래와 할리우드 영화들은 태양이 내리쬐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풍경을 전 세계에 홍보하며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았다.
급속하게 발전한 LA도 오늘날 미국의 다른 도시들처럼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늘어나는 스트릿갱(Street Gang)들로 인해 1930년대부터 갱 수도(Gang Capital of America)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고, 1965년, 1992년에는 인종을 둘러싼 사회 갈등이 격화돼 많은 시민들이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처럼 부자들의 자산과 부가 늘어나면서 집값이 지속적으로 상승해 오늘날 LA에도 수만 명의 홈리스들이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외곽 도시가 성장하면서 도심은 오히려 공동화돼 주민 거주의 질이 낮아졌고, 인근의 산간지역까지 주택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산불, 지진, 가뭄 등의 자연재해에 더욱 취약해졌다.
그 중에서도 교통 혼잡은 LA의 특히 심각한 문제이다. 자동차에 의존하는 미국의 도시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이지만 교외 지역이 지속적으로 팽창한 LA는 미국에서도 교통 혼잡 문제가 가장 심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20세기 초반 과감하게 전차와 같은 대중교통을 버리고 자가용을 끌어안은 LA의 정책은 오늘날까지 많은 후유증을 남기고 있다. 주민들은 자동차와 교외화를 통해 이동의 자유와 넓은 주거 공간을 얻은 대신 많은 것을 잃었다. 이제는 모두가 자동차를 끌고 다닐 수밖에 없게 되어 버린 탓에 심각한 교통 정체는 일상이 되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비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낮 시간에도 도로는 항상 혼잡하다. 차가 막히는 것 때문에 운전자 한 명당 한 달에 수십 시간을 길에서 낭비하고 있고, 이로 인해 지역 전체적으로 큰 폭의 생산성 감소를 겪고 있다. 또한 1980년대에는 자동차 배기가스에서 발생한 스모그가 도시를 뒤덮어 강력한 환경규제를 마련해야 하기도 했다. 자동차로 인해 도시는 몸집만 커져서 사람들 간 교류 기능이 약해졌고, 도시 내 여러 구역이 단절돼 버리는 바람에 영화 속 화려함의 도시로 유명했던 LA는 오늘날 걷기 힘든 삭막한 공간이 돼 버렸다.
심각한 교통 정체를 해결하기 위해 LA시는 철도를 포함한 대중교통 전반을 개선하는 데에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교통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대규모 재원을 마련하는 방안으로 LA시는 주민 투표라는 정공법을 택했다. 2008년 LA시는 2039년까지 소비 1달러에 대해 0.5센트(0.5%)의 소비세를 인상하는 방안(Measure R)을 투표에 붙였다. 이 안이 승인되려면 주민의 3분의 2가 동의해야 했는데 주민들은 67.9%의 찬성률로 가까스로 이 안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시는 2010년부터 30년간 400억 달러의 재원을 마련해 철도‧버스망 확충과 자전거 활성화 등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2016년에는 2039년 이후에도 계속 1달러 소비 당 1센트(1%)의 소비세를 부과하는 방안(Measure M)이 투표에 붙여졌다. 영구적 세금 인상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71.2%의 주민이 찬성함으로써, 2039년 이후 40년간을 기준으로 1,200억 달러의 추가 예산이 확보되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LA가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과연 세계 최악의 심각한 교통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게재 21.11월)
오늘날 약 140만 명이 거주하는 샌디에고는 캘리포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샌디에고 메트로폴리탄은 샌프란시스코, LA 지역과 더불어 미국 태평양 해안의 중요한 경제 권역을 형성하고 있다.
샌디에고는 알타 캘리포니아에서 최남단에 위치한 깊은 만이라는 지리적 특성 탓에 초기 스페인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곳이었다. 1542년 카브리요가 소설 속 칼라피아 여왕이 다스리는 풍요로운 제국을 찾아서 아메리카 서부 해안을 탐험할 때에도 이곳에 첫 번째로 상륙했다. 카브리요는 바다를 향해 볼록 튀어나온 포인트 로마(Point Loma)의 안쪽 만에 정박해 이 지역을 산미구엘(San Miguel)이라 이름 붙이고 스페인의 영토로 천명했다. 카브리요의 탐험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이후 60여 년이 지난 1602년, 마닐라 갤리온의 중간 기착지가 될 만한 곳을 찾기 위해 북쪽으로 항해했던 비즈카이노는 포인트 로마의 약간 위쪽 오늘날의 미션 베이(Mission Bay)만에 정박했다. 그가 도착한 11월 12일은 마침 그가 존경해서 자신이 탄 배의 이름으로 삼기도 한 15세기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성인 디에고(San Diego de Alcalá)의 축일이었다. 그는 이를 기념해 그 지역을 샌디에고(San Diego)라고 바꿔 불렀고, 그가 탐사 지도에 남긴 이 이름이 훗날 그대로 고착되어 이 도시의 명칭이 되었다. 비즈카이노의 탐험 이후 스페인은 캘리포니아에 정착 기지를 만드는 데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샌디에고는 오랫동안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1769년 포톨라의 탐험을 시작으로 스페인인들은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하 캘리포니아에서 육로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온 포톨라의 일행은 1769년 5월 샌디에고강 하구 언덕에 도착해 군사기지인 프레지디오(Presidio)를 설치했다. 오늘날 샌디에고 올드타운 유적지로 남아있는 이곳은 공식적으로 알타 캘리포니아에 유럽인이 처음 정착한 곳이었다. 포톨라와 동행한 세라 신부는 그해 7월 프레지디오 동쪽에 첫 번째 수도원(Mission Basilica San Diego de Alcalá)을 만들어 이 일대 원주민에게 가톨릭을 전파했다. 그는 이후 캘리포니아 남북을 가로지르는 여러 수도원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을 감독한 후 1784년 북쪽 카멜(Camel)에 있는 수도원(Mission San Carlos Borromeo)에서 숨을 거뒀다. 수백 명의 스페인인들과 수천 명의 원주민 개종자들이 함께 거주했던 샌디에고는 오랫동안 뉴스페인과 캘리포니아 다른 지역을 잇는 주요 길목 역할을 했다.
1821년 멕시코가 캘리포니아를 관할하게 되자 당시 샌디에고 거주자 432명은 행정구역인 푸에블로(Pueblo)를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 멕시코 정부에 건의했다. 허가를 받은 이들은 지역을 다스리는 시장(Alcalde)도 선출하며 도시의 틀을 갖추려 했지만 세를 불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북쪽 LA 인근의 목장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샌디에고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그쪽으로 이주했고, 1830년대에 마을 주민 수는 100~150명까지 축소되었다. 인구가 줄어든 샌디에고는 결국 푸에블로의 지위를 잃었고, 주민들은 가끔씩 왕래하는 미국의 무역선 등에 소가죽과 수지를 판매하며 생활을 영위했다. 이처럼 19세기 초 샌디에고는 큰 도시가 아니었지만 미국-멕시코 전쟁 후 1848년 양국이 국경을 협상할 당시에는 이곳을 어느 국가의 영토로 할 것인가가 치열한 논쟁거리였다. 당시 미국은 태평양 항구로서 샌디에고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지역을 미국의 영토로 편입하는 쪽으로 협상을 관철시켰다.
샌디에고는 1850년 캘리포니아의 주 승격과 함께 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도시 발전 과정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었다. 1852년 시는 예산 부족 때문에 파산하였고, 주는 시의 차터(Charter)를 박탈한 후 1889년까지 시를 직접 관할하였다. 당시의 샌디에고는 좋은 항만조건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좀처럼 성장하지 못했다. 골드러시로 인해 북쪽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사람과 자본이 몰려들었고, LA 인근에는 목축업과 오렌지, 포도 농업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샌디에고 지역은 광물이 많거나 농작물 생산이 활발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185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사업가 윌리엄 데이비스(William Heath Davis)는 천연 항구로서 이 지역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뉴샌디에고(New San Diego)라는 이름으로 기존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항구 지역 개발을 시도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많은 자본을 투자해 샌디에고만에 항만 시설을 설치하고 이 지역 부동산을 활성화하려 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물 부족 문제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의 샌디에고 올드타운 자리에 있었던 기존 마을은 샌디에고강가에 자리하고 있어 그나마 물을 얻기가 용이했지만 3마일(5km)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항구 근처에는 물을 얻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항구 쪽 정착민들은 부족한 식수를 얻기 위해 매일 먼 거리를 왕래해야만 했다. 결국 데이비스가 개발한 항구에는 동쪽으로 140마일(220km) 떨어진 멕시코 국경 군사기지(Fort Yuma)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미 육군 창고 시설만 들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고, 이마저도 콜로라도강을 통한 물자 공급로가 뚫리자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당시 샌디에고의 발전에 있어서 물의 확보만큼이나 시급한 문제는 외부와의 연결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샌디에고는 우수한 지형조건과 기후를 가졌지만 미국 국토의 남서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다른 지역과 통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부터 샌디에고는 끊임없이 동부 및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과 통신, 교통로를 확보하는 것에 주력하며 외떨어진 도시를 타지와 이으려 했다. 먼저 연결된 것은 통신로였다. 1857년에 구축된 텍사스 샌안토니오와 샌디에고 간 편지 전달 체계는 미국 대륙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한 첫 번째 공식 우편 경로가 되었다. 서해안까지는 기차가 닿지 않았던 당시, 텍사스에서 샌디에고까지 소식이 전달되는 데에는 대략 30일 정도가 걸렸다.
1860년대 사업가 알론조 호톤(Alonzo Horton)은 10여 년 전 데이비스가 실패한 항구 개발을 다시 한 번 추진했다. 그는 샌디에고만 교역이 결국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으로 항구 주변을 뉴타운(New Town)이라 부르고 개발을 시작했다. 그의 프로젝트는 앞서 데이비스의 시도와는 달리 성공을 거두었다. 뉴타운에 우물을 개발해 일정량의 식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무엇보다도 당시 샌디에고가 새로 건설될 대륙횡단철도의 종점이 될 수도 있다는 세간의 기대가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뉴타운은 이내 올드타운을 앞질러 도시의 핵심 지역으로 부상했고 오늘날까지 가스램프라 불리는 거리를 형성하며 그 모습이 남아 있다.
철도 연결은 당시 샌디에고 주민들의 최고 관심사였다. 1850년대 최초의 대륙횡단철도 노선이 어디에 놓여질 것이냐를 놓고 미국 남부와 북부가 치열하게 경쟁할 때 샌디에고는 서부 종점의 강력한 후보지 중 하나였다. 결국 1862년 첫 번째 대륙횡단철도 노선이 새크라멘토를 종점으로 하는 북부 통과 안으로 최종 결정되기는 했지만 추가 횡단철도 건설 기대가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에 수백 명이 거주하던 샌디에고는 3,000명의 큰 마을로 성장했다. 마침내 1870년대에 산타페 철도(Santa Fe)가 남쪽을 잇는 독자 대륙횡단 노선을 검토하자 샌디에고는 종점 위치를 놓고 LA와 열띤 경쟁을 벌였다. 1885년 산타페 철도가 서던퍼시픽(Southern Pacific)의 철도망을 일부 임대해 우선 샌디에고와 LA까지 들어오자 샌디에고의 개발 붐은 극에 달했다. 최대치일 때 인구는 4만 명까지 올라갔고, 육지의 땅도 모자라 부동산 개발자인 밥콕(Babcock)은 1886년 항구 앞 코로나도(Coronado) 섬에 있는 땅까지 대규모로 매입해서 화려한 호텔을 짓고 주거지를 만들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샌디에고가 철도 교통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2년 동안 도시 전체가 들썩거렸지만 1887년 산타페 철도가 신규 건설하는 철도의 종점이 LA로 최종 결정되면서 열기는 빠르게 식었다.
1890년 전국 인구조사 당시 샌디에고 시장 더글라스 건(Douglas Gunn)은 1880년 3,000명이던 인구가 공식적으로 27,000명으로 늘어났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아무튼 80년대의 개발 붐은 대단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샌디에고로 이주했던 것이다. 최종 조사 결과 인구가 15,700명으로 집계되어 비록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샌디에고 시민들은 여전히 미래를 낙관했다. 당시 5만 명이던 LA 보다는 인구가 적었으나 10년 동안 500%가 넘는 인구증가율을 보인 샌디에고는 당시 미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빠른 성장 속도를 보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한풀 꺾인 이주 열기는 90년대에 들어서도 살아나지 않았다. 남서부 철도 교통의 중심이 된 LA에 유전 개발까지 이루어지자 모든 관심은 그 쪽으로 쏠렸다. 샌디에고가 샌프란시스코를 따라 1890년 사업을 개시한 케이블카는 수요가 부족해 이내 운행을 중단했고, 10년 동안 인구는 고작 2,000여 명 정도만 늘어나 1900년 17,700명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후 샌디에고의 도시 발전을 이끈 중요한 주체는 이곳 항만의 전략적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미 해군이었다. 해군은 처음에는 1901년 샌디에고 서쪽에 길게 뻗은 반도인 포인트 로마(Point Loma)에 연료 보급 기지(Navy Coaling Station)를 마련했다. 이후 해군은 1920년대부터 2차 세계 대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샌디에고와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규모를 크게 확장해 갔다. 1917년에는 코로나도 섬 북쪽에 해군 항공대의 공항(Naval Air Station North Island)을 만들었고, 1922년에는 샌디에고 남쪽 항만에 977에이커(3.91㎢)에 이르는 미국 내 두 번째 규모의 거대한 함대 사령부(Naval Base San Diego)를 건설했다. 대규모 기지들이 들어서면서 해군은 곧 샌디에고의 주요 고용주가 되었다. 현재 샌디에고에 근무하는 해군 선원과 군무원은 35,000명에 이르고, 주민 고용의 5% 가량이 해군기지와 관련되어 있을 정도로 해군은 도시 발전의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들의 가족까지 포함하면 샌디에고시의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해군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1930년 15만 명이던 샌디에고의 인구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50년 33만 명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전후에는 군비 감축이 이루어지면서 군 관련 산업이 다소 축소됐지만 관광업이 지속적인 도시 성장을 이끌었다. 이곳의 따뜻한 날씨와 아름다운 태평양 해안은 연중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았다. 1915년 파나마-캘리포니아 박람회(Panama-California Exposition)를 개최한 발보아 파크, 박람회 때 전시했던 이국적인 동물들을 이관해 1922년 개장한 동물원, 바다 생물을 활용한 테마파크, 잘 가꾸어진 수변 공간 등이 특히 많은 인기를 끌었다.
관광 외에 항공기 제조업과 첨단 산업도 샌디에고의 중요한 성장 동력이 되었다. 연중 맑은 날이 많은 샌디에고의 날씨는 20세기 초 항공기 제조업을 발달하게 했다. 단적인 예로 1927년 찰스 린더버그가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할 때 탄 비행기(The Spirit of St. Louis)는 당시 샌디에고에 소재했던 많은 소규모 항공기 공장 중 하나(Ryan Airlines)에서 제작한 것이었다. 2차 세계 대전 후 항공 산업이 서서히 쇠퇴하고 1970년대까지 세계 최대 규모를 유지했던 원양어선 수산물의 통조림 공장 단지도 외국과의 경쟁에 밀려 사양길에 접어들었을 때, 샌디에고에서 새롭게 부상한 산업은 무선 통신과 생명공학이었다. 특히 1985년 창업한 후 오늘날 만 명이 넘는 인원을 고용해 지역 최대 기업으로 부상한 퀄컴은 이 지역 무선 통신 산업의 발전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이런 퀄컴의 성공은 흥미롭게도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1990년대에 우리나라는 2G 단말기를 개발하면서 당시 신생 기업 퀄컴의 실험적인 기술이었던 CDMA를 채택해 상용화에 성공했다. 그 덕분에 태동하던 세계 휴대폰 산업의 속도 경쟁을 빠르게 따라갈 수 있었던 우리나라는 휴대폰 판매 가격의 5%, 한해 총 수천억 원에 달하는 기술 로열티를 지급하면서 퀄컴의 도약을 도왔다. 최근 샌디에고는 생명공학 산업의 발전에도 역점을 쏟고 있다. 이곳은 많은 미국인들이 은퇴 후 거주하기를 희망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고령자를 대상으로 한 의료, 제약, 헬스케어 연구도 활발하다. 지역대학과 벤처기업이 어우러진 바이오 클러스터 안의 많은 기업들은 이 도시의 또 다른 미래를 개척해 가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와 LA를 괴롭히는 주택가격 상승, 홈리스 증가, 교통 체증, 물 부족 문제 등은 오늘날의 샌디에고도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골치 아픈 문제들이다. 그러나 샌디에고에는 이들 도시에는 없는 다른 어려움도 있다. 바로 미국 국토의 외곽에 있는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오는 불리함이다. 교통수단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주변 여건과 입지는 도시 발전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국경지대에 자리 잡고 있고 주변이 산과 사막으로 둘러싸인 샌디에고는 오랜 기간 교통망 구축과 유동인구 증가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예전 샌디에고 사람들이 외부와의 철도 연결을 그토록 바랬던 것도, 도시 발전이 번번이 한계에 부딪혔던 것도 이와 같은 공간적인 고립이 큰 원인이었다.
지리적 격절을 극복하기 위해 샌디에고인들이 택한 전략은 자신만의 장점을 찾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좋은 날씨와 느리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이용해서 휴양지와 은퇴지로서 명성을 쌓아나갔고, 우수한 자연 환경을 잘 가꿔서 쾌적하고 깨끗한 곳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건강과 삶의 질을 강조하는 도시 전략은 오늘날 생명공학 같은 연관 산업을 유치하고 육성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게재 21.11월)
남부 캘리포니아의 어바인시(City of Irvine)는 목장과 밭이었던 곳이 순식간에 도시로 바뀐 곳이다. 오늘날 170㎢ 면적에 30여 만 명이 살아가는 어바인시가 자리잡은 지역은 원래 제임스 어바인(James Irvine)이라는 인물이 소유한 목장 지역이었다. 아일랜드 출신이었던 제임스 어바인은 골드러시 때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장사를 통해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는 1864년에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사하면서 그간 모은 재산으로 넓은 토지를 구입해 총 12만 에이커(480㎢, 서울의 80%)에 달하는 목장을 만들었다. 1886년 그의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 제임스 어바인 2세(James Irvine II)는 1894년 전문 농업회사(Irvine company)를 설립해 그 목장을 대규모 콩 경작지로 바꾸었다. 이 회사는 이후 50년 동안 캘리포니아의 주요 농업기업으로 건재했고, 2차 대전 때에는 강낭콩과 비슷하게 생긴 리마콩을 세계 최대 규모로 생산해 전 세계에 파병된 미군에게 납품하며 큰 이익을 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폭증하면서 LA 도심에서 먼 이 지역에까지 주택 수요가 생겨나자 회사는 사업 구조를 탈바꿈했다. 그간의 농업 중심 사업에서 벗어나 대규모 도시 개발 계획을 세우고 주택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회사는 텅 빈 땅에 만들어지는 새 도시의 앵커시설을 유치하기 위해 1960년 1,000에이커(4㎢)의 부지를 캘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에 단돈 1달러만 받고 매각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대학은 5년 후 500에이커의 땅을 더 구입해 1965년 그곳에 신규 캠퍼스(UC Irvine)를 조성했다. 1960년 학생 수 1,500여 명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현재 3만 명까지 규모를 늘렸고, 3명의 노벨상 수상자도 배출하면서 도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교와 주변 주택이 완성된 이후인 1971년 주민들은 투표를 통해 정식 시를 설치했다. 100년 동안 목장, 콩밭이었던 곳에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진 이 모든 것들은 불과 10년밖에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다. 1970년대판 미국의 신도시였던 것이다. (게재 21.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