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컴퓨터의 원리는 평행우주를 소재로 한 영화처럼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리처드 파인만의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말을 전제로 하고 그 작은 컴퓨터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전자, 광자, 양성자, 중성자와 같은 양자는 동시에 여러 장소에 존재하고 상호간에 얽힐 수 있다. 양자는 관측되기 전까지 확률적으로 가능한 모든 위치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를 양자중첩이라고 한다. 양자를 관측하는 순간 중첩은 붕괴되고 하나의 상태로 확정된다. 또한, 관측을 통해 하나의 양자의 상태가 결정되는 순간 다른 양자의 상태도 함께 결정된다. 이는 양자얽힘이라 부른다. 얽힌 양자들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호 연관될 수 있다. 전구에 비유해 설명하면 양자 세계의 전구는 정확히 동시에 꺼져 있기도 하고 켜져 있기도 하며, 아무 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서로 영향을 받고 깜빡인다.
양자컴퓨터는 큐비트(qubit)라는 단위의 양자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컴퓨터에서 1비트는 1 또는 0을 의미하지만 큐비트는 중첩 상태에서 동시에 1 그리고 0이다. 이 때문에 한 개 큐비트가 한 순간에 구현할 수 있는 가짓수는 2개이다. n개 큐비트가 있는 양자컴퓨터는 동시에 2의 n승 개의 경우의 수를 표현한다. 단순해 보이는 이 특징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암호체계에 널리 쓰이는 SHA-256 해시 알고리즘에서 도출하는 암호인 256자리 이진수는 2의 256승의 종류를 가지고 있다. 현존하는 그 어떤 컴퓨터를 사용해도 이를 역으로 계산하여 입력값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1초에 40경번의(400 petaFLOPS)의 연산을 하는 슈퍼 컴퓨터를 동원해도 무려 10의 52승년가량의 시간이 걸린다. 한번에 하나씩 값을 입력하고 계산해야 하니 아무리 빨라도 물리적인 시간이 소요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컴퓨터에서는 중첩을 이용해서 모든 경우의 수를 동시에 모두 검증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론적으로 256개 큐비트가 있으면 2의 256승의 경우의 수를 한 순간에 전부 검토해서 암호를 풀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때 모든 큐비트는 중첩상태여야 하고 양자 얽힘으로 상호 연결돼 있어야 한다.
큐비트가 하나씩 늘 때마다 검증 능력은 2배씩 증가한다. 이 때문에 양자컴퓨터의 큐비트를 늘리는 것이 관건이다. 2001년 IBM은 7큐비트의 양자컴퓨터를 개발해서 15의 소인수 분해에 성공했다. 2016년에는 구글이 9큐비트를 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양사의 경쟁은 해를 거듭할 수록 거세졌다.
IBM은 2017년 20큐비트 Q시스템을 구축하고, 그해 말 50큐비트를 발표했다. 2020년에는 65큐비트의 허밍버드를 내놓고, 2021년 11월에는 127큐비트의 이글 프로세서를 선보였다. IBM의 로드맵에 따르면 2022년 433큐비트, 2023년 1,000큐비트, 2024년 1,121큐비트의 개발이 예고되어 있다. 구글 또한 2018년 3월 72큐비트의 브리슬콘을 개발했다. 2019년 9월에는 53큐비트의 시커모어로 기존 슈퍼컴퓨터가 1만년에 풀 문제를 3분 30초 만에 풀어낸 연구결과를 게재했다.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CEO는 2029년에 상용제품 개발 완료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나라 출신 김정상 교수가 공동창업한 미국 아이온큐는 IBM과 구글이 쓰는 초전도 방식이 아닌 이온트랩 방식으로 양자컴퓨터를 만들고 있다. 그 외에도 일본의 후지쓰, 호주 큐컨트롤, 캐나다의 디웨이브에서 양자컴퓨터를 개발하고 있다. 중국도 2016년 양자통신 위성 묵자호를 발사하고, 2017년 알리바바가 11큐비트의 클라우드 서비스를 내놓았다. 2021년에는 중국과학기술대가 66큐비트의 양자컴퓨터를 개발하면서 큐비트를 늘렸다. 우리나라도 늦었지만 2023년까지 5큐비트, 2025년까지 20큐비트의 양자컴퓨터를 만드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양자컴퓨터가 안정적으로 동작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그 잠재력은 무궁무진하다. 특히, 의료, 금융, 사이버보안, 암호화폐, 인공지능, 물류, 제조설계, 농업비료생산, 안보의 9개 분야에서 큰 변화가 예상된다(CB인사이트) . 김정상 교수는 "현재 의약계에서는 신약 개발 시 약재와 병원균의 화학적 반응을 관찰해 유효한 후보군을 좁히지만 경우의 수가 많아 어려움을 겪는다"면서, "양자컴퓨터를 이용하면 경우의 수 중에서 가능성이 높은 것을 효율적으로 찾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사이언스타임즈도 1,000큐비트 이상으로 늘어나면 성능이 상상할 수 없이 빨라져 어떤 바이러스든지 완벽하게 퇴치하는 맞춤형 신약개발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연결된 것처럼 동작하는 양자 얽힘 현상을 통해서는 해킹이 불가능한 통신도 구현 가능하다.
이미 100큐비트를 능가한 이상 양자컴퓨터가 변화시키는 세상은 머지않아 가시화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양자컴퓨터가 곳곳에서 소리 없이 이용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2021년 11월 24일 미국 상무부는 미국 기업이 중국에 양자컴퓨팅 기술을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다. 중국이 미국의 암호를 해독하고 스텔스, 잠수함에 대응하는 새로운 군사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였다. 양자컴퓨터가 미래 기술패권 경쟁의 핵심임을 상징하는 일이다. 양자컴퓨터는 과거 컴퓨터가 그랬듯이 세상을 크게 흔들 것이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양자와 같이 극도로 미세한 입자를 조절하여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능히 짐작할 만 하다. 게다가 양자는 거시 세계와는 전혀 다른 물리 법칙을 적용받기 때문에 다루기가 더욱 까다로울 수밖에 없다. 양자는 어디에나 존재하고,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관측 즉시 고유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등 유별난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양자컴퓨터에서 비현실적으로 빠른 연산이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양자의 중첩 현상 때문이다. 양자의 중첩은 모순된 상태가 하나의 입자에 동시에 구현되는 것을 말한다. 양자가 어느 특정 공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전자(Electron)의 예를 들면 중첩은 측정되기 전까지 전자가 자신의 스핀방향(Spin direction)의 임의성을 유지하는 것으로 구현된다. 여기서 스핀은 전자가 실제 회전한다는 뜻은 아니고 빠르게 도는 물체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특징은 고유의 각 운동량(Intrinsic angular momentum)으로서 나타난다. 전자는 실제 돌지는 않지만 자신의 주위로 엄청나게 빠르게 도는 물체만이 만들 수 있는 자기장을 형성한다. 그에 따라 플러스, 마이너스의 상반된 전자 극성 방향(Direction of polarization of the electron)을 동시에 나타낸다. 만약 양자컴퓨터가 전자의 스핀방향을 큐비트로서 이용한다면 한 전자가 갖는 스핀의 값은 동시에 +1/2이거나 -1/2일 수 있다.
양자컴퓨터가 여러 경우의 수를 다루려면 중첩만으로는 부족하고 얽힘이 필요하다. 두 가지의 스핀방향을 보이는 단 한개의 전자로는 오직 두 가지 상태밖에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우를 늘리려면 여러 개의 전자를 묶어서 제어하여야 한다. 만약 n개의 전자를 한꺼번에 다룰 수 있다면 검증할 수 있는 가지 수는 2의 n승 개이다. n이 커질수록 따져볼 수 있는 케이스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 중에 맞는 답이 찾아지면 바로 그 답을 확정해 주어여 하는데 이는 양자 얽힘이라는 특징 때문에 가능하다. 얽혀 있는 양자들 중 하나가 관측되면 나머지 양자들도 고정이 되어 버린다. 이 때 양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얽힐 수 있기 때문에 강력한 암호 통신을 구현할 수도 있다. 양자가 얽혀 있다는 것은 수학적으로는 멀리 떨어진 두 입자의 파동함수(Wavefunction)가 에너지 보존 법칙(Conservation law)에 따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자는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파동함수 형태의 방정식으로 기술된다. 물질은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양자의 시간에 따른 변화는 파동의 진행과 비슷하다. 슈뢰딩거 방정식은 이를 선형부분미분방정식(Linear partial differential equation) 형태로 나타낸 것으로서 양자역학의 기초 방정식이 된다. 한 원자 내 전자들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원자는 하나의 전체 파동함수를 갖는다. 얽혀 있는 양자들의 파동함수는 개개 입자들의 파동함수로 나눠질 수 없고, 상호 연관된 단일 파동함수로서 구현된다.
얽혀 있는 여러 양자들의 값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크게 초전도방식과 이온트랩 방식을 이용한다. 초전도방식은 IBM, 구글, 디웨이브, 리게티 등 기업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방법이고, 이온트랩은 아이온큐에서만 사용하는 독특한 방법이다.
초전도방식에서는 기존 반도체처럼 집적회로 공정 기술을 활용한다. 실리콘 기판(Substrate)에 패턴을 만들어서 양자의 에너지 레벨을 고립시키는 방법으로 큐비트를 구현한다. IBM의 경우에는 니오븀(원자번호 41번)이나 알류미늄(원자번호 13번)을 초전도 물질로 활용한다. 집적회로에 구현된 양자들은 주변 원자들의 진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 이 때문에 주변 원자들의 진동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칩의 온도를 극도로 낮추는 것이 필요하다. 절대온도 0도에 가까워 초전도 현상이 일어나는 정도의 극저온 상태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주위의 진동이 적을수록 양자의 중첩과 얽힘이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될 확률은 점점 높아진다.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IBM에서 공개한 양자컴퓨터도 금박을 씌운 거대한 냉장고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안의 양자 칩은 아주 작지만 극저온을 이루기 위한 용기는 매우 크다. 초전도방식의 문제점은 집적회로를 만들다 보니 공정과정에서 발생하는 오차를 제어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발생 오차를 안정적으로 검증하기 위해서는 천 개 이상의 큐비트가 필요하다. 한 개의 큐비트를 보정하기 위해 네 개의 큐비트를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기존 컴퓨터에서 7개 비트의 오차를 검증할 때 1개의 비트만이 필요한 것에 비해 불리한 요소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아직 전자 스핀의 일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짧다는 점이다. 스핀이 일정하게 유지가 안 되면 결정과정에서 엉뚱한 데이터가 나와 버릴 수가 있다.
이온트랩방식은 전하를 띤 원자 입자인 이온을 자기장에 의해서 가두어 큐비트를 구현하는 것이다. 여러 개의 이온을 레이저빔으로 쏴서 이온트랩 기술로 한꺼번에 붙잡아 놓고 조절하는 방법이다. 집적회로를 만드는 대신 자연상태의 원자를 큐비트로 이용하기 때문에 기술 재현이 훨씬 간편하다. 회로 제조 공정이 없기 때문에 오차가 적다는 장점도 있다. 상온에서 동작할 수 있다는 것도 유리한 점이다. 아이온큐의 경우 큐비트를 만드는 이온으로서 이테르븀(원자번호 70번)을 이용한다. 현재 2cmx2cm의 공간에 80개의 큐비트를 구현하는 기술을 발표했다. 오차 문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대규모 회사를 대상으로 B2B 방식의 시뮬레이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현대자동차와 협력해 배터리 효율을 높이는 목적으로 리튬 산화물의 구조와 에너지를 시뮬레이션 하는 것이 그 예이다. 다만, 이온트랩 방식은 초전도체보다 느리고, 한 번에 구현할 수 있는 큐비트의 수가 초전도방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는 문제점이 있다.
양자컴퓨터에서는 양자들이 얽히는 하드웨어를 구현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를 이용한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도 난해하다. 현재 양자컴퓨터에 적용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많지 않다. 미국 수학자 쇼어는 정수(Integer)의 소인수(Prime factor)를 찾기 위한 알고리즘 및 파동을 특정 주파수로 분해하는 푸리에 변환(Quantum Fourier Transform) 알고리즘(Shor algorithm)을 만들었다. 인도 태생 미국 컴퓨터 과학자 그로버(Lov Grover)는 양자컴퓨터를 활용한 데이터베이스 검색 알고리즘(Grover algorithm)을 고안했다. 이처럼 몇몇 분야에서 알고리즘이 개발됐지만 대부분 반복적인 수학 작업을 빨리 수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항에서 비행기 스케쥴을 조정한다던지, 배송 택배 차량의 최적 경로를 조정한다던지 하는 현실 속에서의 최적화문제(Optimisation problem)를 완벽히 풀어내기 위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약물이 몸 속에서 일으키는 반응을 다양한 경우의 수를 통해 모델링하고, 여러 단백질이 상호 작용하는 것을 시뮬레이션 하는 데에도 보다 정교한 알고리즘이 필요하다. 각 기업에서는 양자컴퓨터에 맞는 적절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예를 들어 스타트업인 리게티는 퀀텀 클라우드 서비스 플랫폼을 구축하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전체 양자 스택(Full Quantum Stack) 서비스를 구현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초기 컴퓨터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발전해 왔는지 익히 보아서 알고 있기 때문에 양자컴퓨터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도 눈을 떼기가 어렵다. 만약 수백개의 큐비트를 자유자재로 조정해 엄청나게 큰 소수(Prime number)의 2가지 유일한 약수인 소인수를 한 순간에 찾을 수 있게 된다면 인류가 지금껏 구축한 많은 암호체계를 무력화할 수 있다. 이를 개발한 집단은 엄청난 권력을 손에 얻게 될 것이고, 자신들이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춘 채 은밀히 그것을 활용하려 할 것이다. 양자컴퓨터가 한층 더 발전해 몸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유전자와 단백질을 이리저리 조합해 생물의 형질을 완벽히 구현할 수 있는 수준까지 나아간다면 인간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현재 도전 중인 회사와 국가 중 어느 그룹이 목표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지, 어디에서 처참한 실패가 나올 지 쉽게 예상할 수가 없다. 우리가 현재 참이라고 믿고 있는 양자역학에 대한 지식도 시간이 지나면 어설펐던 이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미래 변화의 예상 강도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양자컴퓨터에 대한 연구와 관찰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양자역학은 물질을 이루는 미세 입자들이 어떻게 존재하고 움직이는지 탐구하는 학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원자, 핵, 전자의 개략적인 크기를 알고 있다. 원자는 10의-10승m, 원자핵은 10의-15승m, 전자의 크기는 10의-19승m 정도이다. 이 숫자의 크기를 우리 인간이 상상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 동전 또는 서울시의 비유가 자주 인용된다. 만약 동전을 구성하는 원자들 중 하나를 동전 크기로 부풀리면 동전 자체는 지구만 하게 커진다. 만일 원자를 서울시만큼 거대하게 키운다면 그 안의 원자핵은 시청 앞의 축구공 만해지고, 전자는 시 외곽의 먼지 만해진다. 축구공과 먼지 사이의 넓은 공간은 모두 빈 여백이다. 원자는 그처럼 작고 비어 있다.
20세기 내내 이어진 많은 천재들의 치열한 논의와 실험적 검증을 거쳐 우리는 원자를 이루는 핵과 전자가 어떻게 분포하고 있는지 대략 알고 있다. 전자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 듯이 원자핵 주변의 정해진 궤도를 돌고 있지 않다. 에너지를 잃거나 얻으면서 원형 궤도 사이를 점프하듯이 건너뛰지도 않는다. 전자는 핵 주변 공간이라는 무대 전체에 ‘동시에 존재’한다. 또한, 관측하는 순간 고유한 성질을 잃고 붕괴해 하나의 위치와 상태로 확정된다. 인간은 무수한 노력을 통해 전자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예측하는 모형을 만들고자 했지만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차원과 본다는 행위의 한계만을 인식했다. 전자는 숫자로 표현되는 확률로서 실재할 뿐이고 특정 시간, 특정 위치에 독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한 원자 안의 전자들은 하나의 파동을 이루는 결맞음(Coherence)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원자의 전자들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상태가 확정될 때 나머지 다른 것들의 상태도 같이 확정되는 얽힘(Entanglement)을 이루기도 한다.
물리학의 대가들은 처음에 이렇게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결론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수학을 통하면 설명이 가능했지만 언어로 표현하면 여전히 이상했다. 1925년 하이젠베르크는 행렬 속 숫자를 통해 전자의 위치와 운동을 확률로서 표현했다.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1926년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고 하며 인간이 아직 찾지 못했을 뿐 양자들의 위치와 운동을 기술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양자역학을 인정하지 않았다. 슈뢰딩거는 1926년 전자가 핵 주변에 산재하는 점이 아니라 파동의 형태로 움직인다는 것을 기술하는 방정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도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 속에서 상자 안 고양이가 동시에 살아있고 동시에 죽어있을 수도 있는 모순에 혼란스러워했다.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물리학자들은 20세기말의 수많은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 이론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리처드 파인만은 1994년 출판한 교재(Six Easy Pieces)에서 ‘만약 지구에 재앙이 닥쳐 살아남은 세대에게 과학의 한 문장만을 전해줘야 한다면 무엇이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모든 것들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장이라고 답을 했다. 이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꼽은 이유는 이것을 알아내기까지 인류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지 감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것에서 출발하여 인류가 얼마나 많은 추가 질문들을 만들어내며 발전해 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질이 작은 기본입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인의 철학 속에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원자는 너무 작아서 어느 인간도 직접 보거나 느낄 수 없었다. 1803년 영국의 돌턴은 37세의 나이에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기본 입자가 있다는 원자론을 제시했다. 하지만 이는 실증적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돌턴으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1897년, 영국 맨체스터의 톰슨은 실험적으로 전자라는 존재를 알아냈다. 전기가 막 발견되었던 당시 톰슨은 낮은 압력의 기체가 채워진 튜브에 높은 전압을 가하면 기체가 전기를 전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압차가 생기면 기체 속 전하는 선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그것을 음극선(Cathode rays)이라 불렀다. 음극선 실험을 통해 톰슨은 원자에서 음의 성질을 띤 성분을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이 음전하들이 양전하의 한가운데 건포도처럼 박혀 있는 모델로 원자 구조를 제시했다. 톰슨은 전자를 처음 발견한 업적을 세웠을 뿐 아니라 20세기에 활약하게 될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한편, 1901년 독일의 플랑크는 빛이 파동과 같이 연속적인 에너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진동수와 관련된 불연속적인 값만 가질 수 있다는 ‘양자가설’을 발표했다. 1600년대 뉴턴 시절부터 오랜 기간 빛은 ‘입자’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1801년 토마스 영이 이중슬릿 실험에서 간섭현상을 발견하면서 빛은 다시 ‘파동’으로 간주되었다. 1901년 플랑크의 실험은 빛이 ‘입자’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재차 보여준 것이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실험을 바탕으로 빛 양자설을 주장해 빛이 파동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입자성을 띤다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을 밝혀냈다. 아인슈타인이 밝힌 빛의 이중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훗날 인정하지 않았던 양자역학을 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다.
뉴질랜드 태생으로서 영국에서 연구하던 러더퍼드는 1911년 원자에서 핵이라는 존재를 발견했다. 이 업적으로 러더퍼드는 핵물리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1897년 전자를 발견한 톰슨보다 15살 어렸던 러더퍼드는 톰슨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였다. 러더퍼드는 방사선의 일종인 알파선을 이용해 원자의 구조를 밝혀냈다. 알파선은 그 후 발견된 다른 핵 방사선(Nuclear radiation)에 비해 느리고 무거웠다. 속도는 빛의 속도의 5% 정도였고, 물질을 이온화시키는 능력이 강해 공기 중에서 몇 센티미터만 가면 소멸되었다. 러더퍼드는 얇은 금박에 알파선을 발사했을 때 일부 선이 튕겨져 나오는 현상을 관찰했다. 이를 통해 원자의 중앙에 원자핵보다 10,000배나 작은 원자핵이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러더퍼드의 연구팀에 있던 닐스 보어는 1913년 수소의 불연속적인 선스펙트럼 현상을 효과적으로 설명하는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1885년생인 보어는 당시 28세였다. 그는 덴마크에서 태어나고 공부한 후 26세에 영국으로 가서 처음에는 톰슨을 만났다. 보어는 자신이 구상하는 원자 이론을 톰슨에게 설명했지만 실험물리학자인 톰슨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실패했다. 다행히 보어는 러더포드 팀에 들어가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20세기 초 원자의 초기 연구를 이끌었던 톰슨, 러더포드, 보어는 각각 1856년생, 1871년생, 1885년생이었다. 오늘날의 우리는 21세기 초를 살고 있기 때문에 끝자리 연도로 이들의 나이차를 실감나게 짐작할 수 있다. 2013년 무렵 85년생 외국인 유학생보어가 56년생 물리학의 대교수 톰슨에게 와서 자신의 황당한 이론을 설명했다고 치자. 56년생 교수는 이를 젊은 연구자의 설익은 생각쯤으로 여기기 쉬웠을 것이다. 대신 56년생 교수의 제자이면서 이제 막 신기한 사실을 발견한 71년생 교수는 젊은 학생의 도전적인 이론을 보다 전향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보어의 이론은 물질의 에너지가 불연속을 이루는 현상을 잘 설명했지만 기괴하기 짝이 없었고, 에너지 보존의 법칙 같은 기본적인 상식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보어는 엄청난 열정으로 주변 사람들까지 지칠 때까지 자신의 이론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전자는 원자 내에서 정해진 원형 궤도를 따라서 회전한다.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 옮겨갈 때는 중간 이동경로 없이 갑자기 점프(양자도약; Quantum jump)하듯이 사라졌다 나타난다. 음의 성질을 띤 전자는 양의 원자핵이 당기고 있음에도 정상상태라 불리는 특정 궤도에 있기만 하다면 원자핵으로 당겨져 들어가지도 않는다. 핵과 가까운 궤도로 올라가거나 가속 운동을 하는 동안 빛을 내며 에너지를 잃어도 붕괴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로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원형궤도를 돈다는 것도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틀린 이야기이다. 하지만 보어의 이론은 양자가 거시 세계와 전혀 다르게 움직인다는 점을 통찰함으로써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냈다.
보어의 이론은 과학계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현상을 너무나도 잘 설명했기에 젊은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지자들이 늘어났다. 그러던 중 1924년 프랑스의 드 브로이라는 대학원생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 역시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는 물질파 이론을 수학적으로 고안했다. 1892년생인 드브로이도 젊디 젊은 과학자였다.
이듬해인 1925년, 1901년생인 24세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했다. 그는 1924년부터 코펜하겐의 보어 연구소에서 원자의 구조에 대해서 연구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전자의 위치와 상태를 관측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빛을 통해 관측하는 행위 자체가 전자의 운동 상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행렬로서 전자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양자역학을 제시했다. 뉴턴 이래 고전역학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역학의 필수적인 요소였다. 양자역학은 미세 입자 세계에서 이 개념을 버리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이었다.
1927년 미국의 데이비슨과 거머는 전자빔을 활용한 이중슬릿 실험을 통해 전자도 빛과 마찬가지로 간섭무늬를 보인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확인했다. 전자가 파동의 성질을 보임을 밝힌 것이다. 더 신기한 것은 전자의 움직임을 관측하려고 관측장비를 대었을 때였다. 이 때 전자는 마치 자신을 지켜보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간섭무늬를 보이지 않았다. 관측과 동시에 입자로 확정된 것이다. 이와 동일한 현상이 세계 각지의 실험자들을 통해 똑같이 확인되었다.
이렇듯 신기한 양자의 세계가 밝혀지고 있던 즈음인 1927년 10월 24일부터 10월 29일까지 6일간 벨기에에서 다섯번째 솔베이 회의가 열렸다. 벨기에의 화학자 솔베이는 탄산소다라고도 불리는 공업용 탄산나트륨을 제조하는 솔베이법을 개발해 부를 일군 후 이를 과학 연구를 위해 쾌척했다. 솔베이 회의도 과학자간 국제교류를 위해 그의 후원으로 개최된 것이었다. 1927년 회의에는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플랑크, 보어, 하이젠베르크, 드브로이, 로렌츠, 파울리, 디랙, 퀴리부인, 보른 등 29명의 쟁쟁한 과학자가 참석했다. 이 중 무려 17명이 노벨상을 받을 정도로 당대의 내로라하는 천재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6일 동안 이제 막 태동한 양자역학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아인슈타인을 위시로 한 원로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의 허점을 공격했고, 보어를 위시로 한 젊은 과학자들은 그를 방어했다. 천재들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양자역학은 점차 모습을 갖추어 갔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현대에도 인간은 양자역학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의 확률모형이나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을 통해 양자의 움직임을 예측하면서 고도로 발전된 전자공학을 만들어냈다. 1940년대에는 핵무기를 개발했고 그 가공할 힘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핵을 이용한 전기 생산 방법도 고안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양자의 신기한 특징을 이용해 만든 비현실적 경우의 수 계산기인 양자컴퓨터도 발전시켜 가고 있다. 양자역학은 더 이상 천재 개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작은 규모의 실험으로 탐구하기 어려워질만큼 복잡해졌다. 오늘날에는 입자가속기와 같은 고가의 장비를 이용해 전세계의 연구자들이 인터넷망을 통해 협업하며 연구를 진행한다. 이들의 열정을 통해 앞으로 무엇이 더 나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동양인에게 있어서 양자가 어디에나 존재하면서 또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 끝과 끝에 있어도 서로 얽힐 수 있다는 말은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오랜 동양의 철학이 공간과 시간의 덧없음과 존재간의 연결을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우리들의 사랑과 동경을 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반도체는 인간이 전자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되면서 만든 위대한 제품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압도적 1위인 우리나라는 현재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에는 8,000여종의 다양한 제품이 있다. 2020년 전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4,498억달러(540조원)였으며 2021년에는 5,900억달러(710조원)에 달했다(IC인사이트,가트너). 2020년 기준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반도체는 33.2%이고, 시스템 반도체는 65.8%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메모리의 2배가량에 달하는 큰 시장이다.
우리나라의 시스템 반도체를 향한 영역 확장이 결코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팹리스와 파운드리 양 분야에서 미국과 대만의 아성이 공고하기 때문이다. 시스템 반도체에서는 다양한 데이터를 각각의 목적에 맞게 효율적으로 연산하고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설계 능력이 중요하다. 또한, 다품종 소량생산을 매끄럽게 달성할 수 있는 고난이도 생산 능력이 요구된다. 설계에 해당하는 팹리스(Fabless) 업체는 미국의 애플, 인텔, AMD, 퀄컴, 브로드컴, TI, 엔비디아 등 기업들이 단연 두드러진다. 생산을 담당하는 파운드리(Foundry) 업체는 글로벌 시장의 60% 정도를 장악하는 대만 TSMC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팹리스 설계 업체가 있다. 디스플레이 반도체(DDI : Diplay Driver IC), 전력반도체(PMIC : Power Management IC), 카메라 이미지센서(CIS : CMOS Image Sensors), 차량 및 전자제품용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 Micro Controller Unit)의 설계는 우리나라가 강점을 보이는 분야이다. 신생 스마트업도 많이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작은 팹리스들은 애플, 퀄컴, 엔디비아 등처럼 압도적인 연구개발비를 투자하지 못하고 큰 주문을 낼 수도 없다. 이 때문에 대형 파운드리 업체와 경쟁력 있는 계약을 맺는 것이 수월치 않은 실정이다.
제조 영역인 파운드리 분야의 사정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고 있고, 하이닉스도 M&A를 통해 사업을 확장하고 있지만 대만의 기세를 넘기가 쉽지 않다. 새로운 공정에 도전하는 속도는 우리가 앞서는 편이다. 삼성전자는 2022년 상반기 파운드리에서 3나노미터의 미세공정 양산을 시작한다. 2018년 7나노미터에서 TSMC에 빼앗겼던 초미세공정의 주도권을 3나노미터부터는 다시 되찾아온 것이다. 2021년 TSMC가 제품 가격을 20% 가깝게 올리면서 시장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기술과 가격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점유율을 높여가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대만의 움직임이 빠르고 글로벌 팹리스 업체들이 삼성과 경쟁 구도에 있다는 점이 제약 요인이다. 팹리스 업체들은 파운드리 업체에 생산을 의뢰하며 설계도를 그대로 넘겨야 하는 만큼 스마트폰, 가전 분야에서 삼성과 부딪히는 다른 업체들은 기술 유출과 전략 노출을 꺼려하기 마련이다.
상황은 여의치 않지만 시스템 반도체는 절대 놓칠 수 없는 미래의 성장 산업이다. 자율주행 자동차 시장이 열리면 엄청난 양의 새롭고 창의적인 차량용 반도체가 필요할 것이다. 자율주행차의 카메라에 들어가는 이미지센서의 수요도 폭발적이다. 전기차는 에너지 효율이 좋은 최고 사양의 전력반도체를 요구할 것이다. 메타버스 세상에서 5G가 본격화되면 통신용 반도체 수요도 급증할 것이다. 메타버스를 구현하는 스마트글래스, 차세대 디스플레이에서도 시스템 반도체는 필수적이다. 스마트공장에서도 저마다의 특성에 맞는 반도체를 필요로 할 것이다. 게다가 AI와 로봇 시장이 대중화되면 관련 시스템 반도체의 수요는 지금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과 달리 자체 시장이 좁은 우리나라는 세계 시장의 트렌드를 잘 읽고 적재적소의 제품을 설계, 제조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다행인 것은 반도체의 특징이 우리의 장점과 아주 잘 부합한다는 점이다. 반도체 제조는 수백개의 공정이 수개월에 걸쳐 한치의 차질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반도체의 설계는 제품이 양산되어 나올 시점의 미래 흐름을 잘 읽고 미리 감안해 설계에 반영하는 실력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이 유기적으로 협업하고 미래에 가장 빠르게 대응하는 능력은 우리가 장기로 삼고있는 분야이다.
언젠가 한국에서도 퀄컴과 엔비디아 같은 팹리스 업체가 등장하고, TSMC같은 파운드리 업체가 성장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뿌듯한 일이다. 그런 기업들이 존재하는 미래의 대한민국은 세계 속의 강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컴퓨터 내 미세한 전자의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CPU는 실로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다. 일례로 요즘 데스크톱 PC 게임의 화면 구동은 오버클럭으로 초당 200프레임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풀HD 해상도만 해도 가로 1920개, 세로 1080개의 모두 207만개의 픽셀이 있다. 200프레임을 풀HD로 구현하려면 1초에 4억1,400만개의 색상을 표시해줘야 한다. 그와 동시에 사용자의 키보드, 마우스의 입력값을 부드럽게 게임내 동작으로 표현해야 하고, 생생한 음향을 재생해야 하고, 서버와 빠른 속도로 통신해야 하고, 고난이도 3D 렌더링까지해야 한다. 최근의 CPU는 저전력으로 낮은 온도를 유지하면서 그래픽카드, 사운드카드, 메모리, 네트워크카드, I/O커넥터가 얽힌 이 같은 복잡한 작업을 매끈하게 조율한다. 1초에 수억 개의 명령을 실수없이 내리는 CPU의 능력은 이미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CPU 시장에서는 2017년 2월 AMD가 1세대 젠(Zen) 아키텍처에 기반한 라이젠(Ryzen) CPU를 내놓은 이후 인텔과 AMD 양사간 경쟁이 치열하다. 2022년 2분기 기준 x86 아키텍처에서 인텔의 점유율은 63.5%, AMD는 36.4%이다(Statista). 2021년 3분기 60.2% 대 39.7%로 격차가 좁혀진 이후에 인텔이 격차를 벌리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다. 추격자 AMD는 2022년 하반기 일반적인 32MB 캐시 용량 대비 3배 이상 큰 3D V캐시를 탑재한 젠4세대의 라이젠 7000 시리즈 출시를 예고하면서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인텔은 2021년 11월 12세대 프로세서 앨더 레이크를 내놓으면서 2015년부터 무려 6년 간 이어온 14나노 공정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10나노 공정으로 넘어갔다. 자체적으로 반도체를 생산하는 인텔과 달리 경쟁사 AMD는 대만의 TSMC에 위탁 생산을 맡겨 2019년 라이젠 3세대부터 일찌감찌 7나노 공정을 도입한 상태이다. 2022년 라이젠 4세대에서는 5나노 공정까지 적용한다. 양사의 미세공정 싸움의 승패는 우리나라의 파운드리 3나노 미세공정 도전과도 연관되어 있어 귀추를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텔 입장에서는 2010년대 중반 미세공정 경쟁에서 뒤쳐진 것이 뼈아팠다. 2013년 인텔의 6번째 CEO로 취임한 브라이언 크르자니크(Brian Krzanich)는 2018년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기까지 5년 동안 CPU 공정 혁신을 멈추고 사업 다각화에 집중했다. 그는 당시 스마트폰 열풍 속에서 PC 기반의 CPU 시장은 점차 저물고 있다고 판단했다. 1983년 IBM이 인텔 x86아키텍처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택한 XT 컴퓨터를 출시하면서 PC 시장은 급격히 성장했고, 하드웨어 분야의 주인공은 인텔이었다. 인텔은 80년대 286(AT), 386, 486으로 표준을 주도했다. 1993년에는 펜티엄 프로세서를 출시해 추격자를 저만치 따돌렸다. 2006년에는 코어(Core) 프로세서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며 컴퓨터 제국을 공고히 했다. 2000년대 초반 AMD의 애슬론 CPU가 잠시 주목받기는 했지만 1991년부터 시작한 'Intel Inside' 슬로건처럼 인텔CPU는 보이지는 않지만 컴퓨터 품질의 보증서 같은 것이었다. CPU에서는 경쟁자가 전무한 상태에서 2010년대에는 시장 트렌드의 변화 자체가 인텔의 도전인 것으로 여겨졌다. 인텔 CEO 크르자니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사내 개발 인력을 CPU에서 떼어내어 신사업 발굴에 분배했다. 모바일AP, IoT, 인공지능, 클라우드 컴퓨팅, 드론, 웨어러블 기기, 자율주행 등 다양한 분야를 시도했지만 사실상 사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사이 공정미세화와 CPU아키텍처를 담당하던 기술자들은 다른 회사로 뿔뿔히 흩어졌다.
비슷한 시기인 2014년 AMD의 CEO로 취임한 리사 수(Lisa Su)는 죽어가던 회사를 살려 인텔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스스로도 뛰어난 반도체 기술자인 리사는 다른 계획을 모두 정리하고 AMD의 역량을 CPU 아키텍처 개발에 집중했다. 리사는 2020년이 되면 수 많은 기기가 연결되고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생성될 것이라 예견하며 그런 환경에서는 초고사양 컴퓨터와 관련 부품이 꼭 필요해질 것이라라고 내다보았다. AMD 최고의 엔지니어를 다시 불러모아 아폴로 13이라는 팀을 만들고 스스로도 개발에 참여한 끝에 젠 아키텍처를 완성해 2017년 2월 14나노 공정으로 제작한 라이젠 1세대를 출시했다. 가성비를 앞세운 라이젠 CPU는 2018년 4월 12나노 라이젠 2세대, 2019년 5월 7나노 라이젠 3세대 3000시리즈, 2020년 11월 7나노 라이젠 3세대 5000시리즈를 잇달아 성공시키며 인텔을 품질에서 위협할 정도로 도약했다. 2020년 출시된 하이엔드 모델인 5900X는 물리적 구분인 코어가 12코어에 이르고, 논리적 구분인 스레드는 24스레드에 달한다. 초당 연산속도인 부스트 클럭도 4.8GHz을 기록하며, 임시 저장 공간인 캐시의 용량도 70MB를 확보했다.
이 시기 인텔은 14나노 깎는 노인'이라는 놀림을 들어가며 고집스레 14나노 공정에 집착했다. 2015년 1월 5세대 브로드웰 코어 프로세서부터 적용된 14나노 공정은 2021년 3월 11세대 로켓레이크에 이르기까지 근 6년 동안 일곱세대에 걸쳐 인텔 CPU의 주력 생산 공정이었다. 원래 인텔은 2대 CEO인 고든 무어(Gordon Moore)가 주창한 무어의 법칙에 따라 오랜기간 '반도체 집적회로의 성능을 24개월마다 2배로 증가'시키는 정책을 실현했다. 2006년 코어 프로세서 출시 이후에는 '틱톡모델(Tik Tock)'을 적용해서 '틱'의 1년은 제조공정 미세화의 성과를 내고, '톡'의 1년간은 아키텍처를 개선해서 2년 주기로 CPU의 성능을 높였다. 그러나 2016년에는 이를 폐기하고 '파오모델(PAO; Process-Architecture-Optimization)'을 채택하면서 공정-아키텍처-최적화의 3년 주기로 발전 속도를 늦췄다. 2017년 8월 8세대에서는 10나노를 일부 도입하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주력은 14나노를 유지하면서 3년 단위의 공정 미세화 속도마저 떨어뜨렸다. 인텔은 x86아키텍처가 그 어떤 반도체보다도 복잡해 미세공정이 쉽지 않다고 진단했고, 10나노로 무리하게 넘어가지 않아도 안정적인 14나노의 최적화로 충분한 기능 구현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코어 수 조차도 거의 10년 정도 듀얼코어(2코어)를 유지하다가 2018년 10월 9세대부터야 옥타코어(8코어)로 변경하는 등 개발의 속도가 더뎠다. 이마저 그해 4월 라이젠 2세대가 인기를 끌자 급하게 방침을 변경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성능 게이밍과 유튜브 등 영상 편집 수요의 증가로 인한 2020년대의 PC의 변화 속도는 인텔을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2020년 7월에는 AI와 메타버스를 등에 업은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이 전통의 강자 인텔을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며 2017년 삼성이 인텔을 제치고 반도체 분야 1위를 차지한 이래 인텔의 위기를 상징하는 일이 되었다. 2022년 2월에는 AMD의 시가총액이 사상 처음으로 인텔을 능가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2021년 2월 취임한 CEO 펫 겔싱어는 첫 직장 인텔에서 30년을 근무한 엔지니어로서 인텔이 미래를 위한 기술 리더가 되야함을 강조했다. 그는 2025년까지 공정 성능 리더십으로 가는 확실한 길을 모색하는 혁신 로드맵을 가속할 것'이라며, '주기율표의 모든 원소가 고갈될 때까지 인텔은 무어의 법칙을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에 따라 2021년 11월 드디어 10나노 공정의 12세대를 출시했다. 이에 더해 2022년 하반기 7나노, 2023년 하반기 3나노, 2024년에는 20옴스트롱(2나노), 2025년에는 18옴스트롱(1.8나노)를 내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24년부터는 10의 마이너스 10승을 의미하는 옴스트롱 표기를 도입하면서 나노를 넘어서 새로운 기술을 선도하겠다는 상징성까지 부여했다.
인텔과 AMD의 경쟁은 이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이크로 칩을 처음 만들고, 상하 관계없이 수평적인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창조하고, 무어의 법칙이라는 IT 시대를 관통하는 목표를 제시한 '인텔'이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가 옅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사는 이제 순수히 '기술'과 '실력'으로 싸워야 한다. 약 1,000억달러(120조원)에 달하는 CPU시장에서 2021년 인텔은 790억달러의 매출(95조원), AMD는 160억달러의 매출(20조원)을 기록했다. 리사 수는 2022년 1월 CES에서 "PC는 2020~21년 3.5억대 출하되며 놀라운 성장을 했고 2022년은 PC산업에서 더욱 중요한 한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메타버스, AI를 필두로 한 서버 시장도 언제 다시 슈퍼사이클에 진입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시스템을 뒤집어엎는 위험성이 커서 되도록 기존 체계를 유지하는 보수성이 큰 서버 시장에서도 2022년 인텔이 출시할 사파이어 래피지의 성능이 기대에 못미치면 PC에서처럼 판도가 요동칠 가능성은 존재한다. 인텔과 AMD의 경쟁은 우리나라의 파운드리 물량 수주, DDR5 메모리 반도체 시장 확대, 반도체 패키징 신규 고객 확보와 같은 여러 방향성과 맞물린 중요한 주제이다. 시장 변화의 판도의 변화를 잘 읽고 적절하게 대응하면 우리에게도 더 큰 기회가 열릴 수 있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모바일 AP(Application Processor)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급격히 발전해 오면서 스마트폰 업계의 판도를 결정해온 핵심 부품이다. 2007년 1월 9일 애플의 맥월드2007에서 스티브잡스가 발표한 1세대 아이폰에는 삼성에서 90나노미터 공정으로 만든 412MHz 싱글코어 AP에 고작 수천만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 있었다. 2021년 9월 14일 출시된 아이폰13에는 TSMC에서 5나노미터 공정으로 만든 3.23GHz 헥사(6개)코어의 A15 Bionic AP 안에 150억 개의 트랜지스터가 집적돼 있다. 1세대 아이폰과 현재의 아이폰이 할 수 있는 일의 양과 속도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이며,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해 갈지도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컴퓨터에서 CPU가 그러하듯 스마트폰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AP는 한정된 공간, 전력, 온도범위에서 성능을 높여가야 하는 태생적 고민을 안고 있다. 우선 손에 들고 다니는 얇은 스마트폰 안에 들어가야 하므로 크기가 커질 수 없다. 5000mAh 남짓의 스마트폰 배터리로 동작해야 하므로 전성비도 뛰어나야 한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오랜 시간 손에 접해 있기 때문에 40도 이상 온도가 올라가면 바로 사용자에게 불안감을 준다. AP의 이런 악조건에 비하면 보드 위에 넉넉한 공간을 차지하고, 전원을 항상 연결한 채 작동하며, 사용자와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성능 좋은 수냉 쿨러까지 부착할 수 있는 컴퓨터의 CPU는 기술적 고민거리가 없어 보일 정도이다.
스마트폰 AP 팹리스 시장에서는 샤오미, 오포, 비보 등 중국 업체들이 원하는 종합 솔루션을 적시에 제공한 대만의 미디어텍이 2020년에 세계 1위로 올라섰고, 그 뒤를 고품질 AP의 오랜 강자 퀄컴, 칩에서도 이미 강력한 생태계를 구축한 애플이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유니SOC가 화웨이의 하이실리콘 인원을 영입한 후 크게 약진하여 그 다음이고, 삼성전자는 2011년 갤럭시S2에서부터 이용하고 있는 자체 생산 AP 엑시노스로 점유율 5위에 위치해 있다.
매년 발표하는 플래그쉽 스마트폰에 맞춰 그 전세대를 뛰어넘는 고성능 AP를 꾸준히 내놓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모바일 AP 팹리스(Fabless, 설계회사)들은 대부분 영국의 ARM이 만들어서 제공하는 아키텍처를 사용한다. ARM은 그간의 IP와 개발인력이 쌓여서 꾸준히 향상된 레퍼런스를 내어놓고 있지만 개별회사가 이것을 오롯이 감당하려면 엄청난 비용과 위험부담이 따른다. 대신 각 회사들은 ARM의 아키텍처를 구입하여 AP를 만드는데, 발전하는 공정에 맞게 하나의 칩 안에 여러 기능을 복합하여 최적화하는 것은 각 회사의 기술력에 달려 있다. TSMC가 미세공정을 고도화하며 훌륭한 칩 설계 능력을 갖춘 퀄컴과 애플의 AP를 대량으로 생산해주기 때문에 이들 회사의 제품은 압도적인 경쟁력을 유지한다. 미디어텍과 유니SOC도 TSMC 등 여러 팹의 도움을 받아 저가 스마트폰에 적합한 AP를 싼 값에 설계하기 때문에 각자의 해자를 공고히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갖춘 기업들과 경쟁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AP를 디자인해 최첨단의 미세공정으로 직접 제작해야 하는 삼성은 버거운 싸움을 하고 있다.
삼성의 AP는 공정에서의 초격차 전략으로 2016년까지 퀄컴의 스냅드래곤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5년에는 업계 최초의 14나노 공정으로 제작한 엑시노스7420을 갤럭시S6에 탑재했고, 2016년에는 엑시노스8890이 장착된 갤럭시S7을 전세계적으로 흥행시키며 시장을 뒤흔들었다. 2016년 7월에는 갤럭시노트7의 배터리 발화 사건이 있었지만 발빠르게 원인을 규명하고 제품을 전량 회수하는 발 빠른 조치로 삼성 스마트폰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공고히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2016년 당시 애플은 아이폰7과 아이폰SE가 전작과 차별화되는 요소가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스티브 잡스가 이룩한 혁신이 멈추었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소프트웨어에서는 애플 뮤직, 애플 페이 등 서비스를 내놓으며 앞서갔지만 하드웨어는 이제 삼성에 뒤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AP의 미세화 공정은 시장 방향을 반전시켰다. 2017년초 TSMC는 세계 최초로 7나노 공정을 시작했다. 2018년 9월 애플이 그 7나노 공정을 활용한 A12 bionic으로 아이폰XS을 내놓고, 2019년 9월 7나노 A13 bionic을 탑재한 아이폰11을 출시하며 분위기가 바뀌었다. 삼성도 부지런히 미세공정을 따라갔지만 미세화가 진행될수록 칩 설계에 애로를 겪었다. CPU를 비롯해 GPU, 메모리 등 주변장치들을 하나의 칩으로 통합하는 SoC(System on Chip)가 대세를 이루면서 설계의 난이도는 점점 높아져갔다. 삼성은 모바일 AP의 고도화를 위해 큰 투자를 이어갔으나 미국에 설치한 몽구스팀이 개발한 엑시노스를 장착한 갤럭시 S8, S9가 성능 대비 지나친 발열과 전력소모로 혹평을 받으며 2019년에 팀을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중국의 화웨이는 2018년 ARM을 기반으로 자체 설계해 TSMC 7나노 공정으로 생산한 기린 AP로 타사를 압도하며 자국 시장을 중심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기린AP는 업계 최초로 인공지능 연산을 위한 NPU를 탑재했고, 퀄컴과 비교해서도 높은 퍼포먼스와 전력효율을 보였다.
2018년부터 애플이 앞서간 AP의 구도는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AP칩-소프트웨어-제품의 우월한 설계력을 바탕으로 최적화를 이룬 애플은 보급형 스마트폰에도 고급 칩을 탑재할 정도로 강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애플이 판매하는 연간 2억대의 아이폰 뿐 아니라 아이패드, 맥북 등 주변 기기까지 이르는 칩 위탁제조 물량이 워낙 막대하다 보니 TSMC도 애플에 최우선으로 선단공정 물량을 배정하며 경쟁력 유지에 도움을 주고 있다. 퀄컴은 안드로이드 계열에서 최고의 칩을 계속 내어놓고는 있지만 2021년 삼성 파운드리의 5나노 공정으로 생산한 스냅드래곤888에서 발열 문제가 발생하자 다음 3~4나노 선단공정을 삼성이 아닌 TSMC에 맡길 수도 있다는 의도를 흘리며 한때 삼성을 긴장하게 하기도 했다. 화웨이는 보안 논란으로 2019년부터 미국의 제재를 받으며 경쟁력을 잃었다. 삼성은 엑시노스를 계속 고도화 하고 있으나 안정적인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2021년 엑시노스 2100을 탑재한 갤럭시S21은 발열과 뽑기 이슈로 논란을 일으켰다. 2022년에는 국내 출시 갤럭시S22에도 엑시노스 2200이 아닌 퀄컴의 AP를 탑재하면서 엑시노스에 대한 자신감을 시장에 보여주지 못했다. TSMC를 누르고 2022년 세계 최초로 가동하는 3나노 공정에서도 낮은 수율 문제가 흘러나오며 생산 부분에서도 불안감이 더해졌다. 결국 2022년 5월에는 2023년과 2024년에는 자체 AP 출시를 건너뛰고 2025년을 목표로 전용 AP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발표했다.
애플, 퀄컴 등 경쟁자는 막강하고, 그들이 쌓아온 경험은 점점 숙성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게도 AP는 놓칠 수 없는 분야이다. 스마트폰 뿐 아니라 전 분야에서 IoT 생태계가 번성할수록 작은 칩셋의 수요는 무궁무진하게 커질 것이다. 우리나라가 D램에 이은 차세대 먹거리로 육성하려고 하는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AP는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강력한 자체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고, 국내에서의 밸류체인도 탄탄하기 때문에 분명 다시 한번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NPU와 같은 인공지능칩의 발전과 연결되면서 AP 시장 판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AP가 세계 최고 수준의 AP와 경쟁하는 어려운 싸움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을 수 있도록 든든하게 응원해 주어야 할 것이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빅데이터를 활용한 AI 학습이 활발해지면서 GPU는 IT 산업의 핵심 부품이 되었다. 1990년대말 PC게임을 위한 그래픽카드로 시작해 2020년대 AI 프로세서에 암호화폐 채굴기로까지 변천해 온 GPU의 발전 경로에는 많은 이야기거리가 있다. 특히, GPU라는 용어를 직접 만들었고 GPU의 가능성에 대해 예언자에 가까운 통찰력을 보여준 엔비디아의 창업자 젠슨 황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GPU는 지금껏 병렬처리 컴퓨팅에 분야에서 강력한 생태계를 구축해 왔다. 앞으로 AI, IoT, 자율주행, 로봇의 발전에서도 GPU는 중요한 플레이어가 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중반까지의 PC게임에서는 CPU가 실시간으로 그래픽을 구현했다. 게임 이용자가 외부와의 연결 없이 본인의 컴퓨터에 저장된 이미 짜여진 미션을 수행하는 당시 게임에서는 CPU의 능력만으로 충분했다. LCD 모니터 이전 CRT 모니터 (Cathode-Ray Tube, 음극선관)에서 표현 가능한 그래픽의 한계도 뚜렷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다른 이용자와 시시각각 소통하는 화려한 온라인 게임이 유행하기 시작하자 고성능 그래픽이 중요해졌다. 먼저 3D용 API(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가 발전했다. MS에서는 1995년 윈도우용으로 DirectX를 출시했고, 실리콘그래픽스사는 1992년 OpenGL을 만들어 DirectX와 함께 그래픽 소프트웨어 시장을 양분했다. 하드웨어 분야에서는 그래픽 전용 칩이 속속 등장했다. 이들은 처음에 정식 명칭도 없이 그래픽카드, 3D 가속카드, 그래픽 가속기, 비디오카드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여러 칩들 중 3Dfx사가 개발한 부두칩이 시장을 휩쓸었다. 당시 인텔, NEC 등도 제품을 내놓았고, 신생업체인 엔비디아도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픽카드는 2D또는 3D의 이미지를 생성하는 프로세스인 렌더링(Rendering)에 쓰이는 부동소수점 계산에 특화되어 있다. 컴퓨터가 화면 상의 도형이 움직이는 모습을 부드럽게 나타내고자 할 때에는 도형의 모든 점(Vertex)에 대해서 신속한 이동 연산을 해야한다. 이 때 점의 좌표는 적합한 정밀도의 부동소수점(Floating point)으로 표현한다. 부동소수점은 이진법으로 표현할 때 숫자가 무한히 반복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정해진 비트 자리수에 소수점의 위치를 나타내는 부분(Exponent, 지수부)과 유효숫자를 나타내는 부분(가수부, Fraction)을 나누어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래픽카드는 점의 좌표를 빠르게 계산하기 위해 이런 부동소수점의 연산에 최적화된 장치다. 그래픽카드는 이 외에도 픽셀 색칠하기(Fillrate), CPU에서 오는 명령 처리(Command process), 내부의 수천개 코어들에 명령어 분배(Scheduling), 화면에 보여지는 영역의 정의(Viewport), 점 데이터 연속 출력(Streaming), 질감처리(Texel), 출력 왜곡방지(Anti-Aliasing)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픽카드의 최종 승자가 된 엔비디아의 초창기는 순탄치 못했다. 엔비디아는 1995년 NV1이라는 제품을 출시했다. NV1은 한 장의 카드로 2D, 3D, 음성 등의 멀티미디어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졌으나 당시 돈 300달러에 이르는 비싼 가격과 부족한 호환성으로 흥행에 실패했다. 엔비디아는 회사 존폐의 위기를 극복해내고 1997년 NV3로 재기에 성공했다. 레인보우식스, 언리얼, 퀘이크 등 당시 유행하던 게임 이용자들은 부두칩 같은 기존 제품을 능가하는 NV3의 성능에 열광했다. 기세를 몰아 엔비디아는 1999년 지포스256(NV10) 제품으로 지포스 브랜드를 내놓았고, 이를 세계 최초의 GPU로 홍보했다. GPU라는 단어가 세상에 처음 나온 순간이었다. 지포스256은 단일칩에서 TCL(Transform, Clipping, Lightning)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점의 이동연산(Trasform), 화면에 보이지 않는 픽셀의 연산 잘라내기(Clipping), 면에 비치는 조명연산(Lightning)을 동시에 처리하는 것이었다. 초당 1천만개 이상의 다각형(Polygon)에 대해 연산을 수행해 3D 게임 표현에 있어 경쟁사들을 압도했다. 당시 또 다른 라이벌인 ATI 테크놀로지는 2002년 라데온9700을 발매하면서 VPU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라데온은 한동안 지포스와 경쟁했으나 2006년 AMD에 흡수되었고, VPU라는 용어도 시장에서 사라졌다.
온라인게임이 e-스포츠 산업으로까지 성장한 2002년에 이르자 GPU는 CPU와 동급의 중요 장치가 되었다. PC 사용자들은 CPU 뿐 아니라 GPU를 어느 제품으로 선택할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젠슨 황 개인이 만들어낸 새로운 개념은 업계의 누구나 이해하고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젠슨 황은 GPU가 게임 외 시각 영역의 다양한 분야에 사용될 수 있다는 선견지명도 발휘했다. 엔비디아는 1999년 쿼드로(Quadro) GPU를 개발하면서 GPU 기능을 확장했다. 그 결과 오토캐드(엔지니어링 설계), 3D맥스(3D게임 제작, 설계도 활용한 건물 조형도 렌더링), 마야(영상편집, 3D 애니메이션), 앤시스(엔지니어링 시뮬레이션), 카티아(자동차 모델링) 등 다양한 산업용 3D 소프트웨어가 발전했다.
엔비디아의 식견은 생태계 구축에서도 두드러졌다. 엔비디아는 GPU가 지닌 범용 연산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소프트웨어 지원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G80아키텍쳐를 내 놓고, 병렬 컴퓨팅 플랫폼인 쿠다(CUDA)를 공개했다. 연산에 이용되는 GPU의 이름조차 멀티미디어가 아닌 일반 목적으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GPGPU(General Purpose GPU)로 새롭게 불렀다. 2007년에는 GPGPU 브랜드로서 테슬라를 출시했다. CUDA 이전에 GPU 프로그래밍은 아주 소수의 개발자들만이 할 수 있는 희귀한 기술이었다. CUDA는 C나 JAVA 같은 일반 프로그래밍 언어처럼 GPU라는 하드웨어를 손쉽게 다룰 수 있는 문법을 제공했다. 엔비디아는 CUDA의 기술지원을 계속하면서 개발자들을 끌어모았다. 큰 비용을 지불하면서도 오랜 기간 꾸준히 딥러닝 프레임워크를 제공하고, 관련 라이브러리(cuDNN)를 만들었다. 2010년대에 때마침 딥러닝이 개화한 것은 엔비디아의 큰 행운이었다. 2012년 이미지넷 대회와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을 거치면서 GPGPU를 이용한 인공지능은 어느덧 대세가 되었다. 오늘날까지도 GPU 기반의 AI를 개발할 때는 CUDA가 표준으로 인식되고 있다.
GPGPU가 강력한 이유는 단순계산에서의 빠른 속도 때문이다. CPU가 불과 십수개 정도의 코어로 구분된 반면, GPU는 수천개의 코어로 나누어져 있다.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연산을 처리하기 때문에 계산 속도가 압도적이다. 덕분에 CPU로는 수개월 걸리던 딥러닝의 대형 신경망 교육은 GPU로는 몇 시간 단위로 줄어든다. 복잡한 3D 프로그램도 CPU만으로는 몇 시간이 걸리면서 버벅되지만 GPU는 몇 분이면 족하다. 딥러닝에서 학습해야 하는 데이터의 양이 방대해지고 수행해야할 단순 연산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GPU의 진가는 더 높아진다. 일례로 2012년 AI분야 대가인 스탠퍼드 대학교 앤드류 응 교수는 구글과 함께 1,000대의 CPU 서버를 병렬로 연결해 '구글 브레인'이라는 신경망 시스템을 개발했다. 당시 서버 구입 비용만 50억원, 전력 소모량은 60만 와트에 이르렀다. 엔비디아는 자신들의 GPGPU 서버 3대면 이와 동일한 성능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앤드류 응 교수가 검증한 실험에서도 이는 사실이었다. 같은 속도에도 불구하고 GPU 서버 구입 비용은 다 해서 3,000만원 수준이었고, 전력 소모량은 4,000와트 밖에 안 됐다.
엔비디아의 GPU 생태계는 이처럼 강력했지만 한계도 있었다. 그중 두드러진 것은 폐쇄성이었다. 엔비디아의 CUDA는 오로지 엔비디아의 GPU만을 지원했다. 이에 맞서 인텔, AMD, 애플 등은 오픈소스인 OpenCL(Open Computing Language)이라는 범용 병렬 컴퓨팅 프레임워크를 지원했다. 그러나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GPU는 인텔의 주력 분야가 아니었고, 리사 수의 등장 이전의 AMD도 GPU에 신경쓸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기에 GPU 생태계에 대한 두 기업의 투자는 미미했다. 급기야 2014년 애플은 메탈 API로 넘어가면서 지지부진한 OpenCL 대열에서 이탈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현재까지도 GPU 생태계는 그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엔비디아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AI 연산을 위한 맞춤형 반도체의 등장도 엔비디아 GPU에는 위협 요소이다. 주문형 반도체(ASIC; Application-specific integrated circuit), 프로그래밍 반도체(FPGA; Field Programmable Gate Array), 신경망처리장치(NPU; Neural Processing Unit) 등이 그것이다. ASIC은 특정 시스템에 맞춘 가장 빠르고 최적화된 개발이 가능하다. FPGA는 완성된 제품의 하드웨어를 변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제품의 프로그램 변환만으로 회로를 수정할 수 있는 반도체이다. NPU는 딥러닝 연구에 최적화하기 위해 인간의 신경망을 모방해 만든 반도체이다.
GPU는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불어닥친 암호화폐 광풍 속에서 시장 생태계의 교란을 경험하기도 했다. 세계 곳곳에서 채굴에 GPU를 이용하면서 엔비디아의 매출은 두배 이상으로 무섭게 치솟았다. GPU의 품귀 현상이 빚어져 본연의 목적인 그래픽 작업에 사용할 물량조차 부족해졌다. 하지만 대형화된 암호화폐의 전문 채굴자들은 점차 GPU가 아닌 자체 반도체를 개발하면서 중고 GPU 물품을 쏟아냈다. 암호화폐의 가격 등락에 따라서도 시장에 풀리는 중고 수량이 춤을 췄다. 채굴에 혹사 당한 중고품들은 발열 등 성능에 문제를 보이면서 선의의 피해자들도 만들어냈다.
이런 복잡한 여건 변화 속에서 앞으로 점점 피어날 AI의 시대에 GPU의 위상이 어떻게 변화해갈지는 모두의 관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맞춤형 반도체가 계속 나오고 있지만 AI의 알고리즘과 쓰임새가 어떤 식으로 바뀌어 나갈지 미리 예측하여 맞춤형 칩을 사전에 설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범용의 GPGPU가 앞으로도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기존에 GPU가 깔아놓은 넓은 기반도 중요하다. 아마존 AWS, MS애저, 구글클라우드, 알리바바, 텐센트, IBM의 클라우드 서비스 등 대부분 빅테크의 데이터센터는 현재 GPGPU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CUDA를 활용한 엔비디아의 제품이 대세이다. 2019년 기준 AMD와 인텔의 GPU의 비중은 각각 한자리수에 머물 정도로 미미하다. 그러나 CPU에서 쌓인 노하우와 막강한 인지도로 인해 이들 업체들이 AI 시장을 어떻게 바꾸어갈지는 예측불허다. 또한, NPU, ASIC, FPGA 같은 전용 반도체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거듭해 GPGPU 시장을 얼마나 빠르게 잠식해 들어갈 지도 쉽게 짐작할 수 없다. 미래는 역시 알 수 없지만 AI 시장을 장악하는 자가 세상의 흐름을 지배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GPU는 AI는 물론이고 메타버스, 자율주행 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 그 변화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NPU(Neural Processing Unit : 신경망처리장치)는 AI의 학습과 연산을 위해 만들어진 전용 프로세서이다. 딥러닝은 입력값과 결과값 사이의 여러 층에 놓인 수많은 노드를 빽빽한 뉴런으로 연결한 후 최적의 결과값을 도출하는 각 뉴런의 가중치를 찾는 작업이다. 노드와 뉴런에서는 단순한 덧셈, 곱셈이 일어나는데 순간적인 연산량이 워낙 많다보니 반복적인 행렬 연산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하는 빠른 속도의 알고리즘이 필요하다. 더하기와 곱하기는 당연히 CPU도 할 수 있지만 CPU의 고급 자원은 여기에 쓰기에는 너무 아깝거니와 이런 일에 특화되어 있지도 않다. 대규모의 무식한 연산은 GPU도 일가견이 있지만 그래픽 처리가 주목적인 GPU의 기능도 사실 더하기 빼기보다는 복잡하다. NPU는 CPU와 GPU가 할 수 있는 여러가지 중 특정한 작업만을 뽑아서 가장 효율적으로 빠르게 처리하는 칩이다. 이런 단순 연산에 있어서는 GPU가 CPU의 10배 효율을 보이고, NPU는 그 GPU보다도 10배 더 효율적이다. NPU(Neural Processing Unit)는 그 이름처럼 사람의 신경망을 모방한 머신러닝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이다.
NPU는 여러 AI 분야 중에서도 순간적으로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받아들여 빠르게 처리해야하는 분야에 적합하다. 실시간으로 주변 데이터를 분석해서 극도로 안전한 선택을 해야하고 이에 대해 한 치의 지연이나 오차도 허락되지 않는 자율주행차의 반도체가 그 예이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쟁자보다 신속하게 AI 판단을 마쳐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주문을 넣어야 하는 금융거래 분야도 마찬가지다. 사용자에게 끊김없는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 고객서비스 분야도 이에 해당한다. 스마트폰에서 AI를 이용해 사진, 영상 속에서 인물만 찾아내 부각하는 작업을 할 때 조그만 지연이라도 있으면 폭발적 호응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AI 비서가 생활 속에서 가깝게 쓰이려면 어떤 말을 해도 잘 알아들어야 하고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티키타카도 가능해야 한다. 사용자 얼굴인식을 할 때에도 화면을 켜는 순간 실수 없이 인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빛이 있건 없건, 사용자가 잠에서 바로 깬 순간이건 말끔히 단장을 마친 순간이건, 정면에서 바라보건 아래에서 얼굴을 올려다보건 정확하고 실수 없이 얼굴을 알아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용자는 인식이 될지 안될지 몰라 각도와 시선 등 이런저런 것을 신경쓰지 않고도 편안하게 스마트폰 화면을 켤 수 있을 것이다.
NPU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적은 비용으로 극히 좁은 공간만을 차지한 채 저전력, 저열로 동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력효율은 AI 데이터센터처럼 막대한 전기를 소모하는 시설에서는 바로 수익과 직결될 수 있는 요소이다. NPU는 크기가 작기 때문에 극도로 좁은 칩 안에 CPU, GPU, Video, ISP(Image Signal Processor), DSP(Digital Signal Processor), Modem, NPU가 각각 들어가야 하는 스마트폰 AP 같은 집적 기기에 효과적이다. 인공지능만을 위해 너무 많은 공간을 써서 기기의 전체적인 공간배치가 흐트러지는 문제를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AI가 더욱 광범위하게 쓰이게 된다면 칩의 가격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 스마트글래스 같이 인체에 접촉하는 기기에서는 발열을 최소화하는 것도 중요한 조건이다.
현재 NPU는 스마트폰 AP에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2017년 8월 중국 화웨이는 10나노 공정으로 자체 개발한 AP인 기린970에 세계 최초로 NPU를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제품 출시는 애플이 앞섰다. 2017년 9월 애플은 뉴럴 엔진을 적용한 A11 바이오닉을 탑재한 아이폰8을 출시했다. 잠금 해제나 결제에 필요한 안면 인식, 이미지 처리, 안정적인 AR 구동 등에 NPU 기능이 활용되었다. 화웨이는 2018년 10월 세계 최초 7나노 공정 AP인 기린980을 탑재한 메이트20 스마트폰을 출시했는데 사진이 아닌 동영상에서 사람을 분리해내는 AI 기술을 선보여 가공할 연산이 가능한 NPU 성능을 뽐냈다. 삼성도 2018년 11월 엑시노스9820에 NPU를 장착해서 AI칩 개발에 발을 디뎠다. 이후 미중간 무역분쟁으로 화웨이가 미국 기술을 사용하는 TSMC에 위탁생산을 맡기지 못하게 되면서 2020년 9월 기린AP의 생산은 중단됐다. 반면 애플은 데이터센터를 거치지 않고 실시간 딥러닝만으로 3D 모델을 만드는 수준까지 칩 설계 능력을 향상시켰다. 덕분에 전력효율은 계속 하락했고, 다른 영역에 활용할 자원이 부족해지는 문제없이 AI 기술이 고도화될 수 있었다.
스마트폰 AP 분야에서의 두드러진 발전에도 불구하고 NPU가 독자적인 시장을 개척해 내기에는 아직 넘어야할 산이 많다. 그중 가장 큰 산은 GPU라고 할 수 있다. GPU의 절대강자 엔비디아는 2001년 최초로 프로그램이 가능한 GPU인 지포스3를 출시한 이후 관련 생태계를 계속 강화해 오고 있다. 2007년에는 CUDA를 개발해서 프로그래머들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수많은 툴을 축적해오고 있다. AI시대가 열리면서 이미 수많은 개발자와 라이브러리 등 탄탄한 생태계가 구축된 CUDA는 GPU의 유연함을 배가했다. 딥러닝의 알고리즘이 어떤 식으로 발달하던지 개발자들은 CUDA를 통해서 GPU에게 다양한 형태의 연산을 시킬 수 있었다. 이는 기술이 어떻게 발전할지 모르는 초기 단계에서 개발자들에게 상황 변화에 쉽게 대응할 수 있다는 안정감을 주고, 단단한 개발자 인프라는 다시 다양한 기술 발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반면, 아직 발전 초기 단계인 NPU는 범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미리 미래 기술 방향을 예상하고 칩을 설계해야 하다는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성공 가능성에 대한 개발자들의 부담도 크고 대규모 양산도 어려운 단점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성인식, 이미지 처리 등 여러 분야에서 거의 표준화에 가깝게 완성된 AI가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NPU를 생산하는 시장의 요구는 점점 커질 것이다. 구글 TPU, 엔비디아 텐서코어, 애플 뉴럴 엔진 등 빅테크 기업들마다 다양한 브랜드의 NPU를 내놓고 있다. TV, 냉장고, 청소기, 다리미 등에도 모두 AI가 적용되고, 인간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로봇이라도 나오는 순간에는 각각의 기기 특성에 맞게 개발된 NPU의 시장도 활짝 열릴 것이다. NPU가 그 이름처럼 인간의 신경망과 동일한, 혹은 그를 능가하는 형태로 발달할 때 이 세상이 변화하는 모습은 지금 우리의 상상을 훌쩍 초월할 것이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반도체 미세공정의 단위는 인간이 실용적으로 다루는 가장 작은 척도이다. 2022년 기준 첨단 반도체 선단공정의 선폭은 3나노미터이다. 우리가 미세먼지라고 부르는 입자의 최소 크기는 2,500나노미터 정도로 이의 800배이다. 너무 세밀해서 정복하기 어려운 바이러스의 직경도 가장 작은 것이 20나노미터 정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경우에는 100나노미터나 된다. 미세한 물질의 비교 대상으로 자주 활용되는 머리카락의 굵기는 자그마치 10만 나노미터(100마이크로미터)에 이른다.
1965년에 반도체의 집적도는 2년에 2배씩 증가한다고 예견한 무어의 법칙은 50년동안 진가를 발휘하다가 2016년 사실상 폐기되었다. 무어가 창립한 회사인 인텔이 그해 2월 12일 증권거래소 공시를 통해 미세공정과 아키텍쳐 개선을 번갈아 가며 2년마다 집적도를 높이는 틱톡(Tick-Tock) 방식을 폐기한다고 밝히면서였다. 인텔은 기존 2단계 사이클 대신 최적화를 추가한 3단계 PAO(Process-Architecture-Optimization) 모델로 기술 주기를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그만큼 미세공정 개발이 까다로워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텔은 2015년 1월 CPU 최초로 14나노 공정을 도입한 5세대 브로드웰을 출시했다. 2013년 6월 22나노 공정의 하스웰을 내놓은 이후 1년 6개월만으로서 무어의 법칙과 틱톡 모델을 지켜낸 것이었다. 그러나 14나노 미만의 미세공정에서는 더 이상 기존 속도를 견지하기 어려워졌다. 10나노 이하부터는 회로의 전자들이 서로 영향을 미쳐 잘못된 신호가 전달되는 상호간섭(Cross-talk)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전자가 회로의 벽을 뚫고 지나가는 터널효과(Tunnel effect)도 문제가 된다. 미세화가 물리적으로 한계에 부딪히는 종착점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미세공정이 난해해질수록 이를 극복해낸 회사는 엄청난 과실을 누리고 있다. 대만의 TSMC가 대표적이고, 삼성전자도 힘들지만 계속 최고의 자리에 도전하고 있다. 2015년 1월에는 삼성도 스마트폰 AP에서 최초로 14나노 공정을 도입하면서 인텔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해 3월에는 14나노 엑시노스7420을 탑재한 갤럭시S6를 성공시키며 기술의 초격차를 확인했다. 2016년 3월에는 14나노 엑시노스8890이 들어간 갤럭시S7이 흥행을 이어갔다. 당시 갤럭시S7의 일부 물량에는 삼성이 위탁 생산한 퀄컴의 스냅드래곤820칩도 들어갔다. 엑시노스8890은 동일하게 S7 모델 안에 탑재된 비교 테스트에서 오히려 스냅드래곤820보다 낫다는 평이 있을 정도로 높은 품질을 구가했다.
TSMC가 미세공정의 선두주자로 치고 올라간 것은 2017년 세계 최초로 7나노 공정 도입을 선언하면서부터였다. TSMC는 2018년에는 7나노 칩의 대량생산을 시작했고 스마트폰 AP의 절대 강자인 애플과 퀄컴 양사의 프로세서를 모두 수주하는 기염을 토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2017년 4월 업계 최초로 10나노 AP를 탑재한 갤럭시S8을 출시했지만 발열 문제를 잡지 못해 고전을 시작했다. S8의 AP는 퀄컴의 스냅드래곤835와 엑시노스8895였다. 퀄컴은 갤럭시S6, S7을 성공시킨 삼성의 구매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갤럭시S8의 물량 절반에 퀄컴 칩을 탑재한다는 조건으로 칩 생산 전량을 삼성전자 파운드리 10나노 공정에 위탁을 맡겼다. 그런 상황에서 10나노 공정 제품의 발열 문제는 발주자에게 불안함을 조성하는 일이었다. 다음해인 2018년 3월 출시한 갤럭시S9의 AP인 엑시노스9810이 혹평을 받자 불안감은 더해졌다. 당시 북미 판매 제품에 들어간 퀄컴의 스냅드래곤845도 삼성파운드리의 2세대 10나노 공정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엑시노스보다는 준수하다는 평가였지만 스냅드래곤835처럼 발열 이슈로 애를 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혁신이 멈췄다는 우려를 들었던 애플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8년 9월 애플은 TSMC의 7나노 공정으로 만든 A12 bionic 칩을 탑재한 아이폰XS를 출시했다. 아이폰 XS는 우수한 성능을 자랑하면서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발열 문제는 다소 있었지만 7나노의 속도와 전성비는 경쟁사의 다른 칩들을 압도했다. 같은 2018년 9월에는 중국의 화웨이도 TSMC의 7나노 공정에서 생산된 기린980 프로세서를 내놓으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대만의 팹리스 미디어텍과 협력한 기린 칩이 탑재된 메이트20은 중국 내 저가 스마트폰 업체로 인식돼던 화웨이를 단숨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시켰다. 삼성전자는 불화아르곤(ArF) 노광 기술을 쓰는 TSMC와 차별화해서 2018년 10월 세계 최초로 EUV(극자외) 노광 장비를 활용한 7나노 반도체를 내놓았지만 이미 다양한 고객사들과 함께 대규모 양산을 시작한 TSMC에는 뒤처진 다음이었다. TSMC는 최선단 공정은 애플, 화웨이, 퀄컴 등에 밀어주고, 뒷단의 구형 공정에서는 다양한 팹리스들의 물량을 풍부하게 수주하고 있었다. 퀄컴은 2018년 삼성전자에서 TSMC로 이동한 후 2019년 1월에 7나노 공정의 스냅드래곤855를 출시했다. 2015년 820, 2016년 821, 2017년 835, 2018년 845 모델로 오래 이어져 오던 양사의 협력 관계가 미세공정 때문에 잠시 끊어지는 시점이었다. AMD는 2017년 2월에 TSMC의 14나노 공정을 이용해 라이젠 1세대를 출시했고, 2018년 4월에는 12나노의 라이젠 2세대를 발표해 높은 가성비로 데스크톱 PC 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2019년 7월에는 7나노 공정까지 배정받은 라이젠 3세대를 출시하며 인텔 CPU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삼성과의 오랜 파트너였던 엔비디아도 2018년 9월 TSMC의 12나노 공정을 활용해 지포스20 시리즈(RTX20) 그래픽 카드를 출시했다.
위기 속에서 삼성전자는 2019년 4월 비전 2030을 발표하며 2030년까지 파운드리에서 세계 1위가 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러나 TSMC의 아성은 현재까지도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모양새이다. TSMC의 선단 공정은 더욱 앞으로 나가서 2020년 10월에는 스마트폰 최초로 5나노 공정을 도입한 아이폰12향 A14 bionic칩을 만들어냈다. 삼성은 2019년말 화성 공장에서 본격 생산을 시작한 7나노 EUV의 고객으로 퀄컴과 엔비디아의 일부 라인업을 다시 생산하는 한편, IBM의 서버, AMD의 그래픽카드 등을 위탁받았지만 여전히 애플 제품의 전량, 퀄컴과 엔비디아의 주력라인을 등에 업고 압도적인 물량을 동원하는 TSMC의 적수가 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2021년 1월에는 삼성전자가 5나노 공정에서 어렵게 다시 유치한 퀄컴의 스냅드래곤888에서도 발열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실험적인 선단공정에서 기본적 물량을 먼저 확보해주는 엑시노스 AP도 2017년부터는 불안정한 설계로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2021년 엑시노스2100은 발열뿐 아니라 기기별로 성능이 제각각인 뽑기 이슈까지 불러일으키면서 갤럭시S21이 전작S20과 더불어 판매량 3,000만대에 미달하게 된 주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2022년 퀄컴의 스냅드래곤8 1세대 제조로 양산을 시작한 4나노의 초미세 공정에서도 낮은 수율이 계속 골치를 썩이고 있다.
팹리스들은 팹리스대로, 파운드리는 파운드리대로 초미세화 공정을 선점하지 못하면 시장의 주도권을 놓치기 때문에 사활을 건 전쟁을 벌이고 있다. 반도체의 원조 챔피언 인텔도 이제는 도전자로서 과감히 변신하는 중이다. 인텔은 2015년 14나노 공정 도입 이후 근 6년에 가깝게 미세화를 이뤄내지 못하다가 2021년 11월에 12세대 앨더 레이크 CPU를 출시면서 비로소 10나노 공정에 들어섰다. 2022년 하반기 7나노, 2023년에는 3나노로 빠르게 선두권에 진입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내야 할 것이다. 인텔은 공정 미세화를 가속화하는 한편 2022년에는 퀄컴과 아마존을 고객사로 유치하며 여러 파운드리 업체 중 하나가 될 정도로 과거의 권위를 내려놓았다.
엔비디아는 2022년 3월 GTC2022 행사에서 데이터센터 슈퍼컴퓨터용 GPU인 H100, CPU인 그레이스를 공개하면서 TSMC의 4나노로 제조한다는 것을 경쟁력의 근거로 내세웠다. 오랜 협력사인 삼성도 좋은 파운드리라고 언급하긴 했지만 AI 시대를 이끌기 위해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두 제품에서 TSMC의 안정성을 우선하는 모습이었다. 엔비디아가 2022년 3분기 출시할 그래픽카드 RTX40도 90억 달러에 달하는 웃돈을 주고 삼성이 아닌 TSMC 5나노에 맡겼다.
인텔을 제압해야 하는 AMD는 2022년 TSMC의 6나노, 5나노에 공정에서 제조한 젠4세대 노트북용 라이젠6000, 데스크톱용 라이젠7000의 출시를 계획 중이다. 반면 AMD는 엔비디아와의 또 다른 혈투가 필요한 그래픽카드 부분에서는 삼성 파운드리와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애플은 2021년 공개한 TSMC의 5나노 기반 A15 bionic을 아이폰13 같은 플래그쉽 외에 저가용 기기에도 탑재하며 연간 수억개에 달하는 생산 물량으로 TSMC 선단공정 라인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TSMC 5나노 공정으로 만들어서 2022년 선보인 데스크탑용 M1 ultra 칩은 기존 M1 칩 두개를 연결하여 무려 1140억개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가공할 능력을 보여주었다. 최고급 CPU가 400억개, AP가 150억개 정도의 트랜지스터를 가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그 용량에 압도당할 수 밖에 없다.
삼성은 2022년 상반기 세계 최초로 3나노 파운드리를 양산할 계획을 잡고 있다. 시장에서는 낮은 수율로 삼성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이 자리까지 오른 삼성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삼성은 기존의 핀펫 기술을 고수하는 TSMC와 달리 도전적인 GAA(Gate All Around) 공정을 3나노부터 선제적으로 도입해 기술을 선도할 계획이다. 제조만 하는 TSMC와 달리 설계 능력도 충분히 보유한 삼성은 테슬라, 구글, MS, 메타 같이 자체 칩 제조에 뛰어드는 빅테크들과의 협력도 강화하고 있다. 파운드리 외에 D램과 낸드에서는 역시 압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고, 비메모리의 이미지센서에서도 1위 소니를 맹추격하고 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진검승부인 미세공정 경쟁은 우리편을 응원하면서 실시간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같은 흥분을 준다. 설계, 제조, 부품과 장비의 협업구조까지 잘 짜여진 우리가 글로벌 반도체 미세공정 싸움에서 승리해 나간다 해도 전혀 이상함이 없을 것이다. 향후 반도체 전쟁의 양상이 매우 궁금하고 기대된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미세공정 경쟁을 비롯한 반도체 시장의 변화에 있어서 애플은 앞으로의 산업 방향을 결정해나갈 핵심 기업이다. 2010년대 전까지만 해도 애플은 혁신적인 컴퓨터 회사이자 스마트폰 회사였지만 경쟁력 있는 반도체 기업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과 10년만에 애플은 어쩌면 인텔, 퀄컴, 엔비디아, 브로드컴을 능가할지도 모르는 강력한 반도체 생산자가 되었다. 무서운 것은 반도체 밸류체인 속에서 각각 한 축씩을 담당하고 있는 기존 강자들조차 칩-소프트웨어-완제품의 생태계를 완성한 애플을 당해내기가 점점 쉽지 않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애플 반도체 발전에는 몇 군데 중요한 장면이 있었다. 데스크톱용 CPU 분야에서는 2020년대에 의미있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2020년 6월 22일 애플 세계 개발자 회의(WWDC; Worldwide Developers Conference) 기조연설에서 팀 쿡 CEO는 연말에 출시할 자사 데스크톱인 맥(Mac)에 자체 설계한 CPU를 탑재함으로써 인텔 프로세서와 결별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새 CPU의 명칭은 '애플 실리콘'이라고 명명했다. 팀 쿡은 그 날을 '맥을 위한 역사적인 날'이라 평하고 애플 실리콘을 2년 안에 모든 제품으로 확대하겠다 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통합이 기본임을 강조하면서 애플 실리콘에 맞는 운영체제(macOS Big Sur)도 공개했다. 인텔x86기반으로 제작된 프로그램을 애플에 맞게 전환하는 도구(Rosetta 2)와 개발자 대상 키트(DTK; Developer Transition Kit)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발표의 후속조치로 2020년 11월에는 TSMC 5나노 공정을 기반으로 만든 맥용 M1 프로세서가 공개됐다. 팀 쿡의 발표대로 M1 프로세서는 맥북에어, 맥북프로(노트북), 맥미니(데스크톱), 아이패드에어, 아이패드프로(태블릿), 아이맥(모니터 일체형 데스크톱) 등 애플의 각종 제품에 탑재되었다. 애플은 2021년 10월에는 M1칩 보다 강력한 M1프로, M1맥스칩도 내 놓았다. 2022년 3월에는 실리콘 인터포저 위에서 M1맥스칩을 2개로 연결한 대면적 M1울트라칩을 담은 맥스튜디오(데스크톱)를 출시했다. M1울트라는 1,140억개의 트랜지스터, 16개의 고성능코어, 4개의 고효율코어, 64개의 GPU코어, 32개의 뉴럴엔진코어를 장착해 그 수치만으로도 고사양 그래픽, 영상 작업을 하는 사용자들을 열광시켰다.
스마트폰 AP에서는 이미 2010년대부터 꾸준한 움직임이 있었다. 애플은 2010년 자사 최초로 자체설계(In-house design)한 SoC(System on Chip)인 A4칩을 만들어 아이폰4에 탑재했다. 그동안 칩을 전적으로 의존해 오던 삼성전자 같은 외부 반도체 회사에서 벗어나 진정한 팹리스로서 발돋움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애플은 2007년 아이폰을 세상에 처음 내놓았을 때 ARM11아키텍처에 기반해서 삼성이 설계·제조한 APL0098칩을 사용했다. 2008년 아이폰3G, 2009년 아이폰3GS에도 삼성 설계 칩이 들어 있었다.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이 독특하고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애플 스스로 AP를 제작해 제품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기 비전 아래 애플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가 될지도 모르는 반도체 투자를 감행했다. 현재까지 애플 실리콘을 책임지고 있는 조니 스루지(Johny Srouji)가 2008년 애플에 입사했을 때 애플에는 삼성 같은 여러 업체로부터 구매한 아이폰용 칩을 통합하는 엔지니어 40여명으로 구성된 전문 팀이 있었다. 애플은 2008년 4월 P.A.Semi라는 실리콘밸리의 팹리스 기업을 인수해 팀의 인원을 150명으로 늘린 후 매년 수십억달러(수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투입했다. 그 결과로 2010년 탄생한 애플의 첫번째 자체 설계품인 A4칩은 사람의 눈으로 픽셀을 확인할 수 없는 고밀도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구현해 아이폰의 경쟁력을 높였다.
A4칩으로 포문을 연 애플 칩은 매년 출시된 아이폰의 최신 기종에 맞춰 향상을 거듭해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의 AP가 되었다. 처리속도가 매년 몇 십%씩 향상되었고, 그래픽 처리능력도 몇 배까지도 올라갔다. 집적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트랜지스터의 개수도 점점 늘어났다. 2014년에서 201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퀄컴의 스냅드래곤과 삼성의 엑시노스가 더 낫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2018년 7나노 공정의 A12 바이오닉칩을 내 놓으면서는 애플 AP의 평가가 앞서기 시작했다. IT 시장 기준으로는 비교적 긴 기간인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애플이 단기수익만을 바라보지 않고 장기적인 전략과 뚝심으로 AP를 발전시켜 온 점은 충분히 높이살 만하다.
자체 설계 AP가 나온 다음해인 2011년 출시된 아이폰4S에는 인공지능 비서인 시리(Siri)가 탑재되었다. 보통 아이폰의 이름에 붙는 S, C 등 이니셜의 의미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 애플이 4S의 'S'는 시리를 뜻한다고 밝힐 정도로 의미를 둔 변화였다. 시리는 훗날 애플 AP에 들어간 AI연산용 NPU와 만나 그 성능을 더욱 높였다. 하지만 2011년 아이폰 4S에 탑재된 A5칩은 연초에 나온 아이패드2 모델에 이미 들어가 있던 칩으로서 칩 자체가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A5칩은 전작 A4칩에 비해 속도와 성능이 크게 향상되었다는 점을 개선의 성과로 강조했다.
2012년 애플은 아이폰5에 탑재한 A6칩을 통해 자체적으로 CPU코어를 개발하는 큰 도약을 했다. 코어는 AP안 CPU에서 데이터의 연산처리를 담당하는 핵심 부분이다. 이전까지 애플은 ARM이 개발한 아키텍처 라이센스를 그대로 구입해서 CPU를 설계했다. 그러나 A6칩부터는 ARMv7의 아키텍처를 바탕으로 개발한 ARMv7-A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하여 CPU의 코어를 구축한 것이었다. 아키텍처 개발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애플은 이후 칩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2013년 아이폰5S에서는 스마트폰 업계 최초로 64비트를 채택한 A7칩을 내세웠다. AP에 탑재한 트랜지스터의 수도 10억개(1billion)를 돌파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경쟁사들도 애플 반도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니 스루지가 꾸리고 있는 개발 팀도 2010년 자체설계 A4칩부터 2013년 64비트 A7칩에 이르기까지 한발한발 나아가는 실적을 증명하면서 업계의 이목을 끌었다. 64비트칩으로 무장한 아이폰5S는 당시 화제를 일으켰던 초당 120프레임(120fps) 이르는 강력한 연사 카메라 및 높은 인식도의 지문인식 기능을 선보였다. 당시까지 애플은 설계는 직접하지만 제조는 여전히 오랜 파트너였던 삼성에 맡기고 있었는데, 아키텍처를 장악한 애플은 삼성에 알리지 않고도 그런 신기능을 칩 속에 넣을 수 있었다.
2014년에 애플은 아이폰6에 TSMC와 처음 협력해 제조한 A8칩읕 선보였다. A8칩도 이전 세대에 비해 속도, 그래픽이 향상되고, 전성비도 크게 개선되었다. 트랜지스터의 개수는 20억개(2billion)로 늘어났지만 칩 면적은 13% 감소해 89㎟에 불과했다. 당시 TSMC는 삼성보다는 다소 늦은 20나노미터의 제조 공정을 이용했는데 '우리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모토로 애플의 환심을 샀다. 이전 해인 2013년 삼성 스마트폰은 30%를 넘는 점유율로 세계 시장 1위를 차지하며 애플을 강력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핵심 칩 제조를 삼성 반도체에게 맡긴다는 것은 애플에게도 부담스러운 일이라는 점을 파고든 것이었다.
이 때문에 2015년 아이폰6S에 탑재된 A9칩은 애플이 삼성과 협력한 마지막 칩이 되었다. A9칩은 삼성14나노 공정과 TSMC 16나노 공정으로 동시에 제작했다. A8칩에 비해 향상된 성능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스마트폰 기기 자체의 혁신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지금 스마트폰의 기능에 만족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성능 업그레이드에 큰 돈을 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하며 애플의 향후 사업을 어둡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한 시각 속에서 2016년 아이폰7과 2017년 아이폰8은 혁신이 멈추었다는 비판을 들어야 했다. 아이폰7에 탑재된 A10퓨전칩은 TSMC의 16나노 공정으로 제작되었고, ARM의 big.LITTLE 쿼드 코어 디자인을 채택했다. 고난이도 작업을 처리하는 2개의 고성능코어와 가벼운 작업을 높은 전성비로 처리하는 2개의 고효율코어를 나누는 방식이었다. 아이폰8 및 이어진 아이폰X에 탑재된 A11바이오닉칩은 세계 최초로 AP안에 NPU인 뉴럴엔진을 탑재했다. 2개의 고성능코어, 4개의 고효율코어를 구분하는 헥사코어 방식을 적용했다. 그간 애플 AP 내의 PowerVR GPU로 협업해오던 영국의 이매지네이션사와 결별하고 최초로 자사 디자인 GPU를 쓰는 변화도 있었다. 각 칩들의 성능은 전작보다 크게 향상했고, 뉴럴엔진, 애플 GPU는 AP에 대한 애플의 통제력을 증가시켰지만 소비자에게 기존 제품과의 차별성을 느끼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거기에 배터리가 부풀어 오르는 문제까지 발생하고 비슷한 시기 삼성의 스마트폰이 상대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시장의 회의감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애플칩의 위력은 서서히 발휘되기 시작했다. 사실 2018년 출시한 아이폰XS는 고가 논란에 시달렸고, 2019년 출시한 아이폰11도 '한방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뒷면에 설치한 3개의 카메라 모듈이 '인덕션 같다'는 조롱을 들었다. 그러나 업계최초로 TMSC의 7나노 공정으로 제조한 애플칩은 사용자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했다. 2018년에는 A12바이오닉칩, 2019년에는 A13바이오닉칩을 출시하였는데 각각 이전 세대 대비 더욱 강력하게 소비자의 마음을 끌었다. 대화면에 어울리는 강력한 그래픽, 부드럽게 움직이는 멀티태스킹, 고사양 게임도 충분히 소화하는 속도, 우수한 전성비에서 나오는 긴 배터리 수명, 안정적인 발열, AI로 한층 더 향상된 카메라 기능 등은 충성 고객을 공고히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2020년 아이폰12는 역대급 판매량을 경신했다. 아이폰12에 탑재된 A14바이오닉칩은 업계 최초로 5나노 공정으로 제작되었으며, 118억개(11.8billion)의 트랜지스터, 6코어 CPU, 4코어 GPU, 16코어 NPU를 구현했다. 2021년 출시한 아이폰 13에서도 그 인기는 여전히 이어졌다. 아이폰13의 A15바이오닉칩은 150억개(15billion)의 트랜지스터, 6코어 CPU, 5코어 GPU, 16코어 NPU로 그 성능을 한층 더 높였다. 이제 A15바이오닉칩은 아이폰의 저가형 모델 및 아이패드에도 탑재되어 막대한 제조 물량을 확보했다. 덕분에 TSMC의 선단 공정을 독점하고 더 높은 이익을 TSMC와 애플에 가져다 주었다.
스마트폰AP와 그 안에 들어가는 아키텍처, CPU코어, GPU, NPU를 모두 설계하고, 그것을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를 지배하며, 그 모든 것이 담긴 완제품의 브랜드 파워까지 거머쥔 애플의 향후 행보는 쉽게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 지금 윈도우나 안드로이드 기반 운영체제에서 사람들이 익숙하게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애플의 제품에서도 완벽히 호환될 수 있도록 만들어 낸다면 일인 다역으로 수많은 IT 기업을 대체하고 있는 애플의 경쟁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반면, 중요한 칩과 제품의 제조를 대만 TSMC와 폭스콘에 독점하다시피 맡기고 있는 구조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제품 우위에 심각한 손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어느 방향이 되었건 우리 삶과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애플의 향후 발걸음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022년 5월 업데이트)
우리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83년 첫 출발 이후 40년의 긴 세월 동안 기술혁신의 흐름을 예리하게 읽어가며 성장해왔다. 처음에는 우리 스스로조차 선두주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못 했겠지만 80~90년대 개인용 컴퓨터(PC) 시대의 개화를 거치며 어느새 일본을 넘어섰다. 80년대 당시 일본 히타치, 도시바, NEC는 기업 서버용 대형 컴퓨터 반도체 시장의 절대 강자였다. 신출내기 도전자였던 삼성전자는 막 태동하는 PC 시장에서는 일본 반도체처럼 수명이 25년씩 보장되는 하이엔드(High-end) 제품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을 간파했다. 성능은 조금 떨어져도 개인이 구입할 정도로 값이 싸고 슬롯에 바로 꽂아 조립과 업그레이드가 쉬운 제품이 PC에서는 더 적합했던 것이었다. 2000년대에는 D램의 원가가 극한까지 내려가며 치킨게임으로 치닫는 상황에서도 공정의 초격차 전략을 유지하면서 시장 지배자의 위치를 오히려 공고히 했다. 2000년대 중반 애플의 아이팟이 인기를 끌 때는 크기가 작고 빠르며 전력소모가 적은 저장장치인 낸드 플래시 메모리(Nand Flash Memory)를 적극적으로 공급하며 D램에 버금가는 수익원을 발굴했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았을 때에는 모바일로 전환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재빠르게 눈치챘다. 아이폰에 들어가는 AP(Application processor)를 위탁받아 또 다시 신시장을 일궈냈고, 갤럭시S2부터는 엑시노스(Exynos)라는 자체 AP까지도 개발했다. 2010년대 이후에는 이커머스, 클라우드, AI 시장의 확장에 민첩하게 적응해서 아마존, 구글, 퀄컴, 엔비디아, AMD 등 세계 최고 빅테크 기업들의 물량을 대량으로 수주하며 글로벌 메이저 플레이어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2020년대에 접어든 지금 우리나라 반도체는 3나노 이하 초미세 공정,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에서의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뉴로모픽(Neuromorphic)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준비해 가고 있다. 뉴로모픽은 뉴런(Neuron)과 형태(Morphic)의 합성어로서 인간의 뇌를 모사한 병렬처리 반도체이다. 현재 컴퓨터는 1945년 헝가리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폰노이만이 설계한 아키텍쳐를 계승하고 있다. 연산을 담당하는 처리장치, 프로그램을 제어하는 컨트롤유닛, 일시 데이터를 저장하는 메모리, 영구 데이터를 저장하는 스토리지, 인간과 소통하는 입출력 장치가 순차적으로 신호를 주고 받는 직렬처리 방식이다. 특히 PC에서는 CPU(Central Processing Unit), D램, 저장장치(HDD 또는 SSD)의 위계구조 속에서 해당 데이터를 얼마나 오래 갖고 있어야 하느냐를 판단해 적절한 위치로 주고 받는 작업을 계속한다. 이렇다보니 전자의 이동 중 병목현상을 피할 수가 없었다.
뉴로모픽 반도체는 프로세서와 메모리 반도체를 하나로 융합해 사람의 뇌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는 반도체를 말한다. 우리 뇌는 약 1,000억개의 뉴런(신경세포)으로 구성되어 있고, 뉴런은 약 100조개의 시냅스(신경망)을 통해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뉴런은 전기신호를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시냅스에서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뉴런 사이사이를 연결한다. 뇌는 이와 같은 과정을 활발하게 거치며 인지, 기억, 학습, 사고, 연산, 추론, 창작 등의 고차원적인 정보를 처리한다. 뇌는 엄청나게 에너지 효율적인 기관이다. 작은 전구를 하나 켜는 정도인 20W의 전력만 있으면 운전을 하고, 예술 작품을 만들고, 없던 이야기를 창조해 낸다. 보통 컴퓨터가 80W의 전력을 소모하는 데 비해 훨씬 적은 에너지로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뉴로모픽 반도체는 이와 같은 뇌 신경망을 모방해서 정보를 한 장소에서 동시에 연산하고 저장하는 반도체를 말한다. 대용량 데이터를 병렬로 연결해 복잡한 연산, 추론, 학습이 가능하다. 연산과 저장을 동시에 처리하기 때문에 전력 소모도 적고 속도도 빠르다. 전력 소모와 연산 속도가 중요한 자율주행, AI, 로봇과 같은 분야에서 활발한 활용이 기대된다.
뉴로모픽 반도체는 2014년 IBM에서 트루노스(TrueNorth)를 만들면서 가시화됐다. 2017년에는 인텔에서 로이히1(Loihi1)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2020년 3월 인텔은 로이히 칩 768개를 합쳐 포호이키 스프링스(Pohoiki Springs; Pohiki는 하와이의 지명으로 작은 구멍이라는 뜻)라는 연구 시스템(Research system)을 개발해 네이처 머신 인텔리전스지에 발표했다. 포호이키 스프링스는 1억개의 뉴런을 구현하여 동물이 냄새를 맡을 때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신호를 복사해 생쥐 정도의 후각 능력을 선보였다. 2021년 9월에는 로이히1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최대 10배에 이르는 로이히2 칩 또한 선보였다.
또 하나의 큰 변화가 태동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16년부터 미국 스탠포드 대학과 함께 저장과 정보처리를 동시에 하는 반도체 개발을 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19년부터 하버드대의 한국인 과학자들과 협력한 연구를 진행했고, 뇌를 '복사'해 '붙여넣는' 뉴로모픽 반도체에 대한 연구 결과를 21년 9월 네이처 일렉트로닉스지에 게재했다. 삼성전자는 뉴런들의 전기신호를 나노 전극으로 측정하여 뉴런 간의 연결지도를 ‘복사’한 후 복사된 지도를 메모리 반도체에 그대로 ‘붙여넣는’ 형태의 뉴로모픽칩을 제안했다. 측정된 신호로 메모리 플랫폼을 직접 구동하기 때문에 신속하게 신경망 지도를 내려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칩 내에서 100조개의 시냅스를 구현해야 하기 때문에 3차원 플래시 적층기술을 이용해 집적도를 극대화하고, TSV(실리콘관통전극)로 3차원 패키징까지 적용하겠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이르면 4~5년 뒤 실험적으로 뉴로모픽 반도체를 도입할 수 있다는 일정도 밝혔다. 뇌에서 오고가는 변화무쌍한 전기신호를 실시간으로 '측정'하고 반도체 칩에 그대로 '복사'할 수 있다는 것은 쉽사리 상상할 수 없는 기술이다. 뉴로모픽 반도체로의 새로운 대전환이 일어날 것인지, 과연 그것을 우리가 선도하여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지 가늠해 보노라면 미래를 예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실감할 수 있다. (작성 2022.2.20)
메타버스, AI의 시대를 맞아 반도체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세계 유수의 빅테크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데이터센터를 확장하고 있다. 이 현상은 2016~18년 반도체 빅사이클에 비견될 만하다. 당시 스마트폰 수요와 서버용 데이터센터 구축으로 반도체 산업은 유례없는 호황을 경험했다. 아마존, MS, 구글, 넷플릭스 등 시장 선도자들은 막대한 투자를 감행했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률이 70%에 육박할 정도로 급격한 수익 상승을 맛봤다.
5년 전 데이터센터 붐을 온라인쇼핑, 플랫폼, 클라우드가 이끌었다면 이번에는 메타버스와 AI까지 가세했다. 애플, 구글, 메타 등은 스마트글래스 같은 AR, VR 기기를 바탕으로 다가올 메타버스 시대의 새로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리는 중이다.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넘나드는 방대한 콘텐츠를 부드럽게 흐르게 하려면 엄청난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미리 구축해 놓아야 한다. 메타버스 외 AI 분야에서도 데이터센터 확보는 중요하다. 빅테크 기업들은 수천억개 파라미터의 독자적인 초거대 AI 구축 경쟁을 벌이는 한편, AI 클라우드를 통해 다수가 이용할 수 있는 솔루션을 개발하고 보급하고 있다. 빅데이터가 이미 준비되었다 해도 기업이나 개인이 AI 관련 인프라를 스스로 구축하는 것은 부담되는 일이다. 큰 비용을 들여 서버를 구입해야 하고, 몇 주씩 걸려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시켜야 하며, 간헐적 업데이트 외에는 서버를 상시 활용하는 것도 어렵다. 이 때문에 자체 구축 보다는 최신의 알고리즘과 AI 칩으로 무장한 빅테크 클라우드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15년 공개한 구글의 텐서플로우나 16년 페이스북에 의해 개발돼 17년 MS와 협업을 시작한 파이토치가 대표적인 AI 클라우드 시스템이다. 네이버와 카카오 등 우리나라 기업들도 AI 클라우드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다.
향후 자율주행차, IoT, 로봇 시장까지 본격적으로 발화한다면 데이터센터의 수요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 안에 들어가는 첨단 반도체의 수요도 폭증할 수밖에 없다. 데이터센터가 집어삼키는 전기의 양이 워낙 엄청나기 때문에 미세공정으로 제작해 전자의 이동을 최소화한 저전력 반도체는 곧 기업의 경쟁력이 된다. 데이터 학습에 들어가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는 AI 전용 프로세서를 설계하는 것도 필요하다. 일례로 2016년 발표한 구글의 TPU(Tensor Processing Unit)는 딥러닝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 GPU를 이용한 학습 속도의 10배를 구현해 며칠씩 걸리던 분석을 몇 시간으로 단축시켰다. 각 기업별로 AI 반도체의 설계 개념과 용처가 다 다르기 때문에 최첨단 공정으로 이를 제작해 줄 파운드리 업체의 역할도 점점 커져간다.
이처럼 반도체 성능을 고도화해 감에 따라 패키징 기술에 대한 관심도 더불어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 자체의 초미세공정 경쟁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일례로 회로 선폭을 줄이면 줄일수록 터널링 현상이라는 문제점이 생긴다. 터널링은 양자역학에서 원자를 구성하는 핵자나 전자가 자신을 묶어놓는 핵력의 포텐셜 장벽보다 낮은 에너지 상태에서도 확률적으로 원자 밖으로 튀어나가는 현상이다. 2022년초 삼성전자가 구현할 예정인 3나노 이하의 공정에서는 터널링 현상이 발생해 회로 안의 전자들이 제멋대로 달아나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무어의 법칙(Moore's Law)을 실현한 미세공정 개선이 난관에 부딪힌 상태에서 반도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패키징 기술의 발전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반도체 패키징은 완성된 반도체가 훼손되지 않도록 바깥에서 감싸 충격에서 보호하고 외부와 연결되는 배선망을 설치하는 작업이다. 이 때 배선망은 반도체 동작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하고 다른 기기와 전기신호를 주고받는 역할을 한다. 배선의 설계와 포장 방식에 따라 같은 반도체라도 성능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에 기업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고안해 이를 개선하고 있다. 삼성전자, TSMC, 인텔은 21년 기준 1,000개 정도인 배선 단자를 10만개까지 늘리는 패키징 기술을 개발중이다. 삼성전자는 2021년 5월 CPU, GPU와 같은 시스템반도체 한 개와 고대역폭 메모리 반도체 네 개를 묶어 하나의 패키지로 구현한 패키지 기술(I-큐브4)을 개발했다. 여기서는 보통 반도체의 기판으로 많이 쓰는 초록색 인쇄회로기판(PCB; Printed Circuit Board)에 반도체들을 직접 올리는 대신 인터포저(Interposer)라는 실리콘 중간층 위에 이것들을 올려 마치 하나의 반도체처럼 동작하도록 한다. 절연체 몰드 없이 반도체가 인터포저에 직접 접하는 독자구조이기 때문에 열 발산이 쉬워 성능과 사용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발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반도체와 기판 사이에 L자 모양의 다리(Lead)를 설치하는 방법(TSOP; Thin Small Outline Package) 대신 칩에 구멍을 뚫어 납땜 구슬(Solder ball)을 삽입해 중간 기판(Substrate)과 연결하는 방식(BGA; Ball Grid Array)은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상용화되었다. 패키징에 따라 전체 기기의 효율이 좌우되다 보니 관련 시장도 확대 추세이다. 미국 코네티컷에 위치한 시장조사기관 가트너에 따르면 패키징 시장 규모는 2020년 488억달러(59조원)에서 2025년 649억달러(78조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메타버스, AI, 자율주행차, IoT, 로봇 등의 성장에 따라 전용 칩의 종류가 다양해지면 다양해질수록 패키징 방식에도 더욱 창의적인 해결이 요구될 것이다. 용도에 따라 상이한 전기 신호의 특징을 이해하고 재료와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지금은 생각하지 못하는 혁신적인 방법이 나올 것이다. 하루 종일 착용해도 발열이 없는 스마트글래스, 영하 40도와 영상 40도를 넘나드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이상없이 동작하는 자율주행차는 고성능 칩만으로 달성될 수는 없고 노련한 패키징 기술이 가미되어야 한다. 이 역시 반도체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도전력과 창의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분야이다. (작성 2022.2.6)
고성능 컴퓨팅(HPC; High-performance computing), 인공지능(AI), 지능형 로봇 등의 발전에 따라 점차 수요가 늘어날 반도체 패키징 분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된 줄임말에 익숙해져야 한다. 반도체 패키징의 목적은 다양한 칩과 부품들을 하나의 기판 위에 안전하게 일체화시키면서도 주변 시스템과의 전기 전달 효율을 극대화하고 발열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목적은 명확하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아이디어는 워낙 다양하다 보니 반도체 패키징에서는 수많은 공정들이 등장해 왔다. 각 방법의 특징에 따라 독특하게 작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패키징에서 어떤 시도들이 있어왔고 앞으로 어떤 진전이 일어날지 파악하려면 그 명칭들을 한번씩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반도체 패키징에서는 여러 개의 칩과 부품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자기기가 고도화될수록 개별 부품들을 하나의 모듈로 단순화하고자 하는 수요는 점점 증가한다. 제품의 양산 및 관리를 쉽게 해줄 뿐 아니라 기기 성능 극대화에도 유리하기 때문이다. 많은 칩과 부품을 결속해 하나의 소자로 만들어낸 것을 SiP(System in Package)라고 한다. SiP와 비슷한 말로 2021년 삼성전기에서는 SoS(System on Substrat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패키징할 때 반도체와 인쇄회로기판(PCB; Printed Circuit Board) 사이에 놓이는 보조기판인 서브스트레이트(Substrate) 위에 다양한 칩과 부품이 체계화되어 있는 형태를 일컬은 말이다. 여러 개의 칩을 적층해 하나의 소자로 통합하는 기술은 MCP(Multi Chip Package)라 부르기도 한다. SoC(System on Chip)는 CPU, GPU, NPU 같은 반도체들이 하나의 작은 칩으로 구현된 형태를 말한다. SiP, SoS, MCP, SoC 등의 용어들은 대상과 방식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 다수의 칩과 부품 등을 하나로 묶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전통적인 패키징은 칩과 기판을 전선으로 연결하는 TSOP 방식이었다. 금속기판인 리드프레임(Lead Frame) 위에 칩을 올리고 와이어본딩(Wire Bonding) 방식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전선을 통해 신호가 전달되다보면 속도와 안정성에서 한계가 있으므로 플립칩(FC; Flip Chip) 방식이 도입되었다. 칩(Chip)을 뒤집어(Flip) 기판과 마주보게 하고 칩 위에 형성된 솔더범프(Solder Bump, 납땜 돌기)를 기판의 배선용 전극에 직접 접합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와이어본딩에 비해 신호 경로도 짧아지고 더 단단하게 결합되며 결합물의 크기도 작아질 수 있다. 접합면 전체를 활용하므로 전기의 입출력(I/O) 단자도 1,000개 가깝게 설치할 수 있다. 반도체 공정이 점점 고도화됨에 따라 28나노 이하의 미세 공정에서는 솔더범프 대신 구리(Cu pillar bump)를 일부 사용하는 등 새로운 공법도 개발되었다. 와이어본딩은 현재에도 저사양 제품에 여전히 쓰이고 있으며 플립칩은 고성능 제품에서 주로 활용된다. 플립칩은 와이어본딩보다 많게는 2배가량 단가가 비싸지만 전체 반도체 웨이퍼 생산 면적 기준으로 20%를 점유하고 있으며, 패키징 공정 매출 기준으로는 30%가량을 차지한다(2018년). 2023년까지 웨이퍼 면적 비율은 25%, 패키징 매출 비중은 35%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김지산).
플립칩 공정은 다시 FCBGA(Flip Chip - Ball Grid Array)와 FCCSP(Flip Chip - Chip Scale Package) 등으로 세분화된다. 큰 기판에 납땜 볼을 격자 간격으로 배열하여 칩과 부착하는 FCBGA(Ball Grid Array) 방식은 칩보다 기판의 크기가 크다. 이 방식은 공간이 넉넉한 PC 및 서버의 CPU 등에서 주로 쓰인다. 최근 들어서는 고성능 CPU와 GPU가 속속 등장하면서 FCBGA의 수요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FCBGA는 인쇄회로기판(PCB; Printed Circuit Board)에 연결하는 서브스트레이트 내 핀의 두께(Pitch)를 줄여 패키지 전체의 크기를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CPU와 GPU 코어가 증가해서 패키지 기판이 가로 방향으로 점점 넓어지는 추세에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한편, 스마트폰 AP처럼 좁은 공간에 칩을 집약해서 배치해야 하는 곳에서는 FCCSP(Chip Scale Package) 방식이 많이 쓰인다. FCCSP 방식은 칩과 기판의 크기가 비슷하여 패키징의 크기를 칩 수준으로 아주 작게 만들 수 있다. 한편, 칩과 기판을 접촉할 때 칩 위에 전선 프레임을 배치하여 연결하는 방식을 LOC(Lead on Chip)라 하고, FCBGA와 FCCSP처럼 칩과 기판 사이 볼을 통해 접합하는 방식을 BOC(Board on Chip)라 부르기도 한다.
칩의 크기를 최대한 작게 하고자 하는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반도체 제조 공정상 웨이퍼(Wafer) 단계에서 미리 패키징을 하고 나중에 칩을 잘라내는 방식(WLP; Wafer Level Packaging)도 개발되었다. 웨이퍼에서 개별 칩을 먼저 분리해낸 다음 나중에 패키징 공정을 적용하는 기존 방식은 아무래도 기판에 남는 공간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웨이퍼 단에서 패키징을 모두 마친 후 나중에 단품으로 잘라내면 패키지의 크기를 칩 크기와 완전히 동일하게 할 수 있다. FI-WLP(Fan in WLP)는 웨이퍼에서 패키징을 전부 완료한 후 칩을 잘라내는 것이고, FO-WLP(Fan out WLP)는 웨이퍼상에서 패키징을 하기에 앞서 칩 분리의 전단계인 격자형 다이(Die)로 일차 구획을 하여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경계면에도 입출력단자(I/O)를 설치할 수 있어 같은 칩사이즈 대비 더 많은 신호통로를 설치할 수 있고, 웨이퍼를 보호하는 면적이 넓어져서 칩의 안정성도 높아진다. 만약 다이(Die) 수준에서 불량이 나오면 패키징을 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웨이퍼를 곧바로 패키징 하는 방식에 비해 단가도 절담된다. 2016년 TSMC는 FO-WLP를 선제적으로 적용하여 당시 애플 스마트폰 AP의 위탁생산 물량을 삼성으로부터 가져오는 데 큰 도움을 얻었다.
그런가하면 칩을 적층하는 기술도 한층 발전하고 있다. TSV(Through Si Via)는 여러 층의 칩을 쌓기 위해 층들을 관통하는 구멍(Via Hole)을 뚫어 전극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여기서는 와이어본딩이나 솔더범프로 전기신호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위아래 칩에 미세한 구멍을 뚫고 실리콘 관통 전극을 형성하여서 입체적으로 패키징을 한다. 칩과 PCB 사이에 실리콘 인터포저(Interposer)를 설치하여 관통하는 2.5D 방식, 여러 칩을 수직으로 뚫어서 연결하는 3D 방식 등 다양한 형태의 집적기술이 적용되고 있다. 이종접합이 필요한 경우에는 TSV를 통한 수직 연결 뿐 아니라 인터포저를 매개로한 수평 연결까지 도입해 마치 고층빌딩이 모인 도시 같은 패키징도 구현하고 있다. 유사하게 인텔이 개발한 EMIB(Embedded Multi-die Interconnect Bridge)는 서로 다른 공정과 아키텍처를 가진 칩을 통합한다. 예를 들어 공정 선폭이 상이한 CPU코어(10나노), I/O단자(14나노), 전원부(22나노) 등을 하나로 묶어 패키징하는 방식이다.
반도체 패키징은 수요가 폭발하는 반면 공급은 제한적이어서 향후 몇 년간은 수요가 공급을 지속적으로 앞지를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일본이 이 분야에서 앞서가지만 최근 우리나라도 FCBGA, FCCSP 등 분야에서 매섭게 추격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 반도체 미세화 공정이 막바지에 다다랐기 때문에 미래의 더 효율적인 칩 설계는 패키징 기술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나노 이하 공정에서 업체간 수율과 품질의 평준화가 이루어지면 다음에는 그 칩을 어떻게 쌓고 붙이느냐에 따라 경쟁력이 결정되는 것이다. 미세 회로를 깎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포개고 잇는 일이 얼마나 난이도가 높을지는 능히 짐작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내서 공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일을 우리가 다른 나라에 비해 못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작성 2022.4.24)
자율주행자동차와 실시간 번역 같은 기능으로 이미 우리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딥러닝은 인류 속에 점점 깊이 들어오고 있다. 딥러닝의 개념은 이미 1940년대부터 등장했지만 그것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였다. 특히, 2016년 3월 알파고와 이세돌이 펼친 5번의 바둑 대국은 딥러닝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 같은 것이었다.
한 게임의 바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경우의 수를 가지고 있다. 가로 세로 19줄씩인 바둑판의 교차점은 361개이다. 바둑 한 수를 둘 때 고려해야 할 위치는 평균적으로 250개이다. 모두 150개의 돌을 두어야 한 경기가 끝나니 기사가 한 경기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지수는 250의 150승, 10의 360승에 달한다. 우리 생활에서는 1을 쓰고 360개의 0을 쓰는 이 만큼의 거대한 숫자를 사용할 일이 많지 않다. 우주의 모든 원자 개수를 합쳐도 10의 82승이다. 지구상의 모든 모래알 개수를 세어도 10의 22승 밖에 안된다. 우주에 있는 별을 전부 세어도 10의 23승에도 미치지 못한다. 10의 360승이라는 숫자, 그것도 앞의 결정이 뒤의 향방에 긴밀하게 영향을 미치는 유기적인 숫자의 모든 경로를 컴퓨터가 정해진 시간에 계산해서 최적의 해답을 찾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네번째 대국에서 이세돌에게 단 한 판만을 내어주고 나머지를 모두 이긴 후, 그 이후 어떤 인간에게도 져 본적이 없는 알파고는 사실 무수한 곱셈과 덧셈으로 구성된 시스템이다. 딥러닝은 여러 층(Layer)에 위치한 노드들을 연결한 뉴런(Neuron)의 최적 가중치 값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노드에서는 입력치들의 덧셈이 일어나고, 뉴런에서는 입력치와 가중치의 곱셈이 일어난다. 딥러닝은 최초 입력값과 최종 결과값의 오차를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수십만개 뉴런의 가중치 값을 조금씩 수정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양의 실제 입력-결과 값들이 필요하다. 알파고는 최초 개발 단계에서 바둑 서버에 있는 3천만 수를 통해 인간의 수(지도학습:Supervised Learning)를 배웠다. 그런 이후에는 스스로 대결(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하는 과정을 수천만번 거치며 자체 성능을 개선했다. 알파고를 만든 사람들은 바둑의 규칙이 어떠하다는 알고리즘을 짜지 않았고, 알파고 내부에서도 규칙에 따른 바둑돌 위치의 유불리를 계산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직 수많은 행렬 속에서의 곱셈 덧셈을 통해 승리할 확률이 높은 좌표값을 잘 찾아내고 상대방의 수를 더 잘 예측할 수 있는 가중치들을 찾아내려고 했을 뿐이었다.
딥러닝이 구현하는 일은 놀라운데 원리는 모두 이와 비슷하다. 자율주행자동차에서는 카메라를 통해 들어오는 영상 데이터 픽셀이라는 입력값과 핸들을 좌우로 돌리고 엑셀과 브레이크를 밟았다 떼는 출력값의 최적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실시간 음성 번역에서는 1초를 수십만번 쪼개 표현한 인간의 음성 데이터 입력값에 가장 적합한 음성 출력값을 대응시키는 것이다. 당연히 딥러닝은 운전이라는 행위를 이해하지 않고, 인간 언어의 뜻을 알려하지 않는다. 다만, 엄청난 양의 학습을 통해 찾아낸 수많은 뉴런의 가중치 값을 이용해 더하기와 곱하기를 할 뿐이다.
2021년 기준 각 기업 딥러닝의 가중치(파라미터) 개수 확대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테슬라가 주축이 된 오픈AI는 이미 2020년 1,750억개의 가중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구글과 베이징인공지능연구원은 각각 2조개의 가중치에 육박하는 딥러닝 시스템을 훈련시키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화웨이 등은 물론 우리나라의 네이버와 카카오도 각각 수천억개의 가중치를 갖는 AI에게 수많은 데이터를 실어다 주며 그 능력을 키워내고 있다. 이 먹성 좋은 시스템에는 끝도 없이 공급되는 데이터와 반복 연산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성능 좋은 반도체 칩이 꼭 필요하다.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나라가 빅데이터와 반도체에 국운을 거는 이유다. (작성 2021.12.17)
AI는 우리 생활을 크게 변화시켜 가고 있다. AI의 장점은 무수히 많은 입력과 결과 값만 있으면 중간 과정을 사람의 명령 없이도 스스로 알아낸다는 점이다. AI는 수 억 줄의 꼼꼼한 코드로도 구현할 수 없었던 불명확하고 미묘한 일들을 신통하게 해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자동차 운전이다. 운전의 최종 행동은 어찌보면 단순하다. 핸들을 좌우로 돌리는 것과 엑셀, 브레이크를 밟았다 떼는 것 뿐이다. 하지만 그 판단에까지 이르는 과정은 말과 수식으로는 딱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영역이다. 똑같은 도로에서의 조작도 시간대와 주변 여건에 따라 말그대로 천차만별이다. 다른 예는 언어의 발성이다. 초성 자음 19개, 중성 모음 21개, 종성 받침 자음 27개인 한글이 만들 수 있는 글자수는 11,172자이다. 이 글자들이 모여서 만드는 우리말의 다양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똑같은 단어도 어떤 높낮이, 리듬, 세기로 소리 내느냐에 따라 의미가 변화무쌍하다. 단어가 모여 만드는 문장, 문단의 다채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이만한 가지수를 모두 프로그램화해서 컴퓨터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스스로도 자신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AI는 이와 같은 느낌의 영역에 속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AI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하는지는 인간도, AI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무수한 데이터를 대입한 끝에 신기하게도 잘 맞는 방법이 '찾아지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뇌 구조를 모방한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뇌에서 전기 신호가 흐르는 통로는 뉴런인데, 인공신경망에서는 노드를 연결한 파라미터가 그 역할을 한다. 현재 전세계 초거대 AI는 파라미터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경쟁에 몰두해 있다. 구글은 1조 6천억개, 베이징인공지능연구원은 1조 8천억개 파라미터의 AI를 구축해 운영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네이버 2천억개, LG 3천억개, 카카오 6천억개(예정) 등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기 위한 각축이 한창이다.
가르칠 수 있는 데이터만 있으면 초거대 AI에게 무궁무진한 일을 시킬 수 있다. 2030년이 되기 전 가능해질 몇 가지를 상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스마트폰을 들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낀 채 외국 사람과 얘기하면 실시간 통역을 들을 수 있다. 스마트폰을 켜고 업무 회의를 마치는 즉시 자동으로 녹취록이 문서화되고, 상호 서명해 교환할 수 있는 요약된 합의문이 완성된다. 스토리를 글로 쓰면 그림이나 영상이 만들어져 작가의 마지막 터치만으로도 독창적인 콘텐츠가 탄생한다. 메타버스 세상에서 가상인간 친구와 만나 감정을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할 수 있다. 그 친구는 박식하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대화를 하면 할 수록 나를 점점 더 잘 알아간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CT 촬영이 보험으로 지원되고, AI는 그 사진에서 암 발생을 99.99% 확률로 잡아낸다. 손목의 밴드는 날씨와 나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분석해서 밤 동안 우리집의 온도와 습도를 자동으로 조절해가며 나의 수면 질을 최상으로 유지해준다. 인간이 그동안 쌓아온 무수한 연구 문헌을 바탕으로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신약과 신소재들이 한달이 멀다하고 쏟아진다. 내가 주문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AI는 내가 필요로 하는 물건을 알고 미리 우리 집 옆 물류센터에 갖다 놓는다. 심지어는 나나 내 이웃이 지금쯤 시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이미 우리 동네로 향하는 차에 실어 놓았을 수도 있다. 자율주행은 물론이고, 자율요리, 자율다림 등 일단 한 자리에서 해결할 수 있는 모든 동작들은 AI가 대신 해준다.
몇 가지 공상만으로도 AI가 우리 삶에 부여할 편리함과 즐거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AI가 발달할수록 지금은 가늠할 수 없는 기발한 서비스가 탄생할 것이다. 심지어는 AI의 활용법을 찾아내는 AI도 등장해 기상천외한 것들을 내 놓을 것이다. 변화의 속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질 것이다.
우리가 AI로 인한 변화를 거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AI를 활용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압도적인 생산력을 발휘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변화에 적극적으로 올라타는 것이다. AI를 이해하고, 어느 기업이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내 삶과 일을 더욱 쾌적하고 효율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투자에 동참해도 좋다. 초거대 AI를 빌려 창업하는 도전도 할 수 있다. 변화에 잘 적응한 개인과 집단이 생존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작성 2021.12.23)
1980년대에 등장한 딥러닝이 본격적으로 개화한 시점은 2012년 또는 2016년이라고 볼 수 있다. 2012년 이미지넷 대회(ImageNet competetion)에서는 알렉스넷(AlexNet)이라는 시스템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이미지넷 대회의 참가자들은 2만여개의 범주로 분류한 1천5백만여장의 이미지를 인식하는 정확도를 겨뤘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고양이', '개', '책' 같은 물체를 컴퓨터가 잘 구별할 수 있는지 보는 것이었다. 2007년부터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2010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대회 초창기에 컴퓨터의 인식률은 75%를 넘지 못했다. 그런데 2012년 대회에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알렉스 크리제브스키가 그래픽카드(GPU)에 기반한 딥러닝 기술을 선보이면서 인식률을 10%p 이상 끌어올리는 성과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소스코드까지 공개하여 딥러닝의 붐을 일으켰고, 2016년에는 MS팀이 인식률을 사람과 유사한 수준인 96%까지 올리는 진전을 거두었다. 한편, 2016년 3월에 있었던 구글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은 딥러닝의 시대를 알리는 다른 신호탄이었다. 경우의 수가 무궁무진해서 기계가 절대 넘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바둑에서 펼쳐진 인간 최고 실력자와 인공지능의 대결은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주일간 5국으로 예정된 혈투에서 사람이 기계에게 처음 세판을 내리 패하는 모습을 보이자 AI에 대한 두려움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오히려 4번째 대국에서 이세돌이 이긴 것이 앞으로 인간이 AI를 누를 수 있는 마지막 대결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주며 비장함을 더했다.
알렉스넷이 GPU를 써서 딥러닝을 본격 구현한 지 10년이 지난 2022년, 우리 일상생활에서 가장 크게 변화를 느끼는 분야는 자연어 처리이다. 자연어(Natural language)는 프로그래밍 언어(C++, JAVA, Python) 같은 인공어(Artificail language)와는 다른, 말 그대로 우리가 평상시에 자연스럽게 쓰는 언어이다. 사람마다 제각각이고, 상황과 기분에 따라서도 바뀌는 이 언어를 컴퓨터가 알아듣는다는 것은 고양이를 구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지만 어느덧 AI는 이를 완벽에 가깝게 수행할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스마트폰과 스마트홈 기기에서 AI 비서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이제 평범한 일이 됐다. 애플의 시리, 구글의 오케이구글, 아마존의 알렉사, 삼성의 빅스비는 지금도 사용자와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인간 언어의 미묘함을 열심히 학습하고 있다. 자연어 처리에서는 이 외에도 여러가지 서비스가 개발되었다. 구글 리코더(Recorder)(2019년 출시)는 영상의 음성을 실시간으로 문자화해서 바로 자막으로 나열해 보여준다. 네이버의 클로바 노트(2020년)는 대화의 녹음 파일 음성을 인식하여 속기록 형태로 변환해준다. 클로바 더빙(2021년)은 다양한 목소리로 대본을 읽어서(TTS; Text To Speech) 동영상에 AI 음성을 입혀주고, 클로바 케어콜(2020년)은 독거 어르신들과 주 2회 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묻고 친구처럼 대화한다. 통신사 콜센터에서도 상당히 많은 전화를 AI가 응대하고 있다. 2021년 기준 SK텔레콤 콜센터 통화의 38%는 AI가 받는다. KT에서는 AI가 상담직원과 고객의 대화를 같이 들으면서 고객의 과거 상담 이력과 안내해야할 내용을 즉시 찾아준다. 통신사에는 전화 상담 데이터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AI가 무서운 속도로 학습을 해 가고 있다. 여기서 쌓인 딥러닝 노하우는 향후 금융, 공공 영역으로 얼마든지 확대가 가능하다. MS의 AI앱 SeeingAI(2017년)는 시각장애인에게 주변 사람과 환경을 식별하여 말로 설명해준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루카(Luka)에서 개발한 레플리카(Replika)는 마치 사람처럼 이용자와 내밀하게 소통하며 감정적 위안을 준다. 우리나라의 휴멜로에서 만든 프로소디(Prosody)는 TTS를 할 때 자연스러운 운율 조정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진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감정을 담을 수도 있고, 말의 높낮이도 조절하고, 원하는 대로 속도를 조절하기도 한다. 보이저엑스에서 만든 브루(vrew)는 자동으로 영상의 자막을 만들 뿐 아니라 자막으로 편집까지 가능하게 해 준다. 캐나다 퀘백의 스타트업 2Hz에서 만든 크리습(Krisp)은 화상회의를 할 때 아이들 소리나 강아지 소리 등 주위 음향을 제거하고 이용자의 목소리만 식별해서 걸러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프랑스의 알골리아(Algolia)는 고객의 질문을 이해해서 정확한 검색을 제공하는 검색 플랫폼을 개발했다.
이미지와 영상 분야도 지난 10년 간 크게 발전했다. 어린아이처럼 사물을 인식하던 AI는 의료 사진에서 암과 같은 질병을 판별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이미지의 변화와 왜곡을 감안해서 본 뜻을 식별하는 능력도 탁월하게 높아졌다. 보이저엑스의 모바일 스캐너 앱 브이플랫(vFlat)은 구부러진 종이의 이미지를 보정하고, 테두리를 알아서 분간하고, 이미지를 쉽게 글자로 변환해 낸다. 같은 보이저엑스의 온글잎은 사람이 손으로 쓴 글씨를 인식해서 개인의 필체가 살아있는 컴퓨터 폰트를 제작해 준다. 영상을 조정하는 기술도 하루가 다르게 성장 중이다. 영국 런던 Flawless AI의 TrueSync는 영상 속 배우의 연기를 분석한 다음 배우의 얼굴과 입 움직임을 더빙된 외국어에 어울리도록 정교하게 변형한다. 유튜브의 AI는 24시간인 하루 동안 수십만 시간 분량으로 올라오는 거대한 양의 영상을 실시간으로 검열하고, 과도한 노출이나 폭력 등 부적절한 영상을 조회가 되기 전에 발견해 삭제해 버린다. TV업체들은 AI 업스케일링 기술을 이용해 저화질 영상을 고화질로 실시간 변환한다. 실리콘밸리의 바이파이브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촬영해 미묘한 움직임으로 근골격계 병을 진단하고 예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완벽에 가까워지고 있는 자연어와 이미지·영상 처리 기술은 메타버스 속 가상세계를 더욱 사실적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2021년부터는 가상인간이 속속 데뷔해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고, AI 아나운서가 뉴스를 진행하기도 한다. 김광석과 같은 오래 전에 사망한 가수도 AI를 통해 그 목소리와 느낌 그대로 무대에서 살아난다. 우리나라의 스타트업 마인드로직의 오픈타운(2022년)은 누구나 간편하게 자신만의 AI 부캐를 만들도록 했다. 인기유튜버나 유명인이 훈련시켜 만들어 놓은 부캐는 연애상담, 공부조언, 타로점 같은 주제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면서 본캐에게 수익까지 안겨주고 있다. 인터넷 초창기(2002년) 출시된 원조 일상대화 챗봇 심심이도 다시 탄생(2022년)해 사용자가 원하는 아바타를 만들어 다른 이용자와 대화하는 시스템을 제공한다. 카카오톡도 3D 아바타와는 다른 텍스트에 기반한 오픈채팅 메타버스 플랫폼을 구축(2022년)하겠다고 발표했다.
AI는 인간의 영역이던 '판단'에 까지 활발히 개입하고 있다. '센스'가 중요한 마케팅 분야에서 특히 활약이 두드러진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알 수 없는 AI 알고리즘으로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맞춤형 영상을 추천하여 지속적인 클릭을 유도하고 있다. 광고에서도 이용자의 구매기록이나 장바구니를 분석해서 타겟 광고를 제시하여 광고반응율(CTR : Click Through Rate)과 광고대비 전환율(ROAS; Return on Ad Spend)이 증가하는 것으로 그 성과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나라 스타트업 바이어블(Viable)은 쇼핑몰에서 고객의 구매기록, 라이브채팅, 상품리뷰, 설문조사 등을 바탕으로 사업 전략 판단에 활용할 수 있는 문서를 작성해서 사업주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디빌드(Debuild)에서는 이용자가 일상의 언어로 명령어를 입력하면 AI가 자동으로 코딩을 하는 서비스를 내놓았다. 같은 실리콘밸리의 윈드리버(Wind River)는 국방, 항공, 우주와 같이 고도로 전문화된 분야에서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AI를 구축하고 있다.
산업분야에서도 AI의 활약은 두드러진다. AI의 저변이 넓어짐에 따라 산업 현장의 전문가들은 생산 효율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는 딥러닝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LG화학은 친환경 촉매, 차세대 재료 같은 화학 소재를 개발하는 데에 딥러닝을 활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퍼셉토(Percepto)는 AIM(Autonomous Inspection & Monitoring solution)을 통해 로봇과 드론을 이용하여 산업현장, 발전소, 정유선, 광산, 송전선 같은 주요 시설을 효율적이고 안전하게 모니터링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같은 이스라엘의 비와이즈(Beewise)는 Beehome이라는 벌집에서 기생충이나 불규칙한 온도 등을 AI로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대응해서 벌의 수분 능력과 꿀 생산을 두배로 늘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캐나다 퀘벡의 브레인박스(BrainBox AI)는 일기예보 등 데이터를 토대로 건물의 열 상태를 예측해서 냉방이나 난방을 조절하여 탄소 발자국을 20~40%를 줄이는 해법을 제시했다. 이 외에도 병아리를 감별한다든지, 제조업체 데이터를 분석해 공정을 최적화 한다든지, 위조품을 적발하다든지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가 적용되고 있다. 로봇 기술도 딥러닝과 만나 확장 일로다. LG전자는 AI를 이용해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한다거나 병원에서 의약품을 날라주는 로봇을 제작했고, KT는 호텔 체크인, 룸서비스 등을 도와주는 로봇을 만들었다. 우아한형제들은 자율주행 배달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공장에서 작동하는 산업용 로봇도 점차 고도화되고 있다.
여기에 나열된 기업들 외에도 오늘날 세계에는 무수히 많은 기업들이 AI라는 금맥에 뛰어들어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AI 기업은 크게 수평적 분야와 수직적 분야로 나누어진다. 수평적 AI는 AI를 위한 칩과 하드웨어를 만든다거나, 개발자를 위한 플래폼을 구축한다거나, AI 알고리즘을 개발하는 등의 통합적인 업무를 수행한다. 주로 엔비디아, 구글, 애플, 네이버, 카카오 같은 빅테크 기업들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수천억개의 파라미터를 가진 초거대 AI를 구축해 클라우드로 제공하고, 문제 해결 프레임워크를 짜는 것에는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스타트업 같은 작은 기업이 하기는 쉽지는 않다. 수직적 AI는 특정 분야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서비스를 만드는 작업이다. 기업 솔루션이나 프로그램, 앱 등 특정 고객에 초점을 맞추어 직접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성격이 강하다. 수평적 AI 기업들이 AI 개발을 대중화할 수 있는 다양한 도구를 만들어 제공하기 때문에 작은 기업과 개인이 수직적 AI에 접근하는 것이 점점 쉬워지고 있다. 엔비디아의 AI 플랫폼 TAO(Train, Adapt, and Optimize), AI 라이브러리 딥스트림(DeepStream), 메타버스 플랫폼 옴니버스(Omniverse), 구글의 오픈소스 라이브러리 텐서플로우(TensorFlow), MS의 자연어처리 인공지능 모델 GPT-3 등 실로 다양한 서비스가 존재한다.
딥러닝이 본격화된 지 불과 10년이 지난 2022년의 모습이 이러할진대 앞으로 10년동안 새로 벌어질 모습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플랫폼이 더 발전하고 쉬워질수록 개별 기업과 개인이 자신의 전문영역(Domain)에 맞는 AI를 개발해 활용하는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질 것이다.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공개되는 데이터도 창의적 AI의 훌륭한 재료가 될 것이다. 2023년, 2024년 등 매년 변화해가는 AI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면 좋겠다. (작성 2022.5.22)
5G 통신기술은 현재 진행형이다. 90년대 2G는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이동통신과 문자메세지의 시대를 열었다. 2000년대의 3G는 스마트폰과 만나 휴대 인터넷을 등장시켰다. 2010년대에 꽃 핀 4G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낳았다. 2019년 4월 우리나라가 미국을 2시간 차로 앞지르고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5G는 아마도 메타버스 세상을 개척할 것이다. 그 변화의 방향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2007년 1월 9일 스티브잡스가 샌프란시스코 모스콘센터에서 아이폰을 소개했을 때 3G는 비로소 활용 가치가 생겼다. 물론 그 이후에도 어떤 사람들은 왜 굳이 작은 전화기 화면으로 인터넷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컴퓨터에 비하면 너무 조악하지 않은가 않은가?", "나한테 무슨 새로운 가치를 더해 주겠나?"라는 냉소 없이 바로 그 순간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알아챈 사람은 전 재산을 털어 애플 주식을 사서 지금쯤 꽤 큰 부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200kbps, 즉 1초에 20만개의 숫자를 보내는 2G에 비해 200배 빠른 40Mbps 3G의 진가는 얼마 안 있어 조금씩 드러났다. 우리나라의 경우 카카오톡이 등장해 귀여운 화면에서 공짜로 여러 사람과 동시에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기존 2G 문자메세지와 다른 쓸모를 보여주던 때 애니팡이라는 게임이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똑같은 모양을 3개 이상 잇닿게 하면 그 부분이 팡 터지고 점수를 얻는 그 게임은 PC로 치면 이미 90년대에 유행하던 게임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친구들이 모두 쓰고 있는 플랫폼에서 게임을 하면서 플렉스를 할 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몇 개를 얼마나 잘 터트렸느냐에 따라 레벨과 점수가 나오고 메달까지 부여되어 개인 프로필에 나오니 애니팡은 전국민의 경쟁심을 자극했다. 2G로는 당연히 이런 정도 그래픽이 가미된 게임이 끊김없이 흘러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기록을 경신해가고 있는데 0.1초라도 지연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3G는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미디어도 만들어냈다. 아직 동영상을 부드럽게 재생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음성 정도는 실시간으로 충분히 재생 가능했다. 삽시간에 엄청난 수의 팟캐스트 방송국과 인기 진행자들이 생겨났다. 몇 개 방송국에서 정해진 포맷으로 송출되는 라디오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내가 골라서 듣는 내 취향에 맞는 방송들은 진정한 개인화의 서막이었다.
4G의 시대는 지금 우리가 즐기는 만능 스마트폰 시대를 열었다. 네이버와 카카오 플랫폼 내 콘텐츠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고,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통해 실시간 영상 스트리밍을 가능하게 했다. 화상통화는 물론 다양한 멀티미디어를 공유하는 SNS를 소화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내킬 때마다 상품을 주문하고 집 앞으로 배달을 요청하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다. 구독경제, 공유경제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한달에 수천만원을 버는 유튜브 스타, 수 조원의 가치를 갖는 플랫폼 개발자들이 등장했다. 유통과 방송산업은 송두리째 뒤집혔다.
5G의 최대 속도는 20Gbps에 이른다. 1초에 무려 200억개의 숫자가 오고간다. 2G, 3G, 4G의 최대 속도 200kbps, 40Mbps, 100Mbps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런데 문제는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구현될 데이터를 위해서는 이 정도 속도가 별로 필요 없다는 점이다. 가로 3,820개, 세로 2,160개, 총 825만개의 픽셀이 있는 고화질 4K 영상을 스트리밍하는 데에도 고작(?) 35Mbps 정도의 속도면 충분하다. 깨끗한 음질의 통화를 위해서는 0.5Mbps 정도면 무리가 없다. 클라우드 게이밍을 즐겨도 20Mbps면 된다. 단위 자체가 다른 20Gbps는 도무지 쓸모가 없다. 콘텐츠를 다운로드한다면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시키겠지만 요즘은 아무도 콘텐츠를 다운로드 해서 보지 않고, 스트리밍으로 즉흥적으로 즐기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
아마도 5G의 시대의 진정한 개막은 2007년 1월 9일과 같은 분명한 분기점이 있을 확률이 크다. 어느 기업이 혁신적인 메타버스 플랫폼을 들고 나와서 5G를 이용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가상인간이 나타나고, 주변 사물들의 정보가 눈 앞에 펼쳐지고, 현실과 동일한 디지털트윈이 실시간으로 구동되고, 차가 스스로 움직이는 시스템에서는 엄청난 데이터가 순간적으로 오고가야 할 것이다. 2030년쯤 등장할 것이라고 예상되는 6G의 시대에서는 위성통신을 이용해 기지국이 없는 곳에서도 대규모 데이터 송수신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자율주행선박, 도심에어모빌리티(UAM)도 지금보다 훌쩍 가깝게 다가올 것이다. (작성 2021.12.29)
블록체인은 암호를 이용해 생성한 정보의 블록들을 사슬처럼 엮어놓은 것이다. 생성된 모든 블록이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이어져 있으며, 그 안의 정보는 소수 독점 없이 전체에게 공유된다. 유명한 블록체인인 비트코인의 정보량은 2021년 11월 기준 380GB이다. 웬만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용량보다 적은 이들 숫자의 집합에 2008년부터 일어난 모든 비트코인 거래(transaction) 기록이 담겨져 있다. 은행이나 회계법인 같이 신뢰와 권위를 가진 주체가 일부러 꼼꼼히 기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거래의 내용이 차질없이 하나의 사슬에 수록된다는 점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열광하게 하는 이유이다.
이런 블록체인 기술은 암호화폐 외에 여러 분야에 이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에너지 거래, 통관, 농수산물 이력관리, 주식 거래, 중고 물품 거래, 보험 가입 및 청구 등 다양한 분야에 혁신을 불러올 수 있다. 장부를 관리하기 위한 별도의 중개기관을 만들지 않고도 개인간의 거래를 활성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거래의 경우 집집마다 설치한 태양광 패널에서 생산한 여분의 전기를 필요로 하는 다른 곳에 곧장 전달한 후 바로바로 블록체인을 통해 내용을 기록하고 자금을 정산할 수 있다.
어떻게 모든 거래가 사고 없이 하나의 체인에 기록되는 것이 가능할까? 비트코인 설계방식을 살펴보면 그 흐름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이 모두 선량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많은 참여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거래 기록을 거짓으로 생성해서 통신망에 퍼트릴 수 있다. 예를 들어 거액의 비트코인이 내 계좌로 입금됐다는 기록을 만들어서 남들보다 빠르게 네트워크에 전파해 그것을 참으로 만들어버리는 식이다. 어차피 진위를 검증할 별도의 기관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비트코인에서는 채굴자라는 사람들이 거래의 기록을 담당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채굴자들은 엄청난 반복작업을 해서 조건에 딱 맞는 숫자를 찾아야 기록의 권한을 얻을 수 있다. 이 숫자를 처음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그 숫자가 맞는지 사후 검증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어떤 정보이든 정해진 길이의 숫자로 즉시 반환해 주는 해시(Hash)라는 암호화 알고리즘이 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의 경우 미국 국가안보국(US National Security Agency)에서 2001년에 만든 SHA-256이라는 해시를 쓴다. 이 해시는 입력값이 길건 짧건 상관없이 정확히 256자의 2진수 결과값을 도출해낸다. 이 숫자가 만들 수 있는 경우의 수는 2의 256승이다. 얼핏보면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수는 실은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크다. 십진수로 표현하면 0을 자그마치 77개 붙여야 될 정도로서 전 우주에 있는 원자의 개수(10의 82승)를 생각하면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비트코인에서는 서명된 거래정보를 잘 묶어서 이 해시로 변환한 숫자가 그때그때 네트워크가 정해주는 목표값(target) 보다 작도록 만들어낸 사람이 새로운 6.25 비트코인을 스스로에게 송금할 권한을 얻는다. 경우의 수가 크다보니 이 값을 찾는 것은 무지막지한 계산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새로운 코인을 얻고자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써가며 블럭의 기록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아무도 통제하지 않아도 정확한 거래 내역이 연결되는 것은 바로 이 경쟁 때문이다. 비트코인에서는 블럭을 생성해내는 사람들이 거짓 정보를 생성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정보의 오류로 비트코인망의 신뢰 자체가 붕괴되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축적해 온 비트코인의 가치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연산을 하기 위한 매몰비용도 정확한 기록을 유도하는 동기가 된다. 많은 에너지를 써서 가짜 정보를 꾸몄는데 검증과정에서 51%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아 생성한 블록을 이전 블록에 연결시키지 못하면 들였던 노력은 모두 무효가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연속으로 몇 번을 남들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암호를 풀어 부정한 기록이 발각되기 전에 네트워크의 과반에 퍼트려 확정해 버려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빠른 컴퓨터라도 이렇게 몇 번씩 검증을 독점하면서 모두를 속일 수는 없다. 참가자들은 가장 긴 블록을 승인하기 때문에 혼자서 블록을 계속 이어 붙이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연산속도를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정확한 거래정보를 남들보다 빠르게 기록해서 정당한 승인을 받아 비트코인을 상금으로 얻는 것이 효율적이다.
거짓정보가 만들어지는 것을 막는 다른 장치는 투명성이다. 비트코인에서는 지갑 주인의 실명을 제외한 지갑별 주소와 액수가 모두에게 공개된다. 거래 참가자의 지갑 주소, 송금 액수, 송금 시각 등이 포함된 모든 거래 내역은 원장에 저장되고, 원장 내용은 모두에게 알려져 있다. 원장을 기록하고 검증하는 일에 참여하는 채굴자들의 정보도 전부 드러난다. 악의를 가진 이가 아무리 교묘하게 일을 처리해도 어느 지갑에서 다른 지갑으로 코인이 이동한 기록은 숨길 방법이 없다. 이렇게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망에서 거짓은 쉽게 적발된다.
하나의 블록은 약 10분에 한번씩 생성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블록에는 거래기록과 블록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헤더(Header) 등이 담겨 있다. 블록 하나의 용량은 1Mbyte이다. 단일 거래의 용량이 대략 0.3kbyte 정도이므로 한 블록에는 약 3천개의 거래가 담길 수 있다. 헤더에는 블록생성 시간, 그간의 모든 거래를 해시로 처리한 값, 이전 블럭을 해시로 처리한 값 등이 묶여져 있는데, 특히 네트워크에서 제시한 타겟값과 논스(Nounce)라 불리는 32자리의 이진수를 포함해야 한다. 채굴자들이 찾아야 하는 값은 바로 이 논스이다. 논스를 바꾸는 것에 따라 전체 블록의 해시값은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데, 그 값이 타겟보다 작아지게 하는 바로 그 논스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순전히 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말도 안되게 운이 좋은 채굴자는 단 몇번의 시도로 이를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막 지독히도 운이 나쁜 채굴자는 수천억번을 시도해도 논스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채굴 경쟁이 지금보다 심하지 않았던 2014년에는 17개의 0으로 시작하는 타겟값보다 더 작은 결과값을 도출하는 논스를 찾아야 했는데, 이 확률은 지구상에 있는 10의 22승 개 정도의 수많은 모래 알갱이 중에 단 하나의 특정 모래 알갱이를 찾는 것 정도였다고 한다.
중앙이 통제하지 않고 참가자들이 서로 100% 믿지 않음에도 소정의 규칙을 통해 전체망의 신뢰성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블록체인의 중심 아이디어다. 이의 실현 기법들이 다양하게 발전되어 갈수록 디지털 세상에서 개인간 거래와 공유는 더 활발해질 것이다. (작성 2021.12.10)
블록체인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기록되고 변경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투명성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특히 유용하다. 좋은 마음에서 꺼낸 돈이 필요한 곳으로 제대로 흘러 가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기부'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기부라는 영역에 있어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하는 장점은 직관적이고 명확하다. 내 기부금이 언제, 누구에게, 얼마나 보내졌는지 확실하게 기록되고 블록체인 사슬에 영구히 저장되어 있다는 점은 기부자에게 큰 안심을 준다. 기부자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 내용을 꺼내어 확인할 수도 있다. 블록체인 기부 네트워크에 대한 신뢰가 충분히 쌓이면 개인간에 직접적으로 기부금을 주고 받는 P2P(peer-to-peer) 거래도 활성화될 수 있다. 자동으로 자금 흐름이 기록되기 때문에 중간 과정에서 기부금을 관리하는 인력과 조직 운영에 들어가는 비용도 크게 줄일 수 있다. 기부 증서를 NFT화하여 명예의 전당 같은 곳에 보관하면 기부자에게 영구적인 자긍심을 줄 수도 있다. 기부 내용을 증빙해 제출하는 것도 한결 편리해질 것이다.
이에 더해, 블록체인의 다른 특징을 활용하면 보다 강력한 기능도 구현할 수 있다. 특히, 사전에 설정한 조건이 성립되면 계약이 실현되게 하는 스마트 계약이 쓸모가 있다. 기부받는 곳에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부금이 전달되게 하는 것은 그 예다. 기부금이 일정 액수를 넘어서면 초과분은 어떤 용도에만 사용한다고 구체적인 배분 기준을 설정할 수도 있다. 꼭 현금이 아니어도 현물을 구입해 배달하거나, 코인이나 NFT 같은 가상 자산을 보낸다거나 하는 응용도 가능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는 동기도 만들어 볼 수 있다. 비트코인에서는 거래의 검증을 작업증명(PoW; Proof of Work)을 통해서 이루어낸다. 이 과정에 참여하는 채굴자들은 새로운 비트코인을 얻는 대신 거래의 신뢰성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 기부 블록체인에서는 이와는 다른 검증 방법을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기부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기부 행위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직접 검증의 주체가 되어 블록체인망의 운영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대가로 주어지는 이익이 적더라도 망의 건전한 관리에 큰 관심을 갖고 참여할 것이다. 오히려 대가로 얻어지는 수수료조차도 기부에 사용하는 데에 동의할 수도 있다.
이런 장점이 있지만 몇 가지 어려움도 능히 생각해볼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선의를 바탕으로 한 기부 참여자와 정반대의 동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거래기록 조작의 유혹을 느끼는 사람들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의 욕심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망의 신뢰는 한순간에 붕괴되고 기부자에게 냉소적인 반응만을 얻게 될 것이다. 분산형 시스템에 걸맞는 충분한 수의 참여자를 확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비트코인 등을 비롯한 암호화폐는 혹시 모를 일확천금의 가능성으로 사람들을 열광하게 하지만 기부라는 것은 본질상 사람들을 폭발적으로 끌어들이는 주제가 되기는 어렵다. 단지 몇몇의 대형 단체와 열성적인 기부자에 의해서만 블록체인망이 운영된다면 기존 인터넷망을 이용한 중앙 집중적인 기부금 관리 시스템과 무엇이 다른지 차별화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몇 가지 우려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크기 때문에 블록체인을 활용한 기부는 조금씩 확산될 것이다. 지금은 생각하지 못하는 쉽고 편리하고 투명한 방법이 나타나면서 큰 호응을 얻을 여지도 충분하다. 기부를 받는 사람도 블록체인을 통해 투명하게 기부를 받는 것이 다른 방식보다 편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느끼면 적극적으로 도입을 반길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의 발전이 우리 삶에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례다. (작성 2021.12.10)
코딩은 컴퓨터에게 세밀한 주문을 넣는 일이다. 컴퓨터의 일 처리 능력은 특출하다. 컴퓨터는 비록 0과 1밖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를 엄청나게 빠르게 처리한다. 예를 들어, 64비트 14코어 CPU가 5GHz의 클럭 스피트를 가지고 있으면 1초 안에 4.8조개(64x14x5x10^9)의 0 또는 1을 인식한다. 이는 사람이 1초에 천번씩 숫자를 세는 작업을 먹지도 자지도 않고 100년 동안 줄기차게 반복해야 달성할 수 있는 크기이다. 컴퓨터는 이런 가공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대신 딱 전달받은 일만 수행한다는 단점도 지닌다. 이 때문에 그 역량을 최대로 활용하는 빈틈 없는 주문서를 쓰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람이 0과 1을 직접 쳐서 소통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코딩이라는 언어를 다시 컴퓨터의 말인 0, 1로 변환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은 반면 인간의 언어는 선형적이다보니 컴퓨터에게 원하는 것을 전하는 코딩의 길이는 길어질 수밖에 없다. MS의 윈도우는 대부분 C로 쓰여졌는데 코딩의 분량은 5천만 줄에 달한다. 책 한쪽에 22줄 정도가 들어가고 한권은 대략 300페이지이니, 대략 8천권에 달하는 책이 윈도우를 위해 쓰여졌다고 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코딩을 하는 개발자는 대하소설을 쓰는 작가와 같이 장시간을 창작에 투자해야 한다. 컴퓨터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글을 지어야 하므로 그 난이도가 매우 높은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개발자가 되려는 젊은이들의 행렬은 이어진다.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세르게이 브린, 래리 페이지 같은 전설 같은 인물들 외에 우리나라에도 김범수, 이해진 같은 개발자 출신 창업자들이 즐비하다. 디지털 서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대부분의 회사들은 자신들의 회사가 개발자 중심임을 강조하고 훌륭한 코딩 실력을 갖춘 직원들을 최고 수준으로 대우한다. 모바일 앱 시대가 열리면서 개발자에 대한 수요도 폭발했다. 개발자들은 다른 직종에 비해 학벌, 배경에 영향을 덜 받고 오직 개발 실력만으로 승부할 수 있다. 일하는 장소와 시간도 자유로워서 재택 근무, 여행하며 일하기도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실력을 쌓다보면 '네카라쿠배당토' 같은 인기 직장에 취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회사를 창업하는 것도 꿈꿔볼 수 있다. 게다가 컴퓨터는 다루기 까다롭긴 하지만 정직하여서, 개발자가 올바른 명령을 내리기만 한다면 속이거나 꾀를 부리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이 컴퓨터와 대화하는 코딩 언어에는 실로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중 많이 쓰이는 것은 C, C++, C#, 자바, 파이썬, 코틀린, 스위프트 등이다. 웹페이지에서는 자바스크립트, HTML, CSS가 가벼운 프론트 엔드 언어로 쓰인다. 이 중 어느 언어를 선택해야할 것인가는 개발을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의 큰 고민거리이다. 주력 언어를 어떤 것으로 쓰느냐에 따라 취업할 수 있는 회사, 할 수 있는 일의 종류가 갈리기 때문이다. 업계의 구조와 나의 성향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선택하고 일해가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많다. 언어를 배우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돈이 드는 등 매몰 비용이 발생하므로 주력 언어를 잘못 고르면 손해가 없을 수 없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여러 언어들은 모두 컴퓨터와 소통한다는 측면에서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있어 하나를 알면 다른 하나를 배우는 것이 쉬워진다는 점이다.
C는 1970년대 탄생한 초기 언어들 중 오늘날까지 쓰이며 발전하고 있는 대선배 같은 존재다. A언어, B언어, Z언어 등 알파벳 이름마다 언어가 존재했지만 결국 살아남은 건 C언어이다. C는 벨연구소의 데니스 리치(Dennis M. Ritchie)가 1973년 만들었다. 오랜기간 검증받은 범용 언어이기 때문에 중요한 애플리케이션에 많이 이용된다. 윈도우는 대부분 C로 쓰여졌고, 하드웨어를 안정적이고 단순하게 조작해야 하는 각종 내장시스템(Embeded system)들도 C로 작성된다. C는 메모리를 할당하고 운영하는 함수를 제공하기 때문에 메모리 활용을 최적화하기 좋다. 최근 IoT, 웨어러블 기기, 차량용 소프트웨어수요가 증가하면서 전통의 강자로서의 C의 입지는 다시금 강해지고 있다. 다만, 함수 지향성의 오래된 방식이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단점이다. 처음에 C 책을 사서 앞 장부터 공부하는 초심자들은 이내 그 난해함에 질려 버리는 경우가 많다.
'씨피피'라고 발음되는 C++는 벨연구소의 비야네 스트롭스트룹(Bjarne Stroustrup)이 1990년대에 개발한 언어이다. C++는 객체지향 언어라는 점에서 C와 차별화된다. 독립된 단위라는 의미의 객체(Object)는 빵틀을 이용해 만든 빵처럼 기성품 같은 것이다. 명령어를 나열해서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러 사람이 고민해서 구축해 놓은 빵틀(클래스)을 사용해 빠르게 작성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를 쉽게 배울 수 있게 해줄 뿐 아니라 개발과 유지관리를 간편하게 하고, 다른 사람이 짜 놓은 코드를 읽는 것도 쉽게 만든다. 각각의 객체는 서로 메세지를 주고 받고 데이터를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객체지향 언어는 함수지향보다 유연하고 대규모 소프트웨어 개발에 적합하다. 이와 같은 장점을 가지고 있고 점점 진화해가고 있기도 하기 때문에 C++는 인기가 많은 언어이다. MS의 엑셀, 워드, 파워포인트 같은 오피스프로그램, Adobe의 포토샵, 일러스터 같은 그래픽 프로그램이 C++로 구축됐다. 구글의 크롬이나 모질라의 파이어폭스 같은 브라우저도 C++의 결과물이다.
C#은 윈도우 기반 .NET 프레임워크에서 사용되는 범용언어이다. 2000년대에 MS의 앤더스 헬스버그(Anders Hejlsberg)가 만들었다. .NET 프레임워크는 윈도우에서 사용되는 각종 프로그램들을 개발하기 위한 소프트웨어 개발 기반이다. 프레임워크에는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언어, 개발자 툴, 모듈, 라이브러리 등이 이용하기 쉬운 형태로 망라되어 있다. C#은 컴퓨터가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코드를 변형하기 위해 공통 언어 런타임(CLR; Common Language Runtime)을 사용한다. CLR은 메모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컴파일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코딩의 성능을 향상시킨다. 잘 갖춰진 프레임워크 때문에 C#은 MS와 전략적 제휴를 맺은 3D 개발 플랫폼인 유니티(Unity) 등 MS 관련 프로그램 내에서 많이 쓰인다. 그러나 .NET 프레임워크에 국한돼 모바일 등으로의 확장성이 떨어지는 점은 한계이다.
자바(Java)는 강력한 C 계열 언어와 필적할 인기를 구가하는 언어이다. 개발 현업에서는 ‘눈돌리는 모든 곳에 자바가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로 웹, 앱, 서버 가릴 것 없이 활용도가 높다. 그만큼 개발자도 많고, 라이브러리도 잘 구축되어 있어서 새로운 앱을 개발할 때 자바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쿠팡, 배민도 자바로 구축되어 돌아가고 있는 앱이다. 자바는 1990년대에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제임스 고슬링(James Arthur Gosling)에 의해 만들어졌다. 후에 썬이 오라클에 인수되면서 지금은 저작권이 이전되었다. 자바는 90년대 말 폭발하는 인터넷 환경에서 크게 성장했다. 그래픽과 글자입력을 위한 다른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이 우수하고 멀티미디어를 구현하는 능력도 출중해서 웹의 백엔드 개발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고슬링은 핫자바라는 초기 웹브라우저를 개발했다. 이를 당시 선풍적 인기를 끌던 넷스케이프가 받아들이면서 자바는 저변을 크게 넓혔다. 객체 지향의 패러다임을 유지하면서도 문법이 C계열 언어에 비해 단순하다는 것도 큰 인기 비결이었다. 요즘은 예전만 인기가 못하지만 여전히 개발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은 자바를 주력언어로 선택한다.
파이썬(Python)은 최근 들어 각광받는 언어이다. 자바가 아무리 C보다 쉽다 해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어렵게 마련인데 파이썬은 초심자에게도 진입장벽이 낮다. 문법이 실제 사람이 쓰는 언어와 비슷하여 쉽고 직관적이다. 동적언어라서 각각의 자료형을 코딩할 때 미리 설정할 필요도 없다. 인터프리터 언어이기 때문에 코드를 기계어로 변환하는 별도 과정 없이 실시간으로 실행하면서 고치는 것이 가능하다. 요즘 각광받는 빅데이터 분석에서 특별한 강점을 보인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핀터레스트 같이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힙한 프로그램들도 파이썬으로 만들어졌다. 아직 안정성과 확장성을 증명한 역사가 짧아 파이썬만으로 모든 개발을 하기는 어렵지만 향후 변화가 주목되는 언어이다.
이 밖에도 고(Go), 코틀린(Kotlin), 스위프트(Swift) 등도 구글, 애플이 채택하며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자바나 C++의 긴 컴파일 시간에 지친 구글 엔지니어들이 만든 고(Go)는 탄생 목적대로 빠른 스피드와 쉬운 문법을 자랑한다. 요즘에는 블록체인 제작에 많이 쓰인다. 17년부터 구글의 안드로이드 앱 개발의 언어로 공식 채택된 코틀린(Kotlin)은 자바와의 호환성, 기존 안드로이드 라이브러리의 활용성 등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자바가 사용되는 모든 용도에 적합한 간결하고 안정적인 대체 언어로서 ‘군살을 뺀 자바’라는 평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스위프트(Swift)는 애플이 iOS, 맥, 애플TV, 워치 앱 개발용으로 만든 강력하고 직관적인 언어이다. 2014년 스위프트가 애플의 새로운 개발언어로 소개되기 전 쓰였던 Objective-C와 함께 iOS 생태계의 개발자에게 쉽고 유연한 작업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웹의 프론트엔드에서는 자바스크립트, HTML, CSS가 널리 쓰인다. 자바스크립트(JavaScript)는 1990년대 넷스케이프를 설립한 마크 앤더슨(Marc Lowell Andreessen)이 도입한 언어이다. 앤더슨이 개발 당시 인기 있었던 ‘자바’의 이름을 빌려서 작명하는 바람에 서로 비슷한 것으로 혼동되기는 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언어이다. HTML과 CSS는 자바스크립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프로그래밍 언어라기 보다는 웹페이지를 그려주는 디자인적 요소가 강한 도구이다. 작업한 결과물을 웹의 화면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처음 배울 때 재미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나의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몇 년에 걸치는 오랜 작업이다. 쉽다고 하는 파이썬도 주당 40시간씩 6주를 공부해 250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전반적인 것을 배울 수 있다. C나 자바 같은 조금 더 어려운 언어의 경우 모든 문법을 구글링 없이 암기로 사용하고, 다른 사람의 코드를 읽는 것만으로도 프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려면 1년이 필요하다. 좋은 코드를 쓰는 실력있는 개발자가 되려면 2년에서 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누구나 인정하는 고수가 되려면 10년 이상의 세월이 투자되어야 한다. 그 기간 중에도 항상 새로운 것이 나오고, 발전하는 하드웨어에 따라 적용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이 개발자가 되어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혼자 개발하는 웹, 앱은 기업에서 수많은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가 만드는 제품을 상대하지 못할 것이므로 코딩을 배운다고 해서 당장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작동하는 게 마냥 신기해서 코딩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진다. 만약 우리가 컴퓨터와 사람이 대화하는 방법의 장점과 한계를 알게 되면 개발자들이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동원한 아이디어와 실수도 더 잘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작성 2022.3.20)
태양은 지구의 생물들이 사용하는 대부분 에너지의 근원이다. 식물은 태양의 빛 에너지를 이용하여 유기물을 합성하면서 자라난다. 동물들은 그 유기물을 섭취하여 에너지를 얻는다. 최상위 포식자가 다른 동물을 사냥하여 획득하는 영양분도 결국 태양 빛에서 나온 것이다. 수억년 전 태양의 에너지가 식물과 동물의 몸을 거쳐 농축된 화석연료는 18세기 이후 산업혁명에 필요한 귀중한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다. 바람이나 동물의 힘, 나무를 태워 나오는 열도 마찬가지로 그 시작은 태양이다.
태양 외의 다른 에너지원들은 저마다 단점을 안고 있다. 이 에너지들은 주로 중력, 전자기력, 핵력에서 비롯된다. 중력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의 힘을 통해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 하지만 물이 분포해야 한다는 제약이 있고 상대적으로 힘이 약하다. 전자기력은 전하가 흘러가는 조건에서만 생성된다. 번개 같은 특별한 현상이 아닌 이상 전하가 저절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핵력은 매우 강하지만 양자의 속박에서 벗어나면 자칫 인간에게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 인류는 원자력을 유용하게 이용하지만 아직 그 폐기물을 깨끗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앞으로 계속 번성하기 위해서는 태양과 결코 멀어질 수 없다. 화석 연료와 결별해야 하는 현재 지구의 상황에서 태양은 매우 중요하다. 태양의 에너지를 지금보다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면 안전하고 쾌적하게 인류 문명을 존속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 은하의 4천억개의 별 중 평범한 하나인 태양은 지금으로부터 46억년 전에 탄생했다. 지구를 비롯한 행성들도 그 시기 같이 탄생했다. 태양은 대부분 수소 및 헬륨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소, 탄소, 철, 황 등 다른 물질들도 있지만 그 양은 미미하다. 중심 핵에서는 4개의 수소 원자에서 1개의 헬륨 원자가 만들어지는 핵융합 반응이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초당 7억톤의 플라즈마 수소가 헬륨으로 변환되고 있다. 백두산 천지의 물 무게가 20억톤이니 단 1초만에 천지 호수의 1/3에 해당하는 양의 수소가 전혀 다른 성질의 헬륨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7억톤의 수소는 기체 상태로는 7.8x10^12㎥에 해당한다. 에베레스트산의 부피 2.4x10^12㎥(2,413㎦)의 세 배에 달하는 양이다. 비록 플라즈마는 정해진 부피가 없지만 매초 에베레스트산을 세번 쌓은 정도의 거대한 수소 덩어리가 헬륨으로 변신하는 놀라운 광경을 상상하면 태양이 생산하는 막대한 에너지의 양을 가늠해볼 수 있다.
수소가 헬륨으로 변환되면 질량 결손이 일어난다. 수소 안의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헬륨 원자핵 속 새로운 형태로 결합하면서 미세하게 질량이 감소하는 것이다. 이때 감소하는 질량만큼 에너지가 방출된다. 아인슈타인의 E=mc2은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를 나타내는 유명한 식이다. 태양에서는 1초에 400만톤의 질량 결손이 발생한다. 이를 통해 매초 3.8x10^26J만큼의 에너지를 생산한다.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1.1x10^23Wh에 해당하는 에너지이다.
태양이 1초간 내는 이 에너지는 인간의 수준을 초월하는 양이다. 만약 이 에너지를 모은다면 전 인류가 100만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 전세계 사람들은 1년에 16만TWh의 에너지를 쓴다(우리나라가 이용하는 양은 3,400TWh로서 전세계 소비량 대비 2%에 해당한다). 16만TWh는 다르게 표현하면 1.6x10^17Wh이다. 태양이 1초에 만들어내는 에너지 1.1x10^23Wh의 100만분의 1에 해당하는 미미한 숫자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역사가 길어야 30만년 정도이니 우리 인류가 지금껏 사용한 모든 에너지가 이 1초 분량의 에너지만큼도 되지 않는 것이다.
태양에너지는 빛의 속도로 8분 19초가 걸리는 1억 5천만km의 우주공간을 지나 지구에 도달한다. 대기권 밖에 도달하는 일률은 ㎡당 1초에 1,400W 정도이다. 대기를 뚫고 지표면에 도달하는 빛의 일률은 맑은 날에는 1,000W/㎡, 흐린날 550W/㎡ 정도이다. 1986년 독일의 입자물리학자 게르하르트 크니스(Gerhard Knies)는 사하라사막의 1.2%만 태양광 패널로 덮으면 전세계의 에너지 수요를 충당한다고 말했다. 그때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오늘날 기준으로도 간단한 계산으로 이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사시사철 맑은 사막에 내리쬐는 햇빛의 일률이 1,000W/㎡라 하면, 이 면적에 한 시간 동안 쌓이는 에너지는 1,000Wh이다. 하루 10시간, 일년 365일 태양이 비치고 태양전지효율이 20%라면 1㎡가 일 년간 생산할 수 있는 에너지는 730,000Wh(1,000Whx10시간x365일x20%)이다. 인류가 1년간 사용하는 16만TWh를 이 수치로 나누면 손쉽게 22만㎢(160,000x10^12/730,000)의 답을 얻을 수 있다. 한반도 면적과 비슷한 크기로서 총 면적이 920㎢에 달하는 사하라사막의 2%에 해당하는 크기이다. 비슷한 방법으로 우리나라가 1년간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한 태양광 패널의 면적도 산정할 수 있다. 연간 소비 에너지 3,400TWh를 이 수치로 나누면 약 4,700㎢가 나온다.
물론, 이 계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실현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다. 사하라사막에서 생산되는 막대한 에너지를 세계 곳곳으로 실어나르는 전력망을 만드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막막한 일이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의 경우 경기도의 절반 면적에 달하는 4,700㎢의 부지를 확보하는 것조차 까다롭다. 우리나라에는 사막처럼 일년 내내 태양이 내리쬐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여름철에 장마가 오고, 겨울철에 일조량이 적어지는 경우 발전량이 들쭉날쭉해진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는 지구 전체에 내리쬐는 초당 최대 1,000W/㎡의 에너지를 더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언젠가 인류는 지구와 태양 사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초당 수백만W/㎡의 에너지를 채취해 지구로 전송하는 기술을 개발해낼 지도 모른다.
인간으로서는 안타깝게도 태양은 언젠가 수명을 다한다. 과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앞으로 50억년 후면 태양은 내부의 수소를 다 태우고 백색왜성으로 변모해 서서히 식어갈 것이다. 이때가 되면 태양계의 모든 생명은 종말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그 마지막 날을 지금 그려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30만년을 간신히 살아온 인류가 50억년 후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인류는 예정된 50억년이 도래하기 한참 전에 태양과 비슷한 다른 별을 발견해서 주변의 멋진 행성으로 이주해서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천연가스는 온실가스를 가장 적게 배출하는 화석연료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천연가스는 탄화수소 성분의 연소성 기체이다. 메탄(CH4)이 70~90%로 주를 이루고, 에탄(C2H6), 프로판(C3H8), 부탄(C4H10) 등이 합쳐져 10~20%를 차지한다. 막 채굴된 상태에서는 질소, 황화수소, 이산화탄소, 산소 등도 일부 섞여 있다. 천연가스의 주요 구성 물질들은 석탄이나 석유에 비해 분자 구조가 단순하고 탄소 원자의 개수도 적다. 이 때문에 연소하면서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를 덜 배출한다. 동일 에너지를 기준으로 천연가스의 이산화탄소 발생량은 석탄 대비 50%, 석유 대비 75%가량이다. 게다가 액화천연가스(LNG; Liquified Natural Gas)로 변형시켜 운반하면 액화 과정에서 질소, 황, 분진까지도 제거되기 때문에 대기 중 배출되는 오염물질도 거의 없다.
이러한 성질 때문에 천연가스는 화석연료 임에도 '깨끗한 에너지'로 자리매김 해왔다. 운반하고 보관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점차 해결되면서 천연가스는 꾸준히 석탄, 석유를 대체해 왔다. 우리나라는 1990년대부터 도시가스를 가정용 난방 연료로 이용함으로써 연탄을 퇴출시켰다. 발전소에서도 천연가스를 이용하는 비율을 점차 높여 2010년대 말에는 전체 전기의 1/4을 천연가스로 생산했다. 1990년대부터는 도심 버스의 연로로서 압축천연가스(CNG; Compressed Natural Gas)를 도입해 대기 중 미세먼지를 저감하고 경유에서 나오는 매연도 줄이는 효과를 거뒀다.
천연가스는 온실가스 배출이 적다는 측면 외에도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발전 분야에서는 순식간에 타버리는 기체의 특성 때문에 적시에 빠르게 발전 터빈의 출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이로 인해 천연가스는 태양광, 풍력 같이 날씨에 따라 출력량이 달라지는 재생에너지를 보완해 줄 수 있다. 재생에너지가 미진하면 천연가스를 이용해 즉시 전기를 생산해내는 것이다. 블랙아웃을 방지하기 위해 안정적인 공급이 무엇보다 중요한 전력망 입장에서는 꽤나 안심이 되는 일이다. 안정성 측면에서도 우수하다. 천연가스의 주성분인 메탄은 공기보다 가벼워서 누출되어도 한곳에 고이지 않고 바로 날아가 버린다. 발화온도도 400~550도로 높아 폭발 위험도 적다.
천연가스는 장점만큼이나 한계도 뚜렷하다. 천연가스 발전의 온실가스 배출이 아무리 적더라도 배출량이 0에 가까운 재생에너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메탄은 이산화탄소의 20배에 달하는 온실효과를 지니기 때문에 공기중으로 날아간 메탄 가스는 자체적으로 지구 온난화를 유발하기도 한다.
운송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가스를 액화하거나 압축하는 기술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탱크에 주입해서 어느 곳으로나 쉽게 옮기고 쌓아놓을 수 있는 석유에 비해서는 번거로운 점이 많다. 벌크선이나 기차에 담기만 하면 되는 석탄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 때문에 액화기술이 개발되고 LNG선이 본격적으로 건조되기 시작한 1950년대 이전에는 천연가스가 대규모 에너지원으로 쓰이지 못했다. 석유와 마찬가지로 자원 배분이 불균형한 점도 큰 제한요인이다. 지구상 몇몇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LNG터미널이나 파이프라인 같은 거대한 인프라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오직 인프라가 완비된 경로를 통해서만 운송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급자가 수요자의 에너지 주권을 좌지우지할 위험성도 존재한다.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받는 유럽이 지정학적 변수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연가스의 인기는 한동안 꺼지지 않을 것 같다. 재생에너지의 기반이 충분하고 안정적으로 갖춰지고, 새로운 에너지원이 의미있는 규모로 성장하기 전까지 인류는 석탄과 결별하기 위해서라도 천연가스에 기댈 수밖에 없다.
천연가스 자원 보유국들은 산유국 못지 않게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수출 인프라 의존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천연가스는 생산국 순위와 수출국 순위가 상이하다. 생산국으로는 미국, 러시아, 이란, 카타르, 중국이 탑5에 위치한다(2021년). 수출국으로는 러시아, 미국, 카타르, 노르웨이, 호주 순이다. 러시아와 노르웨이는 유럽 각지로 향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많은 물량을 수출한다. 미국, 카타르, 호주 등은 LNG 형태로 액화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권역으로 가스를 수출한다.
우리나라의 자원 수급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LNG가 중요하다. LNG 공급량은 호주(8,700만톤), 카타르(7,700만톤), 미국(7,200만톤), 말레이시아(3,500만톤), 알제리(2,900만톤) 순이다(2021년, Statista). 이들이 수출한 LNG는 주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인도, 대만 등 아시아 국가에 공급된다. 미국도 아시아와 유럽 등지로 향하는 LNG 수출 물량을 빠르게 늘려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LNG 수입량은 연간 4,000만톤대에서 등락하고 있다. 석탄발전이 줄어들고 천연가스 발전이 늘어난다면 이 양은 점차로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매년 수입하는 4,000만톤의 LNG는 과연 어느 정도의 에너지일까? 에너지를 나타내는 단위는 MJ, kWh, kcal, Btu(British Thermal Unit)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가스의 양을 표시하는 기준만 해도 ㎥, Bcm(Billion cubic meter), L(Litter), ton, kg으로 제각각이다. 단위의 복잡함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많이 쓰는 척도를 이용해 큰 틀에서 감을 잡아 놓는 것이 좋다. 그런 다음 단위들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파악해 놓으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대응할 수 있다. 많은 것이 전기화되는 요즘 시대에 가장 널리 쓰이는 단위는 kWh와 kg이다. 에너지양이 클 때는 양 쪽 모두 1,000을 곱해서 MWh와 ton 단위를 쓰기도 한다.
에너지양을 가늠하기 위해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일반적인 4인 가정에서는 한달에 대략 300kWh의 전기를 쓴다. 성인 남자가 하루에 소모하는 에너지는 3.1kWh 정도이다. 전기차용 배터리에는 보통 70kWh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다. 석유 1kg에는 약 12kWh의 에너지가 들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에너지의 양은 수십, 수백kWh 정도이다.
천연가스 1kg에는 14kWh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다. 천연가스 4,000만톤에 담긴 에너지의 양은 무려 560TWh에 달한다. 전기차 배터리를 80억번 채울 수 있고, 성인 남자 5억명이 일년동안 사용할 만한 에너지이다. 우리나라에서 1년에 소비하는 전기의 양이 550TWh에 달하니 딱 그정도의 에너지를 LNG를 통해 얻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가 1년에 쓰는 전체 에너지 3,400TWh에 대비하면 약 16%를 천연가스를 통해 얻고 있는 셈이다.
천연가스 에너지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가정에서 사용한다. 우리가 겨울철에 더 이상 연탄을 쟁여놓지 않아도 되고, 등유 보일러에 쓸 기름을 부지런히 옮기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순전히 천연가스 덕분이다. 가스렌지에 쓰는 LPG통을 주기적으로 실어 나르지 않아도 되는 까닭도 마찬가지다. 카타르나 호주 등에서 뽑아진 천연가스는 거대한 LNG선에 실려 우리나라에 온 후 도시가스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각 가정까지 도달한다. 우리는 덕분에 스위치만 눌러도 방이 따뜻해지고 부엌에 가스불이 켜지는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 전기를 생산하는 데에도 천연가스의 기여는 지대하다. 천연가스는 겨울철에는 난방에 주로 쓰이지만, 전기 사용량이 폭증하는 여름철에는 발전 원료로 투입된다. 이 외에도 산업, 상업, 수송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도시가스와 압축가스 형태의 천연 가스는 두루 요긴하게 쓰인다.
천연가스의 에너지와 양은 kWh이나 톤 외에도 여러 단위로 기술된다. 뉴스나 도시가스 고지서에서 나오는 숫자들에 대한 감을 잡기 위해 이것들을 한번씩 훑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도시가스 요금을 산정할 때 많이 쓰는 것은 MJ이다. MJ은 kWh보다는 3,500배 작은 SI 열량 단위이다. 1MJ은 0.28kWh가량이다. 우리나라 가구는 평균적으로 월 2,000MJ(560kWh) 정도의 도시가스를 소비한다. 국제 천연가스 시장에서는 영미권 단위인 Btu(British Thermal Unit)를 사용하기도 한다. 1Btu는 1파운드(454g)의 물을 화씨1도(섭씨 0.556도) 올리는 데 필요한 에너지이다. 에너지 크기가 작기 때문에 시장에서는 백만Btu(MMBtu; Metric Million Btu)를 기준으로 잡는다. 1MMBtu는 290kWh이다. 국제적으로 천연가스 가격은 MMBtu당 1~10달러 사이에서 등락한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300kWh의 전기에 우리가 약 30,000원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는 것을 감안하면 운송비와 가공비가 들어가기 전 천연가스 원가가 10달러(12,000원)에 가까워지면 발전사 입장에서 얼마나 부담스러운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천연가스의 양을 측정할 때는 ㎥(Cubic meter)도 많이 쓰인다. 액화한 LNG는 무게로 양을 산정하지만 기체상태에서는 ㎥를 쓰는게 더 자연스럽다. 가스의 비중은 0.75kg/㎥이므로 1㎥ 기체의 무게는 0.75kg이다. 에너지로는 10.8kWh에 해당한다. LNG의 비중은 450kg/㎥으로 가스 비중의 600배이다. 따라서 1㎥의 기체는 액화하면 1.6L 패트병 크기로 줄어든다. 우리나라에서 잘 만드는 LNG선은 보통 17.4만㎥규모로 건조된다. 한 척당 2,400억원에 이르는 고가의 선종이다. 이 용량을 기체로 채우면 1.88GWh의 에너지, 즉 3,300가구가 한달 동안 사용하는 도시가스 양만큼만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스를 액화해서 채우면 그것의 600배인 200만 가구가 한달 간 쓰는 에너지를 담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대형 LNG 저장기지도 건설되어 있다. 평택, 인천, 통영, 삼척, 제주 5곳 기지 74기의 탱크에는 1,156만㎥(또는 kL)의 LNG를 담을 수 있다. 여기에 만약 기체를 채운다면 저장할 수 있는 에너지양은 125GWh밖에 안된다. 그러나 액체를 담으면 600배인 75TWh의 에너지를 모아둘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연간 가스 수요량의 13%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이다.
1kg의 가스가 가진 14kWh의 에너지면 스마트폰을 천번 이상 충전하고 성인 3명이 하루동안 살아갈 수 있다. 땅에서 나오는 가스를 포집해 긴요하게 이용하고 있는 인류의 지혜는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느 순간에는 이 가스가 주는 편리함과 결별하여야 한다. 앞으로도 많은 변화와 난관이 있겠지만 인류는 지혜를 발휘하여 새로운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수소는 우리에게 익숙한 에너지 사용 방식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원이다. 우리는 물질에 저장된 에너지를 뽑아내 사용하는 것에 숙달되어 있다. 그 물질은 과거로부터 나무, 석탄, 석유, 우라늄, 천연가스 등으로 바뀌어왔다. 지구 온난화로 석탄, 석유, 천연가스를 더 이상 맘 놓고 쓸 수 없게 되었고, 방사능에 대한 우려로 우라늄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라 수소의 부상은 매우 반갑다. 태양광, 풍력, 수력을 사용해 만든 전기는 매우 유용한 에너지임에 틀림 없지만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는 통에 든 연료를 어딘가로 날라서 쓰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다. 원유의 절반이 운송용 에너지원으로 쓰이는 것처럼 수송 분야가 특히 그러하다. 비행기나 선박과 같이 거대한 물체를 움직일 때에는 아무래도 배터리에 담긴 전기로는 여의치 않을 때가 많다. 수소는 화석연료와 결별해야 하는 우리를 위해 석유를 대신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아직 넘어야할 산이 많지만 수소 에너지 시스템에서는 기존 화석연료 인프라에 적용했던 기술을 상당 부분 활용할 수 있다. LNG선을 통해 액화 천연가스를 운송하는 것처럼 액체 상태 또는 암모니아로 변환한 수소를 배에 실어 옮길 수 있다. 곳곳에 설치된 도시가스 파이프라인처럼 수소 공급 파이프라인을 만들 수도 있다. 탱크로리에 수소를 담아 옮겨서 주유소 같은 수소 충전소에 저장하고, 이를 기름처럼 수소차에 주입해 쓰는 것도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자연 상태의 공기 중에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수소를 재생에너지를 통해 확보한다는 큰 개념도 이미 잡혀 있는 상태이다. 수소는 우주 구성 물질의 70%를 차지하는 흔한 원소이지만 수소 분자는 워낙 반응성이 좋아서 금방 다른 물질과 화합한다. 이 때문에 공기 중 기체 상태의 수소는 고작 0.00005%밖에 안 되고, 천연가스처럼 지층 속에 숨어있지도 않다. 이런 상황에서 수소를 얻으려면 지구에 풍부한 물에서 수소를 떼어내는 방법이 좋다. 물에서 산소와 수소를 분리하는 데에는 재생에너지를 사용한다. 태양광과 풍력은 생산량이 들쭉날쭉해서 과잉생산 시 버려지는 전기가 많다. 남아서 없어지는 전기를 이용해서 수전해 방식으로 탄소배출이 전혀 없는 '그린수소'를 생산하면 재생에너지의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다. 폐기하는 전기로 만든 수소를 운반해 필요한 곳에서 필요할 때 쓰면 재생에너지에 기반한 거대한 청정 에너지 시스템이 비로소 완성된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아직 수전해 설비 효율이 높은 것이 아니어서 그린수소의 생산비용은 꽤나 비싸다. 2020년 그린수소의 가격은 1kg당 4~5달러이다. 2030년에는 3달러, 2050년에는 1달러까지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나 어디까지나 희망적인 숫자이다. 1톤의 수소는 33MWh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1톤의 배터리가 저장할 수 있는 0.3MWh 전력량의 100배에 달한다. 물을 증류해 수소 1톤을 얻기 위해서는 약 13MWh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차피 남아서 버리는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라면 추가로 어딘가에서 끌어올 이유가 없는 에너지이긴 하다. 하지만 이 에너지를 빼준다면 생산 에너지를 제외한 1톤 수소의 순에너지는 20MWh, 1kg의 경우 20kWh가 된다. 한편, 석유 1톤의 에너지는 다소 높게 잡으면 12MWh 정도이다. 만약 석유 가격이 배럴당 80달러라고 계산하면 1달러로 살 수 있는 석유 에너지는 20kWh이다. 그러므로 20kWh의 에너지를 보유한 수소 1kg 가격이 1달러에 근접해야만 석유와 대비해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석유값이 오르면 가격에 더 많은 여유가 생김은 물론이다. 노르웨이의 넬은 2025년에 kg당 생산단가를 1.5달러에 맞출 것으로 보고 있고, 미국은 2026년에 kg당 2달러를 달성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21년 미국 에너지부장관은 30년까지 그린수소의 kg당 가격을 1달러로 낮추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그린수소 생산을 위한 각국의 수전해설비 경쟁도 치열하다. 독일은 55MW의 수전해설비를 운영하고 있으며, 일본은 10MW급을 구축했다. 우리나라는 21년 기준 3MW급 설비를 실증하고 있다. 유럽은 24년까지 6GW 설비를 구축해 100만톤의 그린수소를 생산하고, 30년까지 40GW를 마련해 1,000만톤까지 생산규모를 올릴 계획이다.
수소의 가격 경쟁력에서 또 다른 고려 요인은 운반 비용이다. 생산에도 비용이 많이 들지만 이송도 만만치는 않은 과제이다.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지역은 대부분 수요처인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를 옮기려면 액화, 수송, 저장 등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천연가스의 액화 온도가 영하 161도인 것에 비해 수소의 액화 온도는 영하 253도에 달하기 때문에 액화에 보다 많은 에너지와 기술이 필요하다. LNG선처럼 큰 배로 옮길 때 기화되지 않게 관리하는 것도 더 까다롭고 비용이 많이 든다. 수출입 터미널을 건설하고, 평택, 인천, 통영, 삼척, 당진 등의 LNG 기지처럼 대규모 저장시설을 설치하는 금액도 상당하다. 사용장소까지 탱크로리로 운송하는 비용, 곳곳에 충전소를 설치하고 유지하는 비용도 전부 최종 소비자가격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잘 해결되어 수소를 일상적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크게 2가지 방식이 활용될 것이다. 하나는 연료전지(FC; Fuel Cell)이다. 현재 수소차에서 널리 이용되는 방식으로 수소를 이용해 연료전지 스택에서 전기를 생성하는 방법이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 물이 될 때 만들어지는 전기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다. 당초 재생에너지를 활용해 물을 전기분해하는 것의 역반응이다. 이 때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는 반응은 매우 느리기 때문에 이를 촉진하기 위해 백금 촉매를 사용한다. 이 백금이 사용된 막전극접합체(MEA; Membrane Electrode Assembly)는 수소 연료전지 시스템 가격의 50%를 차지하는 핵심 부품이다. 수소차에 들어가는 백금 가격만 200~300만원에 달할 정도이다. 연료전지는 고분자전해질막(PEM; Polymer Electrolyte Membrane)을 이용하는 PEMFC 방식과 고체산화물(Solid oxide)을 이용하는 SOFC 방식으로 나누어진다. 현재 각각의 방식에서 효율성을 높이고 백금 촉매 등을 다른 물질로 대체하여 가격을 떨어뜨리는 기업간 경쟁이 치열하다.
수소를 활용하는 다른 하나의 방식은 수소터빈이다. 발전소에서 돌리는 터빈의 원료로 수소를 사용하는 것이다. 수소터빈은 현재 우리나라 전력 생산의 26%를 담당하는 LNG 터빈을 개조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실증에 성공한다면 2030년에는 40조원 시장으로 크게 성장할 전망이다(일본 야노 경제연구원). 현재 우리나라는 5MW급 수소전소 터빈을 개발하고 있으며, 24년까지 수소와 LNG를 혼소한 300MW 터빈을 상용화할 계획이다.
지금도 많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수소 생태계 하나하나에 해당하는 제품과 공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가열차게 노력하고 있다. 운송탱크에 사용되는 탄소섬유의 강도를 높이고, 백금 촉매를 대체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수소 터빈에서 고온에 견디는 재료를 개발하는 등 현안 하나하나에 많은 인력과 자금이 투입된다. 창의와 집념으로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는 분야이므로 우리나라가 큰 강점을 발휘할 것이다. 게다가 AI와 빅데이터, 디지털트윈의 도움으로 신소재와 공정 개발도 그 어느 때보다 용이해졌으므로 조만간 의미있는 성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수소가 화석연료를 대체해가는 또 다른 역사를 지켜보는 중이다. (작성 2022.1.28)
석유화학 산업은 1966년 중공업산업 육성을 기획한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제철과 함께 핵심 육성사업으로 선정된 후 지금껏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으로 자리하고 있다. 1966년 미국의 컨설팅업체(ADL)는 허허벌판인 울산에 만들어질 석유화학단지는 소규모인 3.2만톤 규모가 적정하다고 평가했다. 이 수치가 무색하게도 현재 우리나라는 석유화학의 한 품목인 에틸렌만 1천만톤 이상을 생산할 정도로 거대한 산업을 일구어냈다. 석유화학은 1968년 3월 22일 울산 단지의 합동기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오늘날은 석유화학 공업의 시대이다. 일본 경제가 급격한 성장을 하고 있는 것은 석유화학 공업에 기인한다"고 할 정도로 당시 주류 흐름에 올라탄 산업이었다. 울산 공단은 1972년 최초 공장 준공 후 계속 체질을 개선하여 현재도 전국 화학제품 생산액의 35%를 담당하고 있다. 2020년 기준으로 62조원의 매출을 올리고 212억 달러를 수출(한국석유화학협회)하는 거대한 공단이다. 울산 외에도 1979년 조성된 여수, 1991년 건설된 대산 등 국내 3대 석유화학 단지의 위용은 건재하다.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은 나프타분해공정(NCC; Naphtha Cracking Center)이 주를 이룬다. 나프타는 원유를 880도 온도에서 분해하여 만들어지며, 올레핀(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방향족(벤젠, 톨루엔, 자일렌)과 같은 원료를 생산한다. 올레핀에서 만들어지는 에틸렌은 석유화학의 쌀이라고 불리며 플라스틱, 비닐, 건축자재, 페인트 등 실로 다양한 화학제품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프로필렌으로 만드는 폴리프로필렌(PP)은 환경호르몬을 배출하지 않아 음식용기, 의료기기 등 우리 몸에 닿는 제품에 쓰인다. 부타디엔은 합성고무의 원료로서 타이어, 운동화 등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방향족 화합물은 BTX 제조공정을 거치며 벤젠, 톨루엔, 자일렌 같은 물질을 생산한다. 이들은 옷을 만들 때 사용되는 합성섬유의 원료가 된다. 이 같은 공정은 매우 복잡하고 여러 단계를 거친다. 과정마다 사용하는 촉매도 다양하기 때문에 화학공장은 복잡한 파이프라인이 뒤얽혀 있다.
에틸렌, 프로필렌, 부타디엔, 벤젠, 톨루엔, 자일렌과 같은 기초유분을 생산하는 과정을 업스트림 공정이라고 한다. 이를 활용해 3대 유도품(합성수지, 합성고무, 합성섬유)과 여러가지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후속 작업을 다운스트림 공정이라고 한다. 에틸렌을 이용한 합성수지는 다양한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고, 부타디엔을 활용한 합성고무는 천연고무에 비해 열에 약하긴 하지만 마찰력이 우수하고 금속과의 밀착력도 좋아 산업용으로 널리 쓰인다. 벤젠, 톨루엔, 자일렌에서 파생된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 폴리염화비닐 등 합성섬유는 오늘날 누구나 싸고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게 해 준 일등공신이다.
석유화학제품은 철과 함께 제조업의 기초가 된다. 석유화학 제품의 가격은 완제품의 이윤에 큰 영향을 미치고, 수급은 경기 확장기의 생산량 극대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이 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석유화학 사업에 욕심을 냈다. 1986년에는 그동안 신규사업자의 진입을 규제해 오던 '석유화학공업발전법'이 폐지되면서 다수의 기업이 경쟁적으로 시장에 진출했다. 그 결과 1990년대에는 원래부터 사업을 영위해 온 회사와 신규 회사가 뒤섞여 석유화학의 춘추전국 시대가 열렸다. LG, SK, 삼성, 현대, 롯데, 한화, 효성, 동양, 대림 등 대기업을 비롯해 대한유화, 삼남석유화학, 율촌화학, 국도화학 등 다양한 화학기업이 번창했다. 화학기업들은 2000년대 초 중국의 강한 경제성장에 영향을 받아 소위 '차화정' 장세를 이끌며 고속 성장을 했다. 1999년에는 대림과 한화가 NCC 설비를 통합해 여천 NCC를 설립했고, 2015년에는 삼성이 삼성종합화학, 삼성토탈 등 화학계열사를 한화에 매각하는 등 큰 폭의 업계 지각 변동도 있었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IMF,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사태 등 고비를 견뎌냈고, 중국, 중동 등 후발주자의 거센 추격도 잘 이겨냈다. 현재 국내 화학기업들은 산업 태동 초기와 유사하게 NCC를 기반으로 올레핀, 방향족을 생산하는 종합 화학 사업을 유지하면서 글로벌 규모를 영위하고 있다. 국내 1위인 LG화학은 매출 39조에 이르는 세계 9위의 업체이다. 롯데케미칼은 매출 12조원 규모이며 미국에 ECC 공장을 신설하는 등 원료의 다변화와 글로벌 생산기지 확장을 추진하고 있다. M&A에 성공한 한화그룹은 그룹 전체 매출 52조원, 한화토탈 매출 10조원, 한화솔루션 석유화학부문 매출 5조원의 실적을 보이며 견실한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2050년 탄소중립 달성에서 있어서 석유화학은 중요한 산업군이다. 석유화학은 2018년 기준 연간 4,700만톤의 탄소를 배출하고 있으며, 이는 전체 산업 부문 총 배출량(2억 6천만톤)의 18%에 해당한다. 석유화학은 온실가스 배출을 줄여야 하는 주업종이면서도 태양광패널, 풍력터빈, 전기차 부품 등 친환경 재료 제조를 책임지는 산업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석유화학 산업에서 배출하는 탄소를 줄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원료와 연료를 대체하는 것이다. 우선 원료를 원유 기반의 나프타에서 바이오매스나 폐플라스틱으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체 석유화학 소비 에너지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대표적인 에너지 다소비 공정인 나프타분해공정의 에너지 사용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도 요구된다. 높은 온도를 필요로 하는 석유화학 공장에서는 대부분 중유(벙커C유)를 연료로 사용한다. 중유는 연소시키기는 어렵지만 발열량이 크고, 화재 위험이 적으며, 가격이 싸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전기가열로(E-Furnace)나 바이오매스 보일러로 대체하면 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효과적인 촉매 기술 개발, 디지털 기술 전환, 노후설비 교체 등을 통해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작업도 수반되어야 한다. 정유와 석유화학을 통합한 COTC(Crude Oil to Chemicals) 공정개발도 전체 에너지 사용량을 줄일 수 있는 해결책이다.
이는 하나 같이 쉬운 작업이 아니다. 바이오매스와 폐플라스틱을 기초유분으로 전환시킬 경우 생산 효율은 아무래도 원유기반의 나프타를 사용할 때 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 바이오매스와 폐플라스틱 자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도 어렵고, 심하게 변동하는 가격도 문제이다. 값이 싼 중유를 연료로 쓰는 대신 전기가열로를 도입할 경우 원가 경쟁력도 잘 따져봐야 한다. 화학단지에서 대규모 전력을 소모하게 됨에 따른 탄소 배출 저감 국가 전력망 설계도 필요하다. 수십년간 운영해온 석유화학 산업 발전 과정에서도 아직 발견되지 않은 혁신적인 촉매를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까다로운 일임에 분명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외국계 컨설팅 회사가 3.2만톤이면 적당하다고 했던 산업규모를 그 수천배로 키워냈듯이 우리에게는 기적을 이뤄내는 저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석유화학 산업이 탄소를 줄이는 방법을 개발하면 탄소국경세나 배출권 거래제 등에서 다른 나라보다 월등한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또한 궁극적으로 지구의 위기를 구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석유는 명실상부한 인류의 핵심 에너지원이다. 전세계는 1년에 365억 배럴가량의 석유를 소비한다. 1배럴의 석유가 약 1.7MWh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6만TWh 정도의 에너지를 석유에서 얻어 쓰고 있는 셈이다. 몇 가지 지표를 비교하면 석유가 생산하는 이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
인류가 1년에 쓰는 총 에너지의 양은 5억8천만TJ, 16만TWh이다(Worldcounts). 이를 바탕으로 산정하면 인류는 전체 사용 에너지의 40%를 석유에서 얻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연간 전기에너지 사용량이 550TWh('20년), 석유에너지 사용량이 1,600TWh(9.3억 배럴, '19년)임을 감안하면 전세계 석유에서 나오는 6만TWh가 얼마나 큰 에너지인지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 5,000만 인구가 1년에 소비하는 에너지의 총량 약 3,400TWh에 비교해도 역시 압도적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여 제품을 제조한 후 외부로 수출하는 우리나라가 1년간 쓰는 모든 에너지의 20여배를 세계인들은 오로지 석유에서만 뽑아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석유 에너지는 근원적으로 태양에서 온 것이다. 그 옛날 태양 에너지를 받아 식물이 자랐고, 그 식물을 섭취하여 공룡이 번성하였으며, 그 공룡이 땅 속에 묻혀 석유가 된 것이다. 태양은 예전 공룡이 살고있던 시절은 물론이고 지금도 지구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지표면에는 제곱미터당 약 1,000와트의 태양 에너지가 내리쬐고 있으며, 초당 축적되는 에너지의 합은 17만TWh에 이른다. 지표면에 떨어지는 1초의 태양에너지만 잘 모으면 인류가 1년동안 사용할 총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에너지를 전부 활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태양광 패널로 전 지구를 덮을 수도 없고, 설령 덮는다 해도 현재의 기술로는 20~30%의 효율로 에너지를 저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양에너지가 유발하는 자연 현상인 바람과 파도를 이용해서 에너지를 뽑아내는 것도 설치 면적과 전환 효율로 인해 전체 에너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의 태양에너지가 농축된 형태로 저장된 석유는 매우 유용한 에너지원이다. 석유는 상온에서 안정된 형태의 액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채취부터 사용에 이르기까지의 취급이 매우 간편하다. 탱크에 넣어 어딘가로 운송하는 것도 꽤 저렴하고 안전하다. 정제 기술이 발전하면서 석유로부터 다양한 용도에 맞는 제품을 분리할 수도 있게 되었다. 게다가 19세기말 내연기관이라는 엔진까지 개발함으로써 최대 40~50%의 높은 효율로 에너지를 뽑아쓸 수 있는 방법까지 개발한 상태이다. 매장량도 인류가 그동안 충분히 사용해왔고 앞으로도 한동안 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편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석유는 20세기부터 21세기까지를 관통하는 부의 원천이 되고 있다. 석유를 보유한 나라들은 그렇지 않은 나라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걷어들이고 있다. 강대국들은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무한 경쟁을 벌여 왔고, 미국은 석유를 달러를 통해서만 거래하게 함으로써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공고히 유지하고 있다.
미국은 최초로 시추를 통해 땅 속에서 석유를 뽑아 올려 상업화한 국가로서 석유와 관련한 표준을 정립하였다. 석유의 단위로 쓰는 '배럴(Barrel)'도 초기 미국의 석유 산업에서 기인한 것이다. 오늘날 그 어떤 국가와 기업도 배럴통에 넣어서 석유를 거래하거나 운반하지 않음에도 배럴은 석유 부피를 산정하는 기본 단위로 쓰인다. 미국에서 초기에 석유가 생산되었던 펜실베니아에서는 시추한 석유를 아무 용기에나 넣어서 보관했다. 이렇게 하다보니 계량과 운반에서 문제점이 발생했다. 업자들은 미국 내에서 석유를 옮길 때 위스키 통에 넣어서 운송하는 방법을 착안하였다. 당초 배럴 통 단위인 40갤런에 운송과정에서 누출되는 2갤런을 더해서 42갤런을 통에 넣어 계량도 표준화했다. 석유의 가격 단위로 쓰는 '$/bbl' 에서 bbl은 당시 업계를 주도했던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에서 쓰는 파란색 배럴통(Blue barrel)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운송 과정에서 누출을 감안해 추가로 넣었던 2갤런을 표현하기 위해 'b'를 두개 사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게 미국과 영국에서 사용하는 갤런이 부피 단위가 되다 보니 석유 1배럴을 SI 유닛으로 쓰면 다소 복잡해진다. 1배럴의 석유는 159.987리터이고, 물보다 가벼운 석유의 비중은 0.88 정도이므로 1배럴의 무게는 약 140kg이다.
세계인이 1년간 쓰는 총 365억 배럴의 석유를 하루 단위로 나누면 약 1억 배럴이다. 미국은 그 중 2천만 배럴을 쓰고, 중국 1,300만 배럴, 인도 520만배럴, 일본 390만 배럴, 사우디 370만 배럴 순으로 석유를 사용한다(2019년). 생산량 기준으로는 사우디와 러시아가 각각 1천만 배럴을 생산하고, 미국이 890만 배럴, 이라크가 450만 배럴을 뽑아낸다. 그 뒤를 이어 이란, 중국, 캐나다가 각각 400만 배럴 내외를 생산하고, UAE, 쿠웨이트도 300만 배럴 내외를 산출한다. 석유 수요는 하루 1억 배럴로 꾸준하고, 생산국가의 집중도가 워낙 높기 때문에 한두 국가의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국제 원유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은 전략적 비축유로 보통 약 7억 배럴을 보유하는데, 가격이 불안정할 경우 비축유의 일부를 방출한다. 1960년에 결성된 오펙(OPEC) 13개국 외에 러시아, 멕시코, 말레이시아 같은 비오펙 10개국까지 포함된 오펙플러스(OPEC+)도 필요할 경우 하루 수십만 배럴의 증산을 결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로 인한 추가 공급량도 전세계 수요에 비하면 그 양이 작기 때문에 석유값은 간헐적으로 큰 폭으로 폭등하여 세계인의 근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로서 가장 큰 에너지원을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구조적인 숙명을 안고 있다. 우리나라의 석유 소비는 세계 8위이고, 석유 수입은 세계 5위이다. 일년에 쓰는 석유는 9.3억 배럴, 하루 소비량은 280만 배럴 정도이다(2019년). 원유를 수입하는 데에만 1년에 거의 700억달러, 약 85조원에 가까운 돈을 쓴다(2019년). 다른 나라들처럼 전략적 비축유로 1억 배럴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원유를 고품질유로 정제하여서 수출하는 사업으로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한다. 이는 세계 6위 규모의 정유산업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정유업에서는 '크랙마진'이라고 하는 고도화 설비 정제에 따른 부가가치가 매우 크다. 원유를 증류탑에서 가열하면 낮은 온도에서는 휘발유 같은 고품질 제품이 나오고, 높은 온도에서는 질이 낮은 벙커C유(중유)나 아스팔트가 생성된다. 크랙마진은 원유 가격보다 싼 벙커C유나 아스팔트를 2차로 정제하여 경질유로 만들어서 판매하는 마법같은 기술이다. 벙커C유는 불을 붙이기는 어렵지만 열량이 높아 발전소나 공장에서 연료로 많이 쓰였다. 1970년대만 해도 세계 석유 소비량의 1/3을 차지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기오염물질과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아 최근에는 LNG 등으로 연료가 대체되어 그 비중이 1/10로 감소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쓰임새가 줄어드는 벙커C유를 가격이 비싸고 활용도가 높은 휘발유, 등유, 경유 등으로 만들어내는 공정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외에도 기계류에 널리 쓰이는 고품질 윤활유를 제조하는 등 수익원을 다변화함으로써 외국의 경쟁사와 차별화하고 있다. 2018년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5개 정유공장은 하루 320만 배럴의 석유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이런 정유 공정을 통해 석유 수입에 사용한 금액의 절반을 다시 달러로 벌어들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정유사들은 정제 기술을 고도화하는 한편 탄소중립의 시대에 대비해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다. 인류가 석유와 단번에 이별할 수는 없지만 서서히 석유를 적게 쓰는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정유사들은 다양한 신사업에 도전하고 있다. 전기차 시장 확대에 따른 윤활유 개발, 전기차 충전소 사업, 배터리 대여, 리사이클링 사업 등 전기차 시대에서도 차량의 에너지 공급원으로 역할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바이오 원료를 이용해 화이트바이오(식물자원과 생명공학 기술을 활용해 소재와 에너지를 생산) 제품을 제작하고, 미생물 천연원료를 활용해 친환경제품을 만들고, 폐플라스틱으로 기능성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등 소재 사업에도 뛰어드는 중이다. 수소연료전지 제작, 블루수소 생산(천연가스로 수소를 생산하고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CCS기술로 포집해 저장) 등 수소 경제에서도 주도권을 차지하려 하고 있다. 석유는 에너지원의 왕좌 자리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석유가 물러난다면 그 자리는 어떤 에너지원이 차지하게 될까? 변화는 느리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굉장히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다.
철은 기원전 1200년경부터 지금까지 3천여년의 기간 동안 인류 생활을 지탱하는 핵심적인 소재이다. 철은 지구의 지각에서 5%의 중량 비율을 차지하는 비교적 흔한 원소이다. 무게 순으로 산소(47%), 실리콘(28%), 알루미늄(8.1%)에 이어 4번째를 차지한다. 이에 비해 청동기 시대의 주원료였던 구리는 지각내 비율이 0.0075%(75ppm)에 불과할 정도로 귀한 금속이기 때문에 확장성에 한계가 있었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채굴할 수 있었던 철은 일상 속 도구의 재료로 쓰여 세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현대에도 철은 문명의 중심으로서 위치를 놓지 않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플라스틱이 늘어났기는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철이 쓰이지 않은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건물, 교량, 자동차, 선박, 가전, 기계 등 요소요소에 철강 제품이 들어간다. 워낙 쓰임새가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 같은 산업 국가에서 철을 생산하지 않고 수입하여 제조업을 영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2020년 기준 조강 생산량에서 세계 6위에 위치한다. 조강(Crude steel)은 탄소를 첨가하여 만든 강철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가공되기 전의 원재료로서 철을 뜻한다. 우리나라 조강 생산량은 약 7천만톤 수준이다. 우리보다 순위에서 앞선 국가는 중국(10억톤), 인도(1억톤), 일본(8천만톤), 미국, 러시아(각각 7천만톤)이다. 미국, 러시아와 우리나라의 생산량은 엇비슷한 정도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중국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철강의 슈퍼사이클이 도래했다. 제철의 후방산업인 자동차, 조선, 건설 경기가 폭발했기 때문에 철강의 수요가 높았다. 중국은 이 때 대규모로 철강 증설 작업에 돌입하였고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계속 생산량을 늘렸다. 우리나라도 2010년 현대제철이 포스코에 이어 철광석을 녹여 쇳물과 제품까지 모두 만드는 일관제철소 건설을 완료하면서 조강 생산량을 기존 6천만톤 수준에서 7천만톤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제철소에서 쇳물을 생산하는 설비를 고로(Blast furnace)라고 한다. 고로 한기를 건설하는 데에는 3~4조원의 엄청난 투자비가 든다. 한번 고로를 가동하면 연간 300~400만톤의 쇳물을 쉬지 않고 만들어낸다. 1973년 6월 9일 고박태준 회장이 첫 쇳물이 나오던 순간 만세를 부르던 사진으로 유명한 포항제철의 제1고로는 무려 48년 6개월간 타오르다가 2021년 12월 29일 종풍식을 끝으로 가동을 멈췄다.
고로에서는 철광석 내 철원소와 결합되어 있던 산소가 떨어져 나가는 작업이 일어난다. 이 화학반응을 위해서는 철광석과 유연탄이 필요하다. 자연상태의 철광석은 여러가지 원소가 섞인 상태이기 때문에 품질을 고르게 만들고 석회석과 같은 부원료를 넣어 5~50mm의 일정한 크기로 만드는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소결공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면 철광석이 고로에 넣기 좋은 성분과 크기를 갖춘 상태가 되는데 이를 소결광이라고 한다. 소결광과 대비되는 것으로서는 채굴할 때부터 고로에 넣기 좋은 크기로 생산된 정립광, 극미분의 철광석을 둥근 형태로 소성시켜 만든 펠릿이 있다. 우리나라는 주로 소결광을 사용하는데 유럽 등 국가에서는 펠릿을 쓰는 경우가 많다.
고로에서 철을 가열하는 연료로서는 유연탄을 사용하는데 이 또한 사전 준비작업을 거쳐야 한다. 유연탄을 1000도 내외로 가열하는 공정을 거치면 코크스(Cokes)를 만들 수 있다. 높은 온도에서 16시간 동안 쪄서 수분이나 휘발 성분을 배출하고 단단한 고체로 만든 것이다. 코크스는 용광로 안에서 철광석을 녹이는 에너지원으로 사용됨과 동시에 철광석 중의 산소를 철과 분리시키는 환원제로서 역할도 한다. 경제성을 고려할 때에는 코크스를 굳이 만들지 않고 석탄을 0.125mm의 미세한 크기로 파쇄한 미분탄을 연료로 쓰기도 한다.
높이가 110m나 되는 고로 위에서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로테이션 슈트가 소결광과 코크스를 사전에 계산된 정확한 위치로 떨어뜨린다. 이 과정을 효율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 고도의 기술과 경험이 요구된다. 고로 아래 열풍구에서는 1200도에 이르는 뜨거운 바람을 일정하게 불어넣는다. 바람에 의해 소결광과 코크스는 고로 내에서 공중 부양을 하는데 일차로 코크스와 산소가 반응을 해 일산화탄소가 생성된다. 일산화탄소는 철광석 내 산화철을 환원시켜 이산화탄소와 순수 철을 생성한다. 단순화해서 애기하면 코크스의 탄소와 공기중 산소, 철에 붙은 산소가 만나 일산화탄소, 이산화탄소 같은 부생가스를 만드는 것이다. 부생가스는 고로 위의 파이프를 통해서 바깥으로 배출되는데 이는 바로 지구의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 가스를 채집하여 제철소의 동력원으로 쓰기도 하지만 탄소를 다량 함유한 코크스를 연료, 원료로 쓰는 지금의 고로 공법을 유지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온실가스가 배출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현재 우리나라 철강산업에서는 연간 1억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산소가 떼어내진 순수한 철은 코크스 내의 일부 탄소와 결합해 뜨거운 액체 상태로 고로 아래로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쇳물(조강)이다. 이 과정은 광석으로부터 금속을 추출하는 것으로 제련(Smelting)이라고 한다. 이후 쇳물은 정련(Refining) 작업을 거쳐 다양한 형태의 제품으로 변형된다. 휴지처럼 말린 열연강판, 열연을 상온에서 압연한 얇은 두께의 냉연강판, 두꺼운 판재인 후판, 원형 단면의 선재(Wire-rod), 다양한 합금의 특수강, 파이프 형태의 강관, 철근 같은 봉형강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고로에서는 쇳물 외에 부산물로 슬래그(Slag)도 배출된다. 슬래그에는 철광석 암석에 포함된 이산화규소(SiO2), 산화알루미늄(Al2O3), 소결광을 제조할 때 투입한 석회석 성분(CaO) 등이 섞여 있다. 이 때문에 슬래그는 건축용 시멘트나 농업용 비료로서 유용하게 활용된다.
고로는 오랜 운영 경험을 거치며 굉장히 효율적인 설비로 발전해왔다. 24시간 불을 끄지 않고 연속조업이 이루어지는 동안 내부 온도, 압력, 쇳물 상태 등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기술도 발전했다. 부생가스나 슬래그 등 각종 부산물도 산업적으로 재활용하기 때문에 폐기물도 적고 원가 효율도 매우 높다. 그러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근본적인 특징으로 인해 철강업은 이처럼 매우 잘 정립된 고로 공법을 포기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철스크랩(고철)을 녹이는 전기로(Electric furnace)에서도 쇳물을 생산할 수 있다. 전기로 한기당 3천억~5천억의 투자비가 들어가고 한기당 연간 50~100만톤 쇳물을 생산하는 대규모 사업이다. 전기를 사용해 열을 조정하므로 가동률 조정도 고로에 비해 용이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석탄 연료보다 비싼 전기요금은 원가 경쟁력에 있어서 불리한 요소이다. 대부분 전기로(Electric furnace) 제철소에서는 전기요금에 누진세가 적용되는 여름철에 보수 작업을 한다. 철스크랩을 사용하기 때문에 불순물이 함유될 가능성이 크므로 조강의 품질이 고로 생산품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이 때문에 전기로에서 만들어진 철은 높은 품질이 요구되는 산업용 열연강판, 냉연강판 등을 만드는데 쓰이지는 못한다. 대신 건설용 철근(봉형강)을 만드는 데에 주로 사용된다. 철스크랩 가격이 계속 올라가고, 수급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도 걱정거리다.
이런 상황에서 코크스가 아닌 수소를 철광석의 환원제로 쓰는 수소환원제철이 철강산업의 온실가스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철광석 속 산소를 탄소와 만나게 하면 필연적으로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니 수소와 결합시켜 물을 만들어 배출하게 하는 원리다. 강한 결합력을 가진 탄소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미 유사한 공법이 적용되고 있다. 포스코에서는 2003년부터 파이넥스(FINEX) 공법을 개발해 상용화하고 있다. 파이넥스 공법은 가루 형태의 철광석과 일반 유연탄을 환원로에 곧바로 투입해 쇳물을 제조하는 공정이다. 철광석에서 산소를 떼어내 철을 만드는 유동환원로와 환원된 철을 유연탄으로 태워서 녹이는 용융로로 구분이 되어 있다. 용융로에서 유연탄을 태울 때 발생하는 일산화탄소와 수소 가스를 유동환원로에 통과시켜서 철광석에서 산소를 분리한다. 이때 적용되는 수소 투입 기술과 가공하지 않은 자연상태 철광석에서 산소를 바로 제거하는 직접환원철(DRI; Direct Reduced Iron) 제조 기술이 수소환원제철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이미 우리나라에서는 파이넥스 제철 공장 2기가 가동되고 있어 실용성도 입증되었다. 철광석을 소결하는 공정과 유연탄을 코크스로 쪄내는 공정이 없으니 환경오염이 적고, 제조 비용도 적게 드는 장점도 있다.
현재 철강사들은 수소환원제철의 표준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이는 각 나라에서 사용하는 철강 제조 공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주로 샤프트형 고로로 철을 생산한다. 소결광과 코크스 함께 넣어 가열하는 대신 극미분의 철광석 분말을 뭉쳐 만든 펠릿 사이로 고온의 천연가스를 넣어 환원작용을 일으켜서 철을 뽑아내는 공법이다. 이 방식에서 천연가스를 수소로 바꾸기만 하면 바로 수소환원제철 공법이 된다. 이를 샤프트 미드렉스 방식(Shaft Midrex)이라고 부른다. 문제는 광산에서 가져온 분철 광석을 바로 사용할 수 없고 고품질의 펠릿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값비싼 펠릿을 원료로 사용하므로 이를 수입해야 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수급이 불안정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가 표준화하려고 하고 있는 유동환원로는 분철광석을 바로 넣을 수 있어서 가격과 수급 면에서 매우 유리하다. 저급 분철광석은 전세계 철광석 매장량의 80%를 차지하는 흔한 자원이다. 수소와 일산화탄소를 이용해 유동환원로에서 철을 직접 환원하는 파이넥스 공법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도전할 만한 방식이다. 우리나라는 이를 하이렉스(HyREX)라고 명명했다. 이 방식이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다수의 철강사들이 공동 투자와 기술 개발로 시행착오를 줄여나가야 하기 때문에 세계 철강사들과 협력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산업의 쌀인 철을 온실가스 배출 없이 경제적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안겨주는 부가가치는 엄청날 것이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해 나간다면 다른 나라보다 좋은 품질의 철을 가장 에너지 효율적이고 깨끗한 방식으로 생산하여 1970년대 영일만에서 만들어냈던 철의 기적을 다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1910년 11월 준공된 부산세관 본청사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현재는 남아 있지 않고, 두번째 철근 콘크리트 건축으로서 1912년 1월 준공된 한국은행 본점은 현재까지도 건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유럽과 미국에서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콘크리트는 지금까지 대부분 건축물의 기본 재료가 되어 오고 있다. 1970년대부터는 철강과 유리만을 이용해 고층건물을 올리는 커튼월(Curtain wall) 공법도 유행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도시는 '콘크리트 숲'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콘크리트에 의존하고 있다.
콘크리트는 시멘트, 물, 자갈, 모래를 섞어 만드는 재료로서 가장 중요한 성분은 역시 시멘트이다. 지하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에서 유독 시멘트의 주원료인 석회석만큼은 매우 풍족한 편이다. 석회석은 우리나라 전체 광물 생산량의 70%를 차지한다. 강원도의 동해, 삼척, 영월, 충청북도의 단양, 제천을 중심으로 석회석이 풍부하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자연스럽게 시멘트 제조시설이 많이 분포한다.
우리나라는 연간 5천만톤 내외의 시멘트를 생산한다. 일반적으로 콘크리트 안에는 중량 기준으로 10~15%의 시멘트, 5~10%의 물, 75~85%의 자갈, 모래가 들어간다. 시멘트 비율을 10%로 단순 계산하면 연간 5천만톤의 시멘트로는 5억톤의 콘크리트를 만든다고 어림짐작 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매년 300억톤에서 400억톤의 콘크리트가 사용되니 결코 적은 비율이 아니다. 20층짜리 아파트 한동의 콘크리트 무게가 약 1만톤 정도라고 가정하면 무려 5만동의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시멘트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채굴한 석회석을 분쇄한 다음 점토와 섞어 소성로(Kiln; 킬른)라는 곳에서 1450도~2000도로 가열하는 초고온 소성공정을 거쳐야 한다. 석회석과 점토가 소성로에서 구워지면 3~25mm의 소괴(Clinker, 클링커, 불에 탄 덩어리라는 의미)가 만들어진다. 이 소괴를 부숴서 석고(황산칼슘, CaSO4)와 혼합하면 우리가 아는 시멘트 분말이 완성된다. 소성로를 가열할 때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데, 이 때 연료로서 유연탄을 주로 사용한다. 70년대까지는 석유화학 공장과 마찬가지로 값이 싼 중유(벙커C유)를 주연료로 사용했었는데 1979년 중동 오일쇼크 때 유연탄으로 연료를 대체함으로써 유가 상승의 압박을 견뎌냈다. 문제는 유연탄 연소 과정에서 다량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석회석 분해 시에 방출되는 이산화탄소도 많기 때문에 우리나라 시멘트 제조 공정이 유발하는 전체 온실가스는 연간 3천만톤에 이른다. 단일 산업 규모로는 철강(1억톤), 석유화학(5천만톤)에 이어 세번째이다.
현재 시멘트 생산 시 발생하는 탄소를 줄이기 위해서 원료의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노력이 한창이다. 땅에서 캐어낸 석회석의 주성분인 탄산칼슘(Calcium carbonate), 소석회(Calcium hydroxide), 생석회(Lime)의 화학식은 각각 CaCO3, Ca(OH)2, CaO이다. 소성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시멘트의 주성분인 규산석회의 화학식은 CaOSiO2이다. 온실가스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탄산칼슘에 붙어 있는 탄소가 가공 중 산소와 붙어 공기로 날아가 버린다는 점이다. 소성과정에서 석회석을 덜 쓰면 덜 쓸수록 대기중에 방출되는 이산화탄소를 줄일 수 있다. 석회석 대신 많이 쓰이는 재료는 제철 공정에서 나오는 슬래그이다. 철광석을 고로에 넣기 전 소결광으로 만들 때 석회석을 부원료로 투입하기 때문에 슬래그에는 산화칼슘(CaO) 성분이 풍부하게 포함되어 있다. 화력발전의 플라이애시나 산업부산물 오니는 석회석과 섞는 점토의 혼합재로 쓰기도 한다. 이런 순환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록 산업 폐기물을 저감할 뿐 아니라 시멘트의 품질을 개선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연간 600만톤의 순환자원을 시멘트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18년, 시멘트협회). 원료 대체율로서는 10%가량이다. 외국에서는 대체원료 활용 비율이 20% 이상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순환자원 사용비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궁극적으로는 탄산염 광물인 석회석을 큰 폭으로 대체하는 비탄산염 원료를 인공적으로 개발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아직 먼 미래이기는 하지만 공기 중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만든 인공 탄산칼슘(CaCO3)으로 시멘트를 제조해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도 있다.
유연탄 연료를 바꾸는 노력도 활발하다. 현재 가시화된 것은 폐플라스틱을 연료로서 쓰는 것이다. 시멘트의 소성공정은 연소온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일반 소각로에 비해 깨끗하게 폐플라스틱을 태울 수 있고 잔여물도 거의 남기지 않는다. 유럽은 그린딜(Green deal)을 통해 시멘트 제조의 열원을 가연성 페기물로 대체하는 연료전환(Fuel Switching) 비율을 2030년까지 100%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우리나라도 현재 20%가량인 시멘트 공정 내 폐플라스틱 연료 대체 비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가연성 폐기물을 매립하면 메탄(CH4) 가스가 발생하는데 고온 소각하면 이를 방지할 수 있다는 점도 부수적인 이점이다. 폐기물 중에 탄소를 포함하는 유기질은 석회석 대체제로 쓰고, 탄소를 포함하지 않는 무기질은 점토 같은 혼합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유리하다. 유연탄 가격 급등락 등 가격 변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연간 1천만톤(생활 5백만톤, 산업 4백만톤, 건설 1백만톤)에 달하는 폐플라스틱의 유용한 활용 방안을 찾는다는 면에서도 의미가 있다.
석회석과 유연탄이라는 친숙한 재료와 이별하고 각종 산업 부산물, 합성 탄산칼슘, 폐플라스틱 같은 다양한 자원을 동원해서 시멘트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많은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현대 문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콘크리트를 배제하며 살 수는 없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과감한 도전으로 경제적이면서도 안전한 공법 전환을 이루어내야 할 것이다.
자동차 산업은 미래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가 빨라 한달이 멀다하고 업계의 상황이 바뀐다. 많은 사람들은 머지 않은 미래에 자율주행 자동차가 등장할 것이라 기대한다. 전기차의 성능도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이라 예상한다. 좀 더 낙관적인 사람들은 몇 년 안에 한번 충전으로 수 천 km를 갈 수 있는 완전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기를 꿈꾼다. 그렇게 되면 운전자는 전방주의 의무에서조차도 완전히 해방된 채 창문에 펼쳐진 곡면 디스플레이를 보며 느긋한 차 속 휴식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혁신이 꼬리를 무는 현재의 상황은 흡사 19세기말~20세기초 자동차의 태동기와 비슷하다. 당시 미래를 꿈꾸던 야심찬 발명가들은 오늘날까지 쓰이는 많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1895년 프랑스 앙드레 미슐랭(Andre Mischlin)은 자동차용 공기타이어를 개발해 덜컹거리던 차의 승차감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1902년 영국의 프레드릭 란체스터(Frederick William Lanchester)는 제동력이 좋은 디스크 브레이크를 개발해 골치거리였던 사고율을 크게 낮췄다. 세계 각 국도 국가차원에서 기계산업의 꽃인 자동차에 열의를 갖고 뛰어들었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국가와 미국이 먼저 자동차 산업을 개척했고, 20세기 초에는 일본도 시장에 진입하여 훗날의 주요 생산국으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우리나라도 1975년 자체 승용차를 만들어 가열찬 경쟁에 가세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어 왔다. 탄생한 지 100년이 훌쩍 지난 자동차는 21세기에 다시 근본적인 대 변혁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오늘날의 차는 기계만으로 이루어진 장치를 넘어 첨단 전자제품으로 변모 중이다. 현재 당찬 포부의 세계 자동차 기업들은 여러 난관들을 극복하며 자율주행과 전동화에 도전하고 있고, 아마도 멀지 않은 미래에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 길로 가는 중간과정을 점검하기 위해 지금의 자동차 시장을 나타내는 몇 가지 지표를 진단해보기로 하자.
2022년 2월 기준 우리나라 자동차 등록대수는 2,491만대(국토부) 이다. 2021년 2,470만대 대비 소폭 증가했다. 총인구 5,184만명 대비 48%이다. 21년 자동차 신규등록 대수는 174만대였다. 20년에 코로나 보복소비의 영향으로 내수 판매가 처음으로 한 해 190만대를 돌파한 이후 다소 감소한 수치이다. 21년 등록 차량 중 국산차는 143만대, 수입차는 31만대였다. 국산차 판매량 역시 20년 160만대 대비 약간 감소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내수 시장 규모는 연간 170~190만대이지만 수출을 포함한 국내 생산량은 이 보다 크다. 국내 공장에서 만드는 차는 연간 400만대에 이르며, 국산 완성차 업체인 현대기아차가 전세계에서 판매한 양은 21년 667만대, 20년 640만대였다.
2020년 기준 전세계의 자동차는 14.2억대이며, 이 중 승용차는 10.6억대이다. 전세계 인구 78억명 대비 자동차수는 18%이다. 세계 자동차 판매량은 2021년 8,075만대, 2020년 7,732만대였다(하나금융). 우리나라와 다르게 코로나 전인 2019년 8,756만대에 비해 다소 줄어든 수치다. 가장 많은 자동차를 파는 국가는 미국이 아닌 중국으로 2020년 2,630만대를 기록했다(로이터). 미국에서는 2021년 1,490만대의 차가 팔렸다. 세계 판매량 대비 미국 비중은 18%이다. 미국에서도 코로나 전인 2019년 1,700만대, 전세계 20%에 이르던 것에 비해 시장이 다소 줄어들었다.
미국에는 모두 2.7억대 가량의 자동차가 있다. 이는 미국 국민 일인당 0.85대의 자동차를 소유한 셈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차를 한 대씩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7억대의 차들은 1년에 대략 4조 8,300억km(3조 마일)의 거리를 달린다. 이는 지구 둘레 4만km(2.5만 마일)를 1억 번 이상 돌 수 있는 엄청난 거리이다. 차량 한 대당으로 하루에 약 50km(30마일), 1년에 18,000km(11,000마일)을 운행한다. 이 수치는 어디까지나 평균치이며, 많이 움직이는 차들은 하루에 160km(100마일) 이상 달리는 경우도 있다. 하루 7시간씩 꼬박 걸어도 5일이나 걸리는 거리를 매일 같이 움직이는 것이다. 미국 전체에는 640만km(4백만 마일)의 공공 도로가 있다. 우리나라 도로연장 11만km의 60배에 이른다. 2차 대전 후인 1950년대 연방 정부는 당시 기준 1년 예산의 40%에 달하는 250억 달러를 투입해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를 구축했다. 연방정부가 건설비용의 90%를 지원하고 지방정부가 나머지 10%를 부담해 미국 둘레를 6번 정도 도는 거리인 6.6만km(4.1만 마일)의 고속도로망을 구축했다. 이 대형 인프라 투자 사업은 각 지역들을 더욱 촘촘하게 연결시켰고, 현재의 자동차 중심 미국 교통 체계를 형성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2.7억대의 차들은 이런 도로 위를 달리면서 많은 연료를 소비한다. 한해 미국 자동차의 연료 소비는 34억 배럴(1,439억 갤런) 정도이며, 유류 비용만 대략 600조원(5천억달러)에 달한다. 우리나라 전체가 1년에 소비하는 석유가 9억 배럴이니 미국 자동차들은 무지막지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2020년 테슬라 주가 폭등 이후 전기차에서의 경쟁이 매우 치열해졌다. 2020년 전세계에서는 310만대의 전기차가 팔렸다(SNE리서치). 이는 2020년 전체 신차 7,732만대의 4%에 해당한다. 유럽의 전기차 판매는 140만대이며, 중국에서는 120만대였다. 테슬라는 전세계 판매량의 16%인 50만대를 판매했다. 전기차 판매대수로 집계되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차와 수소전기차를 뺀 순수 배터리 전기차만 놓고 보면 테슬라의 점유율은 23%로 올리간다. 테슬라는 2021년에는 936,000대를 판매하여 다시 최고치를 경신했다. 2019년에 37만대를 판매하였으니 다른 완성차 업체들의 맹추격에도 가파른 성장추세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2030년에는 현재 물량보다 40배 증가한 2천만대를 생산하는 것이 테슬라의 목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 10만대, 2020년 6.1만대의 전기차가 팔렸다. 이 중 국산차는 각각 3.5만대, 3.1만대이다. 2021년말 기준 우리나라의 전기차 누적 등록대수는 23만대이다. 이 숫자는 2020년 3월 10만대를 돌파한 이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만약 앞으로 전기차가 빠르게 보급되어 1,000만대의 차량이 일년에 15,000km를 운행한다고 하면, 총 21TWh의 전력이 필요하다. 이는 2020년 우리나라 발전량 552TWh의 3.8%에 해당한다. 적절한 재생에너지원을 확충하면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전력량일 것으로 판단된다.
전기차가 늘어나는 것은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가 강화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2021년 차가 1km 주행할 때 배출량이 95g을 넘지 않을 것을 규정하고 있다. 2030년에는 59g/km 이하를 준수해야 한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2021년 12월 17.6만대의 전기차가 팔려 신차 판매량의 20%를 차지했다. 이는 19% 점유율을 기록한 디젤차를 사상 처음으로 앞지른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2030년에는 전세계 신차 판매의 30%가 전기차로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블룸버그). 2035년에는 유럽과 캘리포니아에서 내연기관차의 판매가 전면 금지된다. 서울시도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의 4대문 안 도심 출입을 허락하지 않을 계획이다. 2050년에는 전세계적으로 연간 1~2억대의 전기차가 팔릴 것으로 예상한다. 현대차는 2020년 1월에 2030년부터 내연기관 신차 출시를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2021년 12월에는 엔진개발 연구조직을 38년만에 폐지했다. 2022년 22만대, 2026년에는 170만대의 전기차를 판매할 것을 목표로 잡고 있다.
전기차 보급에서 중요한 것은 충전인프라의 확충이다. 2021년 기준 전국에는 10만기의 충전기가 있다. 공용이 7만기, 개인용이 3만기이다. 충전소 기준으로는 5,500곳이다. 아파트에서는 변압기 용량이 3kW 이상이어야 충전기를 설치할 수 있다. 상용으로는 완속충전기도 7kW는 되어야 한다. 20분 정도면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초급속은 350kW가 되어야 한다. 주차장이나 신호대기 중에 서 있기만 해도 충전이 되는 무선충전방식도 개발이 한창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11kW급 무선 충전 기술을 시도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50kW급 충전을 국제표준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빠르고 편리한 충전 시스템을 정립하고, 관련 전력 설비를 곳곳에 구축하는 데에는 꽤나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향후 전기차의 원활한 보급에는 충전기의 안정적 설치가 관건이 될 것이다. (작성 2022.1.22)
보통 전기차에는 50~100kWh의 배터리가 탑재된다. 테슬라의 모델3는 50kWh, 모델Y는 75kWh, 모델S와 X는 100kWh의 배터리를 싣고 있다. 현대 아이오닉5는 73kWh, 기아 EV6는 77kWh의 배터리를 적재한다. 비교 대상으로서 휘발유의 비중을 0.88로 잡고, 에너지밀도를 1.7kWh/kg으로 가정했을 때 70L 탱크에 저장된 유류의 에너지는 약 105kWh이다.
전기차 배터리의 1kWh당 가격은 137달러이다(BNEF,20년). 2014년 700달러, 2016년 290달러, 2019년 156달러로 6년간 연평균 24% 하락하였다(하나금융). 10년 전 1,200달러였던 것을 감안하면 89% 하락한 수준이다(BNEF). 그럼에도 배터리 가격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전기차 가격의 40%는 배터리 비용이다. 전기차가 내연기관차와 비교해 경쟁력을 가지려면 배터리 가격이 1kWh당 100달러 미만이 되어야 한다. 업계에서는 2025년쯤이면 이 가격이 완성될 것으로 본다. 2030년에는 93달러까지의 하락도 예상한다(SNE리서치,2021년). 변수는 원자재의 가격이다. 2021년 8월 기준 수산화리튬 1톤 가격은 16,550달러로 연초 대비 107% 상승했다. 중국에서 많이 쓰는 탄산리튬 가격은 2021년 한해동안 7배가 뛰었다(한국무역협회). 2022년 1월에는 톤당 5만달러에 달해 2017년 이후 최고가를 기록했다(영국, BMI). 배터리 생산 원가의 15%를 차지하는 니켈 가격은 2021년 10월 기준 톤당 20,530달러로 전년 대비 50%가 상승했다. 2022년 1월에는 24,435달러로 2011년 이후 최고치를 다시 경신했다(BMI). 코발트 가격은 21.8월 기준 톤당 52,000 달러로 20.8월 33,065달러 대비 크게 올랐을 뿐 아니라 다른 광물보다 월등하게 비싸다. 2022년 1월에는 7만달러까지도 치솟았다(BMI). 이 때문에 코발트 비용은 배터리 가격의 60%를 차지한다. 동박에 쓰는 구리 가격은 코로나가 발발한 2020년 4월 최저가 5,048달러를 기록했으나 2021년 10월 기준 9,041달러로 배 가깝게 상승하였다.
전기차는 1kWh의 에너지로 약 7km를 주행할 수 있다. 테슬라의 모델3는 50kWh의 배터리를 장착해 352km를 간다. 에너지밀도를 300Wh/kg 고밀도로 가정해도 100kWh 배터리의 무게는 330kg에 달한다. 2,100kg가량 되는 전체 차량 무게의 16%에 이른는 수준이다.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를 늘려서 적은 무게로도 오래 갈 수 있는 배터리를 만드는 것이 전기차의 숙제이다.
배터리 시장 규모는 확산 일로이다. 용량 기준으로 2020년 총 139GWh였던 시장은 2030년 3,254GWh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SNE리서치,21년). 테슬라는 내재화를 통해 2022년 100GWh, 2030년 3,000GWh로 생산규모를 확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대부분 배터리 공장 하나당 20GWh~40GWh의 배터리를 생산하는데, 테슬라는 규모가 100~150GWh에 이르는 초대형 배터리 공장을 계획한다. 금액적으로 리튬이온 배터리 시장 규모는 2025년 1,600억달러(190조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490억달러(180조원)로 예상되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보다도 큰 규모다(IHS마킷런던, 2021년). 2021년 844억달러(100조원, 가트너, 2021년) 남짓인 D램 반도체가 우리나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감안하면 향후 배터리 시장의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모로 화재에 취약한 액체 전해질을 대체하는 전고체(All-Solid-State) 배터리의 개발도 한창이다. 상용화까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각 기업의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테슬라는 2019년 전고체 배터리 업체인 맥스웰 테크놀로지를 2억1,800만 달러에 인수했다. 도요타는 2020년 12월 10분 충전으로 500km를 가는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폭스바겐은 미국 퀀텀스케이프와 손잡고 24년 전고체 배터리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삼성SDI도 2027년 이후 양산을 목표로 하고, BMW도 2025년 시제품을 출시한 후 2030년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배터리가 대세가 되느냐에 따라 향후 한중일 삼국의 배터리 산업 주도권이 바뀐다. 중국이 밀고 있는 LFP(리튬인산철) 배터리는 안정적이지만 에너지 밀도가 180~220Wh/kg에 불과하다. 추위에도 취약해서 도로에서 운행 중인 차를 갑자기 멈추게 할 정도다. 이 때문에 중국은 영하 20도에서도 에너지 밀도 90%를 유지하는 나트륨 배터리도 지원하고 있다. 원료인 나트륨이 구하기도 쉽고 저렴하다는 점 외에 충전시간이 15분에 불과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2021년 8월 기준 에너지 밀도가 160Wh/kg밖에 미치지 못해 이를 200Wh/kg까지 높이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한국에서는 니켈, 코발트, 망간을 원료로 하는 삼원계 배터리(NCM)가 대세이다. 제조가 어렵고 상대적으로 불안정하지만 250~300Wh/kg에 이르는 높은 에너지 밀도가 장점이다. 코발트 가격이 비싸 원가가 높기 때문에 이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다. 니켈, 코발트, 망간 비율을 6:2:2(NCM 622)에서 7:1:2(NCM 712)로 변경해 에너지 밀도를 높이고 가격을 내리는 하이니켈 기술이 확산되고 있다. 각 기업별로 양극재의 원료와 비율을 다양하게 조정해 최적의 효율을 찾아내려는 작업이 한창이다. 만약 개발만 된다면 배터리의 패러다임을 장악할 전고체 배터리는 에너지 밀도도 350~400Wh/kg으로 매우 높고, 형태도 가변적이며, 안정성도 높고, 충전시간도 짧다. 전고체 배터리는 여러 나라에서 개발 중이지만 일본이 앞서가는 분야이다.
시장확대가 매우 명확하기 때문에 배터리 산업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터이다. 누구보다 기민하고, 협업을 잘하는 우리가 배터리 시장에서도 명실상부한 세계 1위 국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작성 2022.1.22)
탄소는 강한 결합력으로 인해 모든 생명의 근원을 이루는 원자이다. 주변 원자와 단단하게 연결되는 특성을 지닌 반면 적당히 유연하기도 해서 산소, 질소, 수소 등의 원자와 떼어졌다 붙어졌다 하면서 복잡한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한 예로 단백질의 기본단위로서 비교적 간단한 편인 아미노산의 분자식은 NH2CHRnCOOH으로 한눈에 보기에도 길다. 곁사슬(Residue)을 나타내는 R에 어떤 원자들이 부착되느냐에 따라 이 보다도 더 늘어날 수 있다. 간단한 게 이 정도니 이들이 모여 이루는 생명체 속 각종 탄소 화합물의 다양함과 복잡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생명을 구성했던 탄소는 그 특유의 결합력 때문에 다른 원자와 붙어있는 상태 그대로 오랜 시간동안 땅 속에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한다. 이러한 화석연료는 오늘날 인류의 소중한 에너지원이 되기도 하고, 연소 과정에서 산소와 쉽게 만나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는 주범이 되기도 한다.
탄소는 주기율표 상 14번째 열에 있는 14족 원자이다. 탄소계열(Carbon family)이라 불리는 이 열에는 전자 수가 적은 윗 줄부터 탄소(C), 실리콘(Si), 게르마늄(Ge), 주석(Sn), 납(Pb)이 위치해 있다. 이 원자들은 최외곽에 4개의 전자를 가지고 있어 4개의 공유결합을 한다. 분자를 이루는 각각의 원자는 최외곽에 8개의 전자가 있을 때 안정된 상태가 된다. 탄소는 자기들끼리 다양한 모양으로 4개씩 전자를 공유해서 이 8개를 완성할 수 있다 보니 자연 상태에서 동소체(Allotropism)로 존재할 수 있다. 동소체는 단 한 종류의 원자로 이루어졌으나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성질이 다른 여러 형태를 말한다. 탄소의 동소체는 다이아몬드(사면체 형태), 흑연(육각형의 격자구조 판이 쌓인 형태), 그래핀(흑연판의 한층만을 분리한 형태), 풀러렌(탄소원자 60개가 결합된 구 형태), 탄소나노튜브(튜브 형태), 무정형탄소(불규칙 형태, 검댕이‧숯‧활성탄 등) 등이 있다.
워낙 결합력이 좋고 안정적이다 보니 탄소의 동소체는 꿈의 재료가 된다. 잘 알려진 다이아몬드는 쇠를 자를 정도로 강력한 재료이다. 흑연(Graphite)은 연필심에서 볼 수 있는 친숙함 때문에 그렇게 강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지만 실은 꽤나 강한 소재이다. 연필심은 순수한 흑연에 점토를 섞어 인위적으로 부드럽게 만든 것이다. 흑연만 놓고 보면 그래핀(Graphine)이라 불리는 탄소 원자로 이루어진 얇은 판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원자는 기본적으로 척력을 가지고 있어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그래핀 판들은 0.335nm 간격으로 층층이 포개져 흑연을 만든다.
그래핀은 안정적인 분자구조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얇은 재질이다. 강도, 전기 전도성, 열전도율 등이 현존하는 물질 중 가장 뛰어나다. 그래핀의 인장강도는 130GPa인데, 이는 철의 강도 420MPa의 310배에 달하는 크기이다. 다이아몬드와 비교해도 40배가량 강하다. 게다가 철에 비해서 매우 가벼워 훌륭한 구조체가 된다. 강도를 높이고 무게를 줄이는 것이 중요한 비행기, 자동차, 건축자재 등에 두루 쓰일 수 있다. 전기 전도성도 높고, 열 전도도도 높으며, 비표면적도 크고, 가시광선 투과율도 높아 투명한 전극 재료를 만들 수도 있다. 전기 전도성은 구리의 100배 정도이고, 열 전도도는 다이아몬드의 2배 이상이다. 단단하고 얇으면서도 전기적 성질이 뛰어나니 초고속 반도체의 소재로도 적합하다. 탄성이 뛰어나 구부려도 성질이 변하지 않고 안정적이기 때문에 투명전극을 활용한 휘는 디스플레이, 고효율 2차전지, 태양전지, 전자종이의 소재로도 제격이다.
그러나 탄소만으로 이루어진 단일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원자의 결합 구조 사이에 조그만 흠이 있거나 결함이 생기면 그래핀은 부스러진다. 경제적인 비용으로 재료와 형태의 균질함을 이뤄내는 것은 매우 까다롭다. 그래핀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해서 흑연에서 떼어내는 방식이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안드레 가임, 콘스탄틴 노보셀로프이 2004년 이 방법을 개발했고, 201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아마도 모든 노벨상을 통틀어 가장 간단한 실험이었을 것이다. 다른 방법은 화학 증착법(CVD; Chemical Vapour Deposition)이다. 이 방법은 플라즈마 및 열을 이용하여 물질의 박막을 형성한 후 화학반응을 이용해 넓은 기판의 표면에 물질을 응착시키는 기술이다. 우수한 결정질을 갖는 그래핀을 넓은 면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이지만 그래핀 층이 자라게 하는 적당한 기판을 찾는 것이 여의치는 않다. 또한 증착 이후 기판에서 원자 구조의 결함 없이 그래핀을 떼어내는 방법을 개발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다른 방법은 화학적 박리법이다. 흑연을 강산 등으로 산화시켜 산화흑연으로 만든 다음 물 분자가 면 사이에 끼어들기 쉬운 성질을 이용해 초음파 분쇄기 등으로 층을 박리하는 방식이다. 이를 다시 테트라하이드로퓨란(Tetrahydrofuran), 메탄, 에탄 같은 용액으로 환원하여 그래핀을 생성한다. 화학적 박리법은 적용이 간편하고 대량생산이 용이하여 시장성이 높으나 불순물이 많이 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효과적인 산화제, 환원제를 찾고 공정을 개발하는 연구가 한창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 에피덱셜 성장법(Epitaxial growth)이 있다. 이 방법은 탄화규소 같이 탄소가 포함된 재료를 열처리하는 방법이다. 열을 가하면 탄소가 탄화규소 표면의 결을 따라 성장하면서 그래핀이 만들어진다. 이 방법은 재료가 고가이고 제작이 어려워 대량 생산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처럼 무결함의 얇은 탄소층을 만드는 것이 만만치 않다 보니 그래핀의 상용화는 사람들의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다. 2010년 스카치테이프를 이용한 그래핀 박리법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 그래핀은 크게 기대를 모았다. 여러 기업에서도 반도체, 배터리 등의 소재로 그래핀을 이용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2020년경에 이르면 그래핀 소재가 널리 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지만 상용화 속도는 당초 예측보다 늦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제조 공정에서 조그마한 결함도 허용하지 않는 얇은 소재의 특성과 이를 달성하기 위한 비싼 가격이 장애물로 작용을 할 수밖에 없다. 현재 그래핀 가격은 1g에 100달러에 이르러 상업적으로 경쟁력을 갖추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반면, 그래핀과 유사한 구조를 가진 탄소섬유(Carbon Fiber)는 효과적인 제조 공정이 만들어져 산업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탄소섬유는 그래핀이 쌓여 만든 흑연층이 한 점을 중심으로 방사형태로 밀집해 포개져 원 모양을 이루고 있는 소재이다. 결국 인장강도가 우수한 그래핀이 켜켜이 쌓이고 접혀져 원통 모양의 얇은 실을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의 두께는 5~10마이크로미터 정도로 나노 단위인 그래핀 두께의 수천배 정도이며, 제조 공정에서 8% 남짓 탄소가 아닌 다른 원자가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도 훌륭한 재료로 쓰기에 손색이 없다. 탄소섬유는 철의 1/4의 무게로 10배의 강도를 지니며 7배의 탄성을 보인다. 내부식성, 전기 전도성, 내열성 등 여러 측면에서도 우수하다. 그러다 보니 비행기, 자동차, 연료탱크, 방탄조끼 등 활용범위가 매우 넓다. 이를 만들기 위한 방법은 기본적으로 1,200도 이상의 고온 상태에서 탄소화합물을 탄소만 남을 때까지 태우는 것인데 제조 라인을 일렬로 연결하면 2km에 이를 정도로 복잡하다. 출발물질(전구체, precursor)로는 원유의 나프타에서 나오는 프로필렌을 가공한 폴리아크릴로니트릴(PAN; Poly-Acrylonitrile)을 쓴다. 일본이 1971년부터 PAN계 탄소섬유를 상업 생산해 현재까지 시장을 장악하고 있으나, 2011년 우리나라도 일본, 독일,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개발에 성공해 점점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탄소 소재는 그래핀, 탄소섬유 외에도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아직 상용화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탄소나노튜브(튜브 형태), 풀러렌(구 형태)의 잠재력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래핀만 해도 여러 번 접고 쌓는 방식을 달리함에 따라 물성을 다채롭게 변형하여 활용할 수 있다. 지구의 기후를 위협하는 주범이면서도 인류에게 엄청난 편리를 줄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 탄소. 탄소를 더 잘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은 우리에게 숙명과도 같은 일일 것 같다. (작성 2022.4.3)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로서 그 높이는 828m, 층수는 163층이다. 위에서 내려보면 Y자 모양의 세 날개가 있고, 옆에서 보면 원통 모양이 맞닿아서 가운데로 갈수록 더 높이 솟은 삼각형 탑 같은 모습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 북한산의 해발고도가 836m이니 가히 큰 산만하다고 할 만하다. 555m의 롯데월드타워 위에 249m의 63빌딩을 얹어 놓은 높이(804m)를 상상하면 그 스케일을 짐작할 수 있다. 아랍어로 브루즈는 타워를 뜻하고, 할리파는 2004년부터 집권하고 있는 UAE의 대통령 이름을 딴 것이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은 빌딩은 중국에 있는 상하이 타워로 632m, 총 128층이다. 꽈배기처럼 세로 방향으로 살짝 비틀어 놓은 독특한 형상을 보이고 있다. 상하이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이 건물은 중국의 맨하탄인 화려한 푸동 지역을 내려다보면서 중국 경제의 천지개벽을 상징하고 있다. 3위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있는 아브라즈 알 바이트 클락으로 601m, 120층이다. 가운데의 거대한 시계탑을 중심으로 7개의 건물들이 이어져 있어 면적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건물이기도 하다. 건물이 자리한 메카는 이슬람 신자들에게 있어 하루에도 몇 번 씩 바라보며 기도하고, 평생 꼭 한번은 방문하는 신성한 곳이다. 사우디의 국왕은 이슬람 성지 순례자들을 수용할 의무가 있다며 호텔과 예배당이 자리한 종교 복합단지로서 이 거대한 건물을 지었다. 아브라즈 알 바이트는 영어로 'Towers of the house'를 뜻한다. 4위는 중국 선전의 핑안국제금융센터로 599m의 115층 건물이다. 1980년 설립된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로서 개혁개방의 상징인 선전에서 세계 1위 시총 보험사로 빠르게 성장한 핑안 국제생명보험의 사옥으로 건설된 건물이다. 이집트의 오벨리스크 같이 뾰족한 꼭대기를 가진 모양을 하고 있다. 세계에서 다섯번째로 높은 빌딩은 우리나라의 롯데월드타워이다. 높이는 555m, 층수는 123층이다. 총 4조 2천억의 사업비가 들었고, 2010년에 공사를 시작해 2017년에 문을 열었다. 한옥의 처마, 붓, 한복 저고리와 치마자락 등 한국의 곡선을 살려 윗끝으로 갈수록 부드럽게 좁아지는 형태를 표현했다.
이외에도 세계적인 초고층 빌딩은 많다. 보통 높이 200m가 넘어야 초고층 빌딩이라고 부르는데 세계에는 1,700개가 넘는 초고층 빌딩이 있다. 400m가 넘는 극초고층은 50개가 넘는다. 롯데월드타워의 뒤를 잇는 6위는 미국 뉴욕의 원월드트레이드센터로 541m이고, 광저우, 텐진, 베이징 등 중국의 건물들이 7~9위를 차지한다. 세계 10위의 건물은 대만의 타이페이101로서 509m의 높이를 갖고 있다. 500m가 넘는 이 10개의 건물들은 하늘로 오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그대로 표현한다. 인간이 욕심을 내어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탑을 쌓은 끝에 신의 노여움을 사 무너졌다고 하는 바벨탑은 오늘날 30층 아파트 높이에 해당하는 90m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 사람들에게는 이나마도 신에게 도전할만한 높이였지만 현대인에게는 그저 일상적으로 생활하는 공간 중 하나에 불과하다.
높은 건물은 19세기말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최초의 고층 빌딩은 1885년 건설된 시카고의 홈인슈어런스빌딩(Home Insurance Building)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건물은 10층짜리 42m의 건물이었다. 시카고는 1871년 대화재 이후 새롭게 도시를 계획하면서 불에 타는 나무 대신 돌과 철을 건축 소재로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특히 강재로 보와 기둥을 만드는 철골구조는 돌이나 콘크리트로 만든 외벽보다 더 큰 건물 하중을 지탱했다. 당시 미국에는 세계 각지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도심 내 토지의 가치도 상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물을 위로 올려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개발업자들의 구미를 자극했다. 마침 1880년대에 만들어진 엘리베이터는 고층건물 생활을 훨씬 용이하게 해줬다. 뉴욕의 맨하탄에서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까지 높은 건물이 속속 건설되었다. 맨하탄의 최초 고층 건물은 남쪽 월스트리트 인근에 1889년에 건설된 타워빌딩(The Tower Building)으로 11층, 39m의 높이였다. 1901년에는 맨하탄 중앙 매디슨 파크 인근에 21층, 87m의 플래터론 빌딩(Flatiron Builing)이 만들어졌다. 좁고 특이한 건축부지의 특성을 살려 쐐기 모양의 삼각형 단면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지금까지도 남아서 호텔과 주거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1930년에는 크라이슬러 빌딩(Chrysler Building)이 만들어져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등극했다. 건설 과정에서는 줄곧 최종 높이를 비밀로 하다가 완공 전 30분 간의 조립으로 56m의 첨탑을 세움으로써 283m 높이를 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크라이슬러 빌딩은 불과 1년 만인 1931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세계 최고 자리를 내줬다. 381m, 102층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1974까지 무려 43년 동안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타이틀을 놓지 않고 뉴욕의 마천루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의 뒤를 이어 1974년부터 1998년까지 24년간 1위를 차지한 건물은 시카고의 윌리스타워(구 시어스타워)이다. 처음에 불린 이름은 우편 카탈로그 판매로 성장했으나 현재는 파산한 시어스백화점에서 유래했고, 2009년 변경된 이름은 세계 3위 보험 중개사인 윌리스그룹에서 따올 정도로 유통, 물류, 금융 비즈니스의 중심으로서 시카고의 성격을 드러내는 건물이다. 시카고의 강한 바람에 저항할 수 있게 여러 큐브형태를 묶어 442m, 108층의 단단한 구조를 만들었다. 1998년 452m, 88층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타워가 건설된 이후에는 아시아가 줄곧 세계 최고층 타이틀을 가지고 갔다. 페트로나스타워의 지붕 높이는 시어즈보다 낮지만 상부의 65m 첨탑으로 세계 제일의 높이를 기록했다. 2004년에는 509m, 101층의 대만 타이페이101이 건설돼 6년간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2010년에는 두바이 브루즈 할리파가 만들어져 지금껏 최고층 자리를 놓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건축법상에는 높이 120m 또는 30층이 넘는 건물을 고층건물로 구분하고, 200m 또는 50층 이상의 건물을 초고층건물로 분류한다. 이 경계를 넘을 때마다 여러가지 규제사항이 추가되기 때문에 많은 건물들이 여기에 딱 맞추어져 높이를 결정한다. 도심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오피스 건물은 대부분 29층, 120m로 고층 건물에 해당되지 않게 건설하는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오피스 건물의 층고는 일반 아파트 3m 보다 약간 넉넉하게 보통 약 4m 정도에서 결정한다. 아주 좋은 입지 아파트의 경우에는 49층, 200m로 초고층 기준에 살짝 미달하게 짓는 경우가 많다. 이때에도 고급화를 위해 정해진 높이를 최대한 활용해 층고를 4m까지 확보하는 사례가 다수이다. 아파트 시공비의 압력을 고려해야 할 때는 고층건물에 해당되지 않기 위해 29층, 100m가량으로 건설하기도 한다. 서울시의 경우 2010년대의 35층 규제로 인해 100~120m 높이의 아파트가 다수 건설되었다. 1990년대에는 16층 이상부터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을 추가해하는 규제가 있었다. 그 때문에 2000년대 초반까지 15층 아파트가 많이 지어졌는데 그 높이는 대략 50m 정도였다. 이렇듯 여러 규정과 경제적 이득을 복잡하게 고려하여 고층 건물을 짓다보니 현재 우리나라에는 200m까지 올라가는 고급 아파트들, 120m에 살짝 못미치는 도심 고층 건물, 역시 120m를 넘지 않는 35층 및 29층의 아파트들, 90년대에 다수 지어진 15층의 아파트들, 그리고 롯데타워(555m), 부산엘시티(412m), 여의도파크원(333m), 송도포스코타워(305m), 63빌딩(237m) 같은 200m를 훌쩍 뛰어넘는 초고층 건물들이 스카이라인을 형성하고 있다. 2020년 기준으로 전국의 200m 이상 초고층 건물의 수는 110개를 넘어선다. 고층 및 초고층 빌딩들의 연면적을 합치면 수백㎢에 이르러 웬만한 도시 하나 만한 공간을 공중에 새로 만든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허공 속에 존재하지 않던 공간을 안전하고 경제적으로 만들어내는 데에는 높은 기술이 요구된다. 오랜 경험으로 공법과 연관산업이 잘 정립된 아파트의 경우 한 층을 올리는 데 열흘가량의 기간이 소요된다. 날씨 같은 외부적인 문제없이 콘크리트 양생과 자재 조달 등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6일에 한 층씩 작업이 완료되기도 하나, 동절기나 우기에 한 층에 15일씩 걸리는 경우까지 감안하면 평균적으로 열흘을 잡는 것이 적당하다. 특별히 1층과 최상층은 준비와 마무리 작업으로 기간이 오래 걸려서 각각 한 달 가까운 기간이 걸린다. 아파트 구조에 따라 제작된 맞춤형 거푸집을 일일이 붙이고 콘크리트를 양생시킨 후 떼어내 다시 위층으로 올리는 작업은 매우 고된 노동이다. 터파기 기간까지 감안하면 보통 15~20층의 아파트를 짓는데 2~3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공사기간이 결국 경제성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시공자 입장에서는 이 기간을 하루라도 단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200m가 넘는 초고층 건물에서는 건축 장비와 재료도 달라져야 한다. 초고층건물을 지을 때에는 다양한 장비를 이용해서 시공 속도를 높인다. 사람이 일일이 거푸집을 붙이고 떼는 것이 아니라 유압에 의해 거푸집을 자동으로 상승시키면서 콘크리트를 타설하는 식이다. 무거운 물체를 드는 크레인의 경우도 건물 위에 크레인을 설치하고 건물이 한 층씩 높아질 때마다 유압으로 계속 크레인을 들어 올리는 방법이 사용된다. 철근을 층마다 배근하는 게 아니라 지상에서 2개 층을 사전에 조립한 후 들어올려 안착시키는 식으로 시간을 절약하기도 한다. 500m 이상까지 중계 과정 없이 한 번에 콘크리트를 뿜어 올리는 기술로 거푸집과 철근 설치 즉시 콘크리트를 타설하기도 한다. 안전을 위해서는 고강도 재료의 도입도 필수적이다. 초고층건물의 철골 구조로는 인장강도 800MPa 이상의 고강도 강철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건축구조용으로 사용하는 400MPa급 강재의 2배 이상 강도이다. 콘크리트의 경우도 짧은 시간 안에 고강도를 발현할 수 있는 제품을 사용한다. 일반적인 건축물에서 쓰는 콘크리트의 압축강도는 24MPa 정도이지만 초고층빌딩의 기둥에서는 짧은 시간 안에 80MPa의 강도가 발현되는 초고강도 콘크리트를 활용한다. 그래핀이나 합성고무 등 점성을 높이는 소재를 첨가하여 콘크리트 강도를 높이는 방법도 개발되고 있다. 초고층건물은 단기간에 막대한 자재, 장비, 인원이 투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 치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 정밀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 2010년 우리나라 시공 기술로 완성한 브루즈 할리파의 경우 각종 기술을 총동원해 3일에 한 층씩 건물을 올리는 놀라운 속도를 보여줬다.
한편, 초고층빌딩에서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오차와 진동이다. 건물을 지을 때에는 일반적으로 크고 작은 오차가 생기지만 초고층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지표면에서 1도의 오차가 발생한 채 건물이 위로 올라가면 500m의 높이에서는 가로로 9m의 편차가 발생한다. 이 때문에 건물이 올라가는 동안 정밀 계측기, 인공위성 등을 동원해 실시간으로 측량을 해야 하고 수집한 데이터를 활용해 즉시 컴퓨터 분석을 수행해 시공에 반영해야 한다.
진동의 경우에도 일반 건물에서는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아니지만 초고층빌딩에서는 중요한 고려요소가 된다. 특히, 높은 곳에서 부는 바람은 건물을 휘청거리게 할 정도이다. 보통 건물에서 허용하는 흔들림인 1/500을 기준으로 하면 500m 건물의 꼭대기에서 흔들리는 좌우 폭은 1m나 된다. 그 안에 있으면 관성에 의해 실제 움직임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바람이 세서 움직임 범위가 커지면 심리적인 불안감을 줄 수가 있다. 초고층빌딩에서는 진동을 줄이기 위해 TMD(Tuned Mass Damper, 진동저감장치)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건물 안에 거대한 추를 매달아 놓고, 센서가 감지하는 진동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추를 움직여 흔들림을 상쇄하는 방법이다. 대만의 타이페이101에는 90층 높이에 무려 680톤 무게의 추가 설치되어 있다. 그밖에도 상부 물탱크의 물 흐름을 이용하거나, 상층부의 공간을 비워 바람 통로를 만들거나, 건물을 여러 모듈로 나눈 후 결속하여 횡하중에 대한 저항을 증가시키거나, 건물 외부에 케이블을 설치해 지탱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등 진동을 줄이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동원되고 있다.
세계 최고층인 828m 높이 기록도 언젠가는 갱신이 될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다양한 모습의 200m 이상 초고층빌딩, 400m 이상 극초고층빌딩 건설은 계속될 것이다. 이들을 만들 때 어떤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고, 어떤 창의적인 방법으로 해결해내는지 알면 하늘을 향해 오르는 초고층빌딩의 경이로움을 더 잘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지하공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시를 떠받히는 중요한 인프라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십 미터 깊이의 지하에서는 기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쇼핑하고, 차들이 빽빽히 세워져 있고, 쓰레기가 오고 가며, 상수와 하수가 흐르며, 전기와 통신 설비가 매설되어 있다. 만약 이 공간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도시는 넘쳐나는 차량과 복잡한 전선, 불결한 오수 등으로 도저히 지탱 불가능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약 710km에 달하는 도시 철도가 있다(2020년 철도연감). 그 중 서울 한 도시의 도시철도 길이만 360km에 달한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도시를 관통하는 기차들은 대부분 지하로 다닌다.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이래 전국 도시에는 거미줄 같은 지하철망이 만들어졌다. 서울에서만 하루 530만명에 달하는 사람이 지하철을 이용한다(2021년 서울시). 이들이 저마다 차를 가지고 나와 수백만대의 차량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면 만나고 헤어지는 일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1호선을 건설한 1970년대에는 지하 터널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에 땅을 전부 파서 지하철 구조물을 건설한 후 다시 흙을 덮는 개착식 공법을 적용했다. 그 때문에 1호선의 평균 심도는 10.9m로 매우 얕다. 지표면과 선로면까지의 지반 두께가 가장 얇은 청량리역의 경우 바닥 심도가 고작 6.4m밖에 안된다. 이후에 건설된 지하철에서는 발전된 TBM(Tunnel boring machine)과 NATM(New Austrian Tunnelling Method) 공법 등으로 대심도 건설이 가능해졌다. 그에 따라 40m~50m의 깊이로 지하철을 뚫을 수 있었다. 덕분에 상부 재산권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했고, 강 하부 횡단도 가능하게 했다. 8호선의 성남시 산성역은 최대 심도 55.8m으로서 수도권 지하철 중 가장 깊은 지하철 역이고, 부산의 만덕역은 무려 62.3m로 전국에서 가장 깊은 역이다.
1970년대에는 지하상가의 건설도 유행했다. 1968년 김신조의 청와대 침투사건을 계기로 남북 관계는 크게 얼어 붙었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북한의 불의의 습격에 대한 방어 준비였다. 마침 1970년 대현실업의 손현수 회장은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지하상가 건립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제시한 국토이용 효율화, 교통난 해소라는 사업목적보다 시장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건 민방위 대피시설 활용이었다. 평상시에는 상가로 활용하다가 북한의 폭격이 있을 때 시민들이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로 쓰는 것은 그야말로 1석 2조의 사업이었다. 서울시는 지하상가 조성 10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1980년대까지 30여개소의 지하상가, 다른 말로 공공보도시설을 조성했다. 한 개소당 평균 길이는 200m 정도였고, 평균 연면적은 6,000㎡였다. 지하에 들어선 축구장 만한 공간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상부의 차가 내뿜는 매연도 없었고, 번접스러운 장애물도 없었다. 최초의 지하상가는 시청앞 을지로1가의 '새서울 지하상가'였다. 폭 9m에 길이가 480m나 되는 이 상가는 '서울의 멋쟁이들이 한번씩 들리는 첨단상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을지로4가의 인현 지하상가, 왕십리 신당 지하상가, 남대문, 회현, 소공, 명동 지하상가, 인천 부평 지하상가, 동인천 지하상가, 주안역 지하상가 등 지하상가들이 속속 들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지하상가는 198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백화점에 쇼핑의 주역 자리를 내어 놓았다. 1985년 현대백화점 압구정 본점 개점이 상징하듯 올림픽을 즈음한 최신식 백화점과 쇼핑몰의 등장은 멋쟁이들의 발걸음을 돌려놓았다.
1970년대의 첨예한 남북 갈등은 주거시설의 지하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의 기습 공격을 두려워하던 정부는 1970년 건축법을 바꿔서 유사 시에 대피할 수 있도록 주택에 반드시 지하층을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이런 의무 조항에 따라 울며 겨자먹기로 설치된 지하층은 당시 주택의 절대 부족 현상과 만나 불법으로 주거 시설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지하셋방은 도시에 자기 한몸 누울 공간 없는 사람들이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곳이었지만 극악의 주거공간 중 하나였다. 주택난으로 뾰족한 수를 내어 놓지 못하던 정부는 1984년 건축법을 개정해 이미 널리 퍼진 지하 주거를 양성화했다. 이때 지하층의 일부를 지상으로 돌출시켜 환기와 채광이 가능하도록 하는 대신 건물의 전체 층수에는 산입하지 않는 방법을 채택했다. 보통 1종 일반주거지역 안에서는 4층 이하 건물만 지을 수 있는데 한층을 더 만들 수 있게 해준 셈이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는 수도권의 인구팽창이 극심했고, 주택은 여전히 부족했다. 이 때문에 도시 곳곳에는 '반지하'라 불리는 주택이 대거 공급되었다. 눈 높이에 간신히 뚫린 좁은 창틈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만 보이고, 항시 길가의 매연과 오물이 들어오며, 장마가 지면 빗물이 쏟아지는 반지하 서민의 삶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2020년 아카데미상을 받은 '기생충'에는 우리 사회 부의 양 극단을 표현하는 무대로서 반지하를 이용하였다. 현재에도 우리나라 도시에는 수십만 가구의 지하, 반지하 가구가 남아 있다. 그러나 많은 지자체에서 반지하를 점차 제한하고 있는 추세이고, 건축주와 세입자들도 반지하를 선호하지 않으면서 지하주거 형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사람이 거주하기엔 열악한 지하공간은 차를 보관하기에는 매우 좋은 곳이다. 오랜 시간 차를 세워놓아도 안전하고, 눈과 비를 피할 수 있고, 온도도 비교적 일정해 겨울철 차량 관리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빌딩과 주택의 지하주차장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신도시를 만들 때에는 지상 주차장 아래 지하 주차장을 팠고, 신축 빌딩도 지하 4층 이하로 계획해 하부에 주차장을 건설했다. 2000년대부터 지어진 아파트에서는 아예 주차장을 대규모로 건설해 지하 주차장에서 아파트에 직접 진입할 수 있도록 했다. 2010년대부터는 아예 모든 차량은 하부로만 다니고 상부는 공원화하는 아파트 단지 형태도 보편화됐다. 우리나라의 많은 지하주차장 중 심도가 가장 깊은 곳은 부산의 쥬디스태화 건물로 비록 기계식 주차이긴 하지만 지하 10층에 이른다. 자주식 주차로는 서울 용산의 푸루지오써밋의 지하 9층이 가장 깊은 심도이다. 바닥 슬래브까지 한층의 높이를 3m 정도로 잡는다면 약 30m에 이르는 깊이이다.
지하공간은 사회기반시설을 놓기에도 최적의 공간이다. 요즘은 상하수도, 전력구, 통신구, 도시가스, 난방관로는 물론이고 쓰레기 수송관로에 이르기까지 웬만한 관로들은 다 지하로 들어가는 추세이다. 지상에는 가로등, 신호등, 표지판 등 우리가 봐야 하는 꼭 필요한 시설만을 놓는다. 특히, 대형 철탑을 높이 설치해야 하는 특고압 송전선로를 지중화할 경우 안전과 미관 측면에서 매우 유리하다. 우리나라의 송전선로는 약 16,000km가 있는데 그중 2,300km 정도가 지중화되어 있다(2020년 전력통계정보시스템). 비율로 치면 14%가량이다. 154kV, 345kV에 이르는 고압 선로의 지중화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향후 지어질 지하시설과 간섭하지 않고 지하 소유권에도 문제가 없도록 보통 지하 80m 정도까지 깊은 수직구를 건설한다. 거기로 장비와 물자를 내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직경 4m 정도의 터널을 TBM 같은 공법으로 파 들어간다. 간선 전력설비이기 때문에 화재, 침수, 지진으로부터도 100% 안전하게 설계를 하고 관리를 해야 한다.
변전소를 지나 최종 소비자까지 이르는 배전 선로도 빠르게 지중화되는 추세이다. 2000년대 초고속인터넷망 구축으로 통신선로도 땅으로 들어갔다. 1969년 여의도에 전력과 통신을 함께 매설하는 공동구가 설치된 이후 각종 시설을 터널 하나에 집적하여 관리하는 시설도 늘어나고 있다. 덕분에 거리의 얼기설기 복잡한 전선과 전봇대는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쓰레기 자동집하시설은 2000년대 조성된 신도시들에서 도입되기 시작했다. 쓰레기 봉투를 정해진 투입구에 넣으면 지하배관 안 공기압을 이용해 시속 70km로 중앙집하시설까지 자동으로 옮겨주는 시스템이다. 불법투기, 관로 막힘, 안전사고, 유지관리 등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잘 발전시키면 거리를 더욱 깨끗하게 하는 데 한몫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도시의 상부를 녹지로 만들고 거리 전체를 지하에 조성하는 시도도 한창이다. 2027년 완공을 목표로 하는 서울 영동대로 지하공간이 대표적 예이다. 630m길이, 폭 63m의 도로 하부에 연면적 24만㎡의 공간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지하 7층, 최저 심도 53m에 이르는 거대한 위 지하도시 위 지상에는 평면의 광장이 놓인다. 지상에 라이트빔을 설치해 태양빛을 지하로 끌어들여 지하 3층에서도 지상에서처럼 자연광을 받을 수 있게 한다. 급행철도, 도시철도, 기존 지하철, 버스, 택시 등 교통 환승시설과 쇼핑시설을 융합한 이 공간이 지하공간을 활용하는 새로운 거대 트렌드를 만들 수 있을 지 지켜볼 일이다.
앞으로도 지하의 활용 용도는 다채로워질 것이다. 일론 머스크는 2016년 LA의 교통체증을 불평하는 트위터를 올리면서 지하터널 교통망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가 설립한 보링컴퍼니(Boring Company)는 지하의 진공 터널 안에서 자기부상형 열차(Hyper loop)가 시속 240km로 달리고, 목적지까지 신호등도 없는 터널에서 차량이 자율주행하는 비전을 제시했다. LA공항, 라스베가스 등에서 초기모델이 나온 현재 수준은 짧은 구간에서 전문 운전사가 시속 50km 정도로 운행하는 지하 셔틀 서비스 정도이다. 하지만 기상천외한 공상을 현실로 구현해 온 머스크의 특징 상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는 알 수 없다.
지하의 가치는 이 외에도 다양하다. 산 속과 바다 밑을 뚫는 터널은 몇 시간씩 돌아가야 했던 거리를 단 몇 분으로 단축시키는 혜택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건물과 백화점의 지하상가는 동굴에서 음식을 먹던 인간의 본성과 연결되어서인지 묘하게도 음식품 판매업과 어울린다. 트럭과 오토바이를 통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택배 물량을 지하의 배송망 컨베이어 벨트에 실어 자동으로 분류하고 이동시키자는 아이디어도 한창 대두된다.
이처럼 많은 기능들이 지하로 들어가면서 지하가 점점 혼잡해 지는 것은 걱정거리이다. 새로운 시설을 묻으려 할 때마다 기존에 매설돼 있는 지장물들을 처리하는 것이 큰 골치거리이다. 지하시설물 도면을 꼼꼼히 검토하고 레이다(Ground Penetrating Radar)로 정밀히 관측한 후 굴착에 들어가도 예상치 못한 새로운 지장물이 등장하여 단수, 단전 사고를 일으키고 공기를 지연시키기 일쑤이다. 지하를 개발하면서 유발되는 주변 지역의 안전과 환경 문제도 언제나 큰 주의를 요하는 사항들이다. 현재 지하공간 정보 DB를 구축하고 AI와 디지털트윈 기술을 활용하여 기술을 고도화하는 작업이 꾸준히 진행중이다. 지하를 활용하는 아이디어와 정보는 앞으로도 더욱 발전되어 가야 할 것이다.
우주탐사에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두근거리는 목표가 있다. 이는 아무리 많은 자본과 노력이 들어가도 우주개척을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의 강력한 이유가 된다. 2021년 10월 발사한 한국형발사체 누리호의 개발에는 10년이 넘는 시간과 2조원가량의 세금이 투입된다. 그 일에 들어가는 수많은 연구원들과 300여개에 달하는 기업 노동자들의 땀과 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누리호의 도전은 단순하게만 본다면 1950년대에 이미 개발된 기술의 뒤늦은 추격이다. 1957년 무게 83.6kg의 스푸트니크 위성을 230km 궤도에 올린 소련은 1년 후인 1958년 1.3톤의 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2021년 10월 누리호의 목적은 1.5톤의 모사체위성을 700km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궤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최종 결과는 1950년대의 그것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누리호에 국가적 역량을 투입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미 2013년 1월 나로호를 발사해 100kg의 위성을 300km 궤도에 올린 경험이 있다. 이 때는 러시아의 전적인 도움을 받았다. 전체 2단 로켓 중 1단은 완성품 형태로 러시아에서 들여왔다. 현장 발사체를 조립하는 곳에서는 삼엄한 감시가 있었다. 우리 과학자들은 질문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하나라도 눈으로 보고 익히려고 노력했다. 2번의 발사가 실패하고 2013년 3번째에 성공하기까지 10년의 시간 동안 러시아 과학자들은 아무리 사소한 사항이라도 꽁꽁 감추었고, 발사에 성공하자 남김없이 짐을 싸서 떠났다. 누리호는 그 때 곁눈으로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순수하게 우리 힘으로 만든 발사체이다. 성공하면 1톤 이상의 위성을 궤도에 올릴 수 있는 세계 일곱번째 국가가 된다. 앞선 국가는 미국, EU(프랑스), 일본, 러시아, 중국, 인도로서 다들 규모 면에서도 우리보다 훨씬 크다. 2000년대 모라토리엄을 겪던 혼란기의 러시아와 달리 이제는 그 어느 나라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 원천적으로 불리한 악조건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한두 발자국 뒤에서 이들을 맹렬히 쫓아가는 중이다.
누리호의 길이는 47.2m로 아파트 16층 높이이다. 중량은 점보제트기 무게와 유사한 200톤에 달한다. 추진체는 3단으로 되어 있다. 최하단부인 1단 로켓은 75톤의 추력을 내는 엔진 4개가 묶여있다. 2단, 3단 로켓에는 각각 75톤, 7톤 추력 엔진 한개가 들어간다. 누리호 안에는 37만개의 부품이 거미줄처럼 얽히고 섥혀 있다. 2021년 10월 21일 발사는 처음 치고는 매우 순조로웠다. 300톤의 추력으로 육중한 몸체를 59km까지 올린 1단 로켓은 발사 후 2분 7초에 성공적으로 분리되었다. 다음 2단 로켓도 발사 후 4분 34초에 고도 258km에서 정상적으로 분리되었다. 곧이어 3단 로켓이 점화되었고, 위성 모사체 덮개(페어링)도 안전하게 분리됐다. 문제는 이 즈음 나타났다. 두달 만에 발표된 조사결과에 따르면 3단 로켓 연소 시간이 예정보다 짧았던 것이 원인이었다. 3단 로켓은 521초간 연소해야 위성모사체를 700km에 올려놓고 지구 궤도 원운동에 필요한 초속도 7.5km를 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엔진의 산소 공급에 차질이 생겨 예정보다 46초 빠른 475초에 엔진은 꺼져 버렸다. 추진력을 잃은 3단 로켓과 위성 모사체는 지구 중력에 끌려 바다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고의 이유는 설계 실수였다. 엔진 연소에 소모되는 산소는 액체 상태로 탱크에 실려 있다. 추진 과정에서 산소가 조금씩 소모될 때 탱크 압력은 조금씩 떨어진다. 이를 막으려면 산소 탱크 안 별도 저온고압탱크에 채워진 헬륨가스가 빠져나간 산소를 대체해야 한다. 그런데 고도가 올라갈수록 유체가 물체를 밀어올리는 부력은 세진다. 누리호에서도 헬륨탱크를 둘러싼 액체산소의 부력이 커져 헬륨탱크를 밀어올린 결과 탱크가 하부 고정부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헬륨탱크는 이러저리 흔들리면서 산소 탱크 내 각종 배관을 변형시켰다. 또한 탱크 안 헬륨이 과도하게 누설되어 두께 2mm에 불과한 산소 탱크에도 균열을 발생시켰다. 균열 사이로 산소가 유출되는 바람에 연소에 쓸 산소가 부족해졌고, 결국 엔진이 꺼져 버렸다. 만약 누군가 사전에 이 같은 상황을 겪어보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오류였다. 그러나 모든 걸 시뮬레이션으로 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뼈아픈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미 국가차원에서 경험이 쌓인 미국은 근거리 우주 비행을 민간의 영역으로 이양해 가격 경쟁을 펼치게 하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스페이스X는 2010년 약 4억4천만 달러를 들여 팰컨9을 개발했다. 누리호의 1/4의 가격에 불과한 이 로켓은 제자리에 다시 착륙해 재활용도 가능하다. 탑재중량은 22톤으로 누리호의 15배에 달한다. 고객의 신청을 받아 대행해주는 발사비용은 kg당 2,000달러 정도에 불과하다. 더 큰 로켓인 팰컨헤비의 수송능력은 63톤인데 재사용 시 한번 발사 비용은 9천만달러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 누리호의 비용을 10분의 1 이하로 줄여야 미국의 민간 로켓과 경쟁이 가능하다.
개발 과정도 험난하고 선진국을 따라잡는 것은 난망하나 우리는 우주개발을 계속한다. 이것은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있을지 모르는 엄청난 가능성을 놓칠 수 없어서 이기도 하다. 위성을 이용한 6G 초고속 통신망과 위성정보 빅데이터가 가까운 예이다. 위성 카메라 기술의 발달로 보다 풍부하게 공급되는 데이터는 인공지능과 만나 경제활동, 자원탐사, 농업생산, 국가안보 등에서 훨씬 큰 부가가치를 가져다 줄 것이다. 스페이스X를 싸게 이용할 수도 있지만 발사체 기술을 가지고 있는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는 협상력과 유연성에서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개발할 최첨단 위성의 고급 정보를 전혀 유출하지 않고 안전하게 위성을 우주 궤도에 올리는 데에도 우리만의 발사체는 꼭 필요하다. 혹시 아는가. 한국형 발사체가 조금씩 더 추력을 높여 언젠가 우주비행선을 싣고 올라가 달로 향하게 될 수 있을지. (작성 2022.1.8)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는 초속 약 30만km로 관측자의 속도와 관계없이 항상 일정한 우주의 최고 속도이다. 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 물체를 가속하기 위해서는 점점 많은 에너지가 쓰이는데 빛의 속도에 다다르면 수학적으로 무한대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아무리 작은 질량을 가진 입자라도 그것을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해도 불가능하다.
빛의 속도가 우주의 속도 한계라는 이 명제는 우리를 허탈하게 한다. 태양계와 가장 가까운 켄타우루스 별이 4.3광년이나 떨어져 있고, 우리 주변 10광년 범위 내에도 고작 15개 남짓의 별밖에 없다. 우리 은하의 지름은 10만 광년이나 되고, 관측가능한 전체 우주의 크기는 930억 광년이나 된다. 인간이 만든 가장 빠른 유인 비행체인 아폴로 10호의 초속이 고작(?) 11km, 가장 빠른 무인 비행체인 뉴호라이즌호의 초속이 16km임을 생각하면 빛의 속도는 엄청난 것이지만, 설령 그 속도로 간다 해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몇몇 별들에 다녀오기도 어려운 것이다.
다행히 일반 상대성이론에는 우주의 무지막지한 광대함을 가로지르는 지름길의 실마리가 있다.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중력은 주변의 시간과 공간을 왜곡시킨다. 또한 질량이 있는 물체가 움직이면 중력의 변화로 인해 주변 시공간이 일렁거리며 파동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아인슈타인이 1916년 예측했던 중력에 의한 공간의 휘어짐은 1919년 아서 에팅턴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 별빛이 실제 휘어지는 것을 관찰하면서 증명되었다. 중력파는 두 개의 블랙홀이 충돌해 급격한 질량의 변화가 나타날 때 실제로 관측되어 2016년 2월 11일 데이비드 라이츠에 의해 공식 발표되었다. 이처럼 중력이 시공간을 구부리고 그것이 전파되기까지 한다면 영화 ‘인터스텔라’의 아버지 쿠퍼가 거대한 중력의 블랙홀에 들어가서 지구에 있는 딸 머피의 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중력에 의해 공간과 공간이 만나 접점이 생기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영화적인 황홀감을 만끽하면 머피가 중력방정식을 풀어 인류 전체를 다른 여러 행성으로 이주시키는 것처럼 언젠가 인류도 웜홀을 통과해 공간을 건너뛰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을 꿈꿔볼 수도 있다.
상대성이론은 영화처럼 말도 안 되는 가설을 실험과 관측으로 입증해내며 지난 100년간 인류의 세계관을 바꾸어 왔다. ‘상대성’이라는 말은 그 이전까지 우리가 절대적이고 평등한 것이라고 믿던 시간과 공간은 관측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서로 다르게 움직이는 여러 관측자에게 동일한 ‘절대적’인 것은 오직 우리 우주에서 ‘광속’과 ‘물리법칙’뿐이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다는 것은 유명한 격언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비행기를 타고 빠르게 움직이는 파일롯의 시간은 땅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시간보다 느리게 간다. 100m를 9초58에 주파하는 우사인 볼트의 100m라는 공간은 일반 사람들이 달리는 공간보다 압축된다. 다만, 비행기와 달리기 선수의 속도가 광속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기 때문에 이 오차를 무시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 발표한 특수 상대성이론은 단지 관성좌표계 간의 관계를 다루기 때문에 ‘특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관성좌표계는 물체가 이전 양상으로 계속 운동하는 상태로서 가속이라는 조건이 배제되어 있다. 이는 후에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가속도와 중력을 등가로 치환하기 때문에 결국 중력의 영향을 배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력의 영향이 없는 특수 상대성이론에서 움직이는 좌표계의 시간은 느리게 가고(시간팽창), 진행방향의 길이가 짧아진다(공간수축). 또한 관측하는 지점에 따라 한 관성좌표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은 다른 좌표계에서 봤을 때는 동시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동시성의 상대성). 시간과 공간은 단지 인간이 편의상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고, 광속이 불변이라는 절대 법칙을 지키려면 변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632년 갈릴레오가 논증한 속도의 상대성에 따르면 관측하는 자에 따라 속도는 상대적이다. 마주 오는 차가 내 차보다 빨라 보이는 것은 나를 중심으로 그 차의 속도와 내 차의 속도가 더해져서 보이기 때문이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경주용 자동차의 운전자는 서 있는 사람에게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존재지만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차량의 운전자에게는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이다. 이는 상호간의 속도가 빼져서 상대속도가 0이 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속도의 상대성을 감안한다면 빛과 거의 유사한 속도로 달리는 사람이 관측한 빛의 속도는 불과 시속 수십 킬로미터로 줄어야 한다. 그리고 그 빛에 담긴 과거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빛의 속도와 가깝게 달리며 바라봐도 빛의 속도는 여전히 초속 30만km로서 불변이다. 이는 빨리 달리는 관측자의 시공간이 일그러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속도가 높아질수록 시간은 느리게 가고, 공간은 수축된다. 관측하는 자의 시간이 느리게 가고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 버리니 그에게 빛의 속도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빛의 속도’인 것이다. 이때 시간과 공간은 우주의 절대진리의 광속과 물리법칙을 그대로 지켜내기 위해 치려야 할 비용이다. ‘공짜점심은 없다’는 경제학의 명언은 우주에도 적용된다.
일반 상대성이론은 관성좌표계 외 가속좌표계 속에서의 운동까지 기술하는 좀 더 ‘일반’적인 개념이다. 가속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중력과 등가이다(등가원리). 우주선을 타고 가속하는 우주인이 바깥을 보지 않고 그 안에서 느끼는 힘은 중력과 동일하다. ‘인터스텔라’의 인듀어런스 호는 1분에 5.6번 회전하며 가속도를 발생시켜 인공 중력을 만들어낸다. 물체가 동일한 속도로 회전한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서 가속도를 발생시키는 것과 같고 이것이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중력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속좌표계인 중력은 주변 시공간을 일그러뜨린다. 침대 매트리스에 놓인 볼링공이 만드는 굴곡 같은 모습으로 비유되는 시공간의 곡률은 질량에 비례하고, 질량이 크면 클수록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흐른다. 우리는 지구 중력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지구상 누구에게나 시간은 동일하게 흐르지만 강한 중력을 경험한 사람의 시간은 지구에 있는 사람의 시간과 다르다.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와 브랜드가 첫번째로 방문한 밀러 행성은 주변 가르강튀아 블랙홀의 영향으로 엄청난 중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1시간은 지구에서의 7년이다. 쿠퍼와 브랜드은 그곳에서 3시간 20분가량 머물다 엄청난 파도를 피해 간신히 탈츨했지만 지구의 시간으로는 23년이 흘러 그들이 모선으로 돌아왔을 때 동료 로밀리는 이미 노인이 되어 있었다. 쿠퍼는 두번째 만 행성에서 미션에 실패한 후 연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마지막 에드먼드 행성으로 가기 위해 가르강튀아 블랙홀의 중력을 이용해 속도를 다시 높이는 슬링샷(새총) 비행을 한 후 블랙홀 안에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그 하루 이틀 간에 또 다시 지구 시간으로 51년을 잃었다. 게다가 지구에서 토성 근처의 웜홀까지 냉동 수면 상태에서 비행하고 이후 행성간을 오고가는 동안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특수 상대성이론에 의한 시간지연으로 몇 년을 더 잃었다. 이 때문에 헤어진 어린 딸 머피와 다시 만난 쿠퍼는 생물학적으로 몇 달 정도만 늙어 있었지만 머피는 임종을 앞둔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상대성이론의 수식은 이미 입증되었을 뿐 아니라 실험적 증거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다. 1919년에는 빛이 중력의 영향으로 휘어지는 게 관측되었다. 1941년에는 지구 대기 상층에서 발생하는 뮤온 입자가 원래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2마이크로초로 동안 600m 정도를 날아가다 사라져야 하지만 시간지연으로 그 10배 가까운 시간 동안 날아 지표면까지 도착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1971년에는 각기 다른 비행기와 공항에 설치한 3개의 초정밀 원자시계 시간이 다르게 가는 것이 확인되었다. 1994년 완성된 GPS 시스템에서는 상대성이론을 이용해 그 오차를 보정해 오고 있다. 2016년에는 수식으로 존재했던 중력장이 실제 확인됐고, 그 이후로 중력장의 다른 발견이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동안 상대성이론을 이용해 다른 은하를 여행하는 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웜홀조차 관측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상대성이론이 빛의 속도와 우주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사는 실생활과 연관 있을 일도 없다. 물리학자들이 열광하는 2016년 중력파 발견 사건도 우리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개론과 비유 수준을 넘어 한발짝만 깊이 들어가도 무지하게 어려워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성이론이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우리가 모르는 암흑의 우주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 속의 티끌만도 못한 지구 속에 또 티끌만도 못한 우리 개개인이지만 내 밖의 다른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운행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앞으로도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작은 조각들이 하나씩 발견될 때마다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갈증은 점점 커져갈 것이다. (작성 22.2.27)
코로나 백신 개발은 2020년 5월 15일 미국이 워프 스피드 작전(OWS; Operation Warp Speed) 실행을 발표하면서 가속화됐다. 그리고 그해 12월 14일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사실 과거 백신 개발에는 보통 몇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예를 들어 195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어린이들이 통과의례처럼 치르고 넘어가야 했던 홍역(Measles)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는 5년이 걸렸다. 1958년 최초로 홍역 백신 시험이 있었고, 승인된 것은 1963년이었다. 2000년대 개발이 시작된 사람유두종바이러스(HPV; human papilloma virus) 백신은 2016년 승인될 때까지 무려 15년이 걸렸다. 코로나 백신의 경우 처음에는 많은 제약 전문가들이 개발에 18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고 보았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이 1년에서 1년 반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을 때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비판하는 전문가도 많았다. 하지만 실제로 1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백신 개발은 완료되었다.
이와 같은 신속한 진척이 가능했던 것은 mRNA 백신 기술 덕분이었다. RNA(Ribonucleic acid)는 우리 몸 속에서 단백질을 생성하는데 필요한 유전자를 해독‧전달하고 그 발현을 돕는 역할을 하는 물질이다. mRNA는 세가지 RNA(mRNA, tRNA, rRNA) 중 하나로서 DNA의 유전정보를 우리 체내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는 리보솜까지 운반하는 일을 한다. 이러한 mRNA를 백신 개발에 이용하자는 아이디어는 1989년 처음 제기되어 활발한 연구로 이어졌다. 하지만 워낙 실험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에 코로나 이전에 정식으로 승인을 받은 사례는 없었다.
mRNA 백신은 바이러스 유전자 설계도를 mRNA에 담아 체내에 넣어주어 우리 몸 속 세포가 스스로 실제 바이러스와 비슷한 항원(Antigen)을 생산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mRNA가 주입된 후 만들어지는 항원 단백질은 코로나 바이러스와 유사한 모양을 갖춘 스파이크 단백질(Spike protein)이다. 원래 코로나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은 우리 세포 표면의 많은 단백질 중 하나인 앤지오텐신 전환효소2(ACE2; Angiotensin Converting Enzyme2)라는 수용체와 결합해 자기 안에 있는 바이러스를 세포 안으로 주입한다. ACE2는 혈압 조절에 관여하는 효소 단백질로서 폐, 심장, 혈관, 신장, 간 세포 등에 분포하며, 폐에서 특히 많이 발견된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주로 폐질환을 일으키는 이유가 된다. ACE2는 우리 몸에 필요한 물질이지만 역설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포로 들어오는 입구가 된다. 다른 표현으로는 코로나의 스파이크 단백질이 자물쇠인 ACE2를 슬쩍 속이고 인체 세포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고 하기도 한다. 세포 안에 침입한 바이러스는 세포의 효소를 동원해 스스로 복제하고 세포 내 리보솜을 조종해 외피까지 만든다. 이 과정이 반복되며 바이러스는 증식되고, 늘어난 바이러스는 세포 밖으로 나가 다른 세포까지 감염시킨다. 한편, 코로나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은 우리 몸의 효소 중 하나인 퓨린(Purine)에 의해 활성화되어 특정 부위가 잘리는 특징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바이러스 껍질 안의 유전자가 숙주세포 안으로 들어가기 쉬운 상태가 된다. 사스 같은 다른 바이러스들은 퓨린에 의해 활성화되는 부위를 갖고 있지 않은 반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활성화부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빠른 전염의 원인이 되었다.
mRNA 백신 기술에서는 실험실에서 신속하게 만들 수 있는 분자물질을 사용한다는 장점이 두드러진다. 이 때문에 달걀을 이용해서 단백질 원료 성분을 오래 배양해야 하는 다른 백신보다 더 빠르게 개발하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 또한 위험한 바이러스를 몸에 직접 넣지 않고 본래 우리 몸에 있는 신호전달물질인 mRNA를 주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강하다. 몸 속에 들어간 mRNA는 그 안에 담은 유전정보를 리보솜에 전달하는 역할을 마친 다음에는 세포에 의해 분해되어 사라지므로 인체에도 무해하다. 반면, 'RNA는 구조가 매우 취약해 주위 환경에 따라 가지고 있는 정보가 흐트러질 우려가 있다. mRNA는 중간에 유전정보가 일부 헝클어져도 이를 자체적으로 복구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만일 이렇게 세포 속에서 잘못 생산된 단백질이 문제를 일으키면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전승민 과학저술가).
아무튼 mRNA 백신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몸에서 코로나와 유사한 모양의 항원 단백질이 만들어지면 백억개에 이르는 B세포라는 곳에서는 이에 효율적으로 대항하는 항체(Antibody)를 생산한다. 정상적이라면 초당 만개에 해당하는 항체가 만들어질 정도로 생성 속도가 빠르다. 항체는 단백질의 일종으로서 Y자 모양으로 생겼고, 스파이크에 달라붙어 스파이크가 세포 수용체에 달라붙는 걸 막는다. 백신에 의해 이런 항체가 많이 생겨나면 진짜 코로나 바이러스가 들어왔을 때 세포가 감염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는 대부분 이 스파이크 단백질에 변형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델타변이는 스파이크에서 16개의 돌연변이가 나왔고, 오미크론은 32개 돌연변이가 나타났다. 다행히 이런 돌연변이 단백질에서는 ACE2 같은 세포 표면의 수용체에 결합하는 능력이 손상됐다. 이에 따라 기존 바이러스와는 다르게 폐 감염율이 낮아져 치명률이 감소했다. 반면 코, 목 같은 상기도에서는 활발하게 증식해서 전염력이 훨씬 강해졌다. 또한, 변이 바이러스의 스파이크는 기존 바이러스의 스파이크와 모양이 달라서 백신으로 만들어진 항체가 달라붙기 어렵게 되어 버리기도 했다. 몸 속에 형성되어 있는 항체가 바이러스의 세포 침투를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부스터샷을 통해 더 많고 다양한 항체를 몸 안에 만들어서 변이 바이러스에 대항해야 한다는 해법을 내 놓았다.
백신 개발에는 mRNA 외에도 여러 방법이 있다. 바이러스벡터 백신(Viral vector vaccine), 재조합 백신(Protein-based vaccines), 불활화 백신(Inactivated vaccine) 등이 그것이다. 바이러스벡터 백신은 인체에 무해한 아데노바이러스를 실제 바이러스 DNA의 운반체(Vector)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아데노바이러스는 감기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로서 몸 속에서 질병을 일으키지 않도록 변이되어 사용된다. 그 안에 코로나 바이러스 유전자를 넣어 인체에서 항원 단백질이 만들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영국 아스타라제네카, 미국 얀센, 러시아 스프트니크 백신이 모두 이 방식으로 개발되었다. 재조합 백신은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이용해 외부에서 만든 항원 단백질을 직접 몸에 주입하는 방식이다. 가장 많이 사용되고 오랜 경험을 갖췄기 때문에 안정성이 매우 높다. B형간염 백신, 사람유두종바이러스 백신 등 기존 백신이 이 방법을 사용했다. 미국 노바백신과 우리나라 SK바이오사이언스의 백신도 이 방식을 채택했다. 불활화 백신은 실제 바이러스를 사멸시킨 후 몸에 주입하는 원리이다. 고위험 바이러스를 직접 다뤄야 하는 위험성은 있지만 몸 속에서 바이러스의 감염력을 약화시키는 항체를 효과적으로 형성하는 데 유리하다. A형간염 백신, 소아마비 백신, 일본뇌염 백신이 이렇게 개발되었고 중국 시노팜도 이 원리로 만들어졌다. 한편, 아직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방법으로 DNA 백신도 있다. DNA를 우리 몸 속 세포핵에 주입을 해서 세포핵으로 하여금 필요한 mRNA를 직접 생산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우리 몸이 꾸준히 mRNA를 만들어내도록 해 면역의 지속성은 높은 반면, 세포핵을 직접 변형한다는 점에서는 신중하게 고려할 점이 많다.
이처럼 몸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현상을 유전 정보를 이용해 조절한다는 것은 현대 과학이 이룬 놀라운 성취이다. 인류는 코로나의 어려움을 딛고 지혜를 모아 새로운 백신 생산 기법을 계속 만들어 가고 있다. 백신 기술이 더욱 발전해 인류를 질병의 고통에서 진정으로 해방시켜 줄 날을 기대한다. (작성 2022.2.13)
우리 몸이 침입자에 대항하는 면역체계는 매우 복잡하고 정교하다. 혈액과 림프액에는 면역을 담당하는 세포집단이 있는데 이를 통칭하여 백혈구(Leucocyte, White blood cell)라고 한다. 골수에서 생성되는 조혈모세포는 다양한 형태의 백혈구 세포들을 만들어낸다.
백혈구 중 가장 수가 많은 것은 호중구(Neutrophil)로서 전체의 55~70%를 차지한다. 독특한 이름의 의미는 중성색소에 의해 염색이 잘되는 효소주머니(과립)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백혈구의 의학적 성격을 나타냈다기 보다는 다분히 분류 기술적인 측면이 강하다. 호중구는 우리가 흔히 보는 고름에 많이 분포한다. 고름에는 상처를 통해 침입한 세균과 전쟁을 벌이는 살아있는 호중구와 싸우다 전사한 호중구의 시체 더미가 가득차 있다. 호중구는 우리 몸에 침입자가 발생했다는 신호가 접수되면 단 6~12시간 안에 감염부위로 몰려든다. 호중구의 과립 안에는 단백질 및 지질 분해효소, 산화효소 등 다양한 효소가 들어 있어 병원균을 분해하고 해체해 버린다. 활성산소를 만들어서 그 독성으로 병원균을 섬멸하기도 한다. 침입자를 먹어치워 버리 듯 없애버리기 때문에 포식세포라고도 한다. 병원균과의 전쟁에서 백병전을 치르는 보병과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산성 색소에 염색이 잘되는 호산구(Eosinophil)는 백혈구의 2~4%를 차지한다. 기생충과 같은 병원체를 잡아먹고, 알레르기 질환에 대한 면역 반응도 일으킨다. 천식, 꽃가루 같은 자극이 발생하면 급증한다. 특별한 임무를 처리하는 특수부대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염기성 색소에 의해 염색이 잘 되는 호염기구(Basophil)는 전체의 0.5% 미만에 불과하다. 혈관 확장을 유발하는 히스타민을 방출한다. 호산구처럼 기생충과 알레르기 반응에 관여한다. 그 밖에 마치 나무가지처럼 생겼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수지상세포(Dendritic cell)는 병원균의 정보를 표시해 다른 세포들에 정보를 전달하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우리 몸에서 가장 큰 면역세포라는 의미의 대식세포(Macrophage)는 호중구처럼 항원을 잡아먹기도 하고, 림프절로 들어가 다른 세포들에게 표본을 전해주는 역할도 한다.
림프액에서는 림프구(Lymphocyte)에 해당하는 백혈구들이 활약한다. 림프구는 전체 백혈구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면역 체계에 있어서 결정적인 NK세포(Natural killer; 자연살해세포), T세포, B세포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군대로 치면 정예 특수부대, 저격수에 해당하는 세포들이다. 후천성 면역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NK세포는 침입자가 들어온 지 12시간 정도쯤 지나면 등장한다. 강력한 살상력을 가지고 있고,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 자체를 제거해 버린다. 암세포 제거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T세포와 B세포는 감염이 시작된 날부터 3~7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활약한다. T세포도 NK세포처럼 식균작용을 통해 감염된 세포 자체를 공격해 죽인다. 항원을 식별하고, 예전에 상대했던 항원을 기억하고, 감염되거나 유전자가 변이된 세포를 식별해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워낙 다재다능하기 때문에 T세포 기능의 장애는 우리 몸에 치명적인 피해로 이어진다. 후천성 면역결핍을 유발하는 HIV 바이러스가 바로 이 T세포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B세포는 병원체를 직접 죽이기도 하지만 항체(Antibody)라는 정밀 유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다. Y자 모양으로 생긴 항체는 항원을 기억해서 달라붙은 후 항원이 세포와 결합하는 것을 방해한다. B세포는 T세포가 죽인 다음 남은 바이러스를 청소하는 역할도 한다. T세포와 B세포는 모두 특정 항원을 식별하는 수용체라 부르는 단백질 입자를 가지고 있다. 세상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다양한 항원이 존재하는데 우리 몸에는 그것들 각각에 꼭 맞는 수용체를 가진 T세포와 B세포가 있다. 항원의 종류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하나의 T세포에는 약 2만개, B세포에는 약 10만개의 수용체가 있을 정도이다. 이들 후천 면역 세포는 항원을 만나면 신분증 검사를 하듯 자신의 수용체를 맞춰보고, 수용체와 꼭 맞는 항원을 만난 세포는 본연의 작전을 개시한다.
2010년도부터는 면역항암치료(Cancer immunotherapy)가 시작되면서 항암치료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렸다. 이미 1990년대부터 연구되기 시작한 면역항암제는 2010년 최초로 전립선암 항암제가 승인되고 2011년 두번째로 악성흑색종(피부암) 항암제가 승인되면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특히 2015년 피부암 진단을 받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면역항암제 치료를 받고 고령의 나이에도 건재하면서 대중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면역항암제의 원리는 거칠게 표현해서 우리 몸의 T세포를 활성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면역항암제의 하나인 면역관문 억제제(Immune Checkpoint Inhibitor, ICI)는 암세포가 우리 몸을 속여 T세포를 줄여버리는 바람직하지 못한 작용을 억제하는 것이다. 원래 우리 몸은 면역체계가 너무 지나치게 활성화되어 T세포가 정상세포까지 공격해 먹어치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면역관문(Immune Checkpoint)이라는 것을 두고 있다. 면역관문은 T세포가 우리 몸을 지키는 경주에서 엑셀을 밟을 때 사고나지 않도록 살짝 브레이크를 밟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T세포에는 면역 억제성 수용체 단백질인 PD-1( Programmed cell death protein 1)이 있다. 면역 신호물질인 사이토카인이 많이 분비되어 T세포의 활동이 충분히 이루어 졌다고 보면 전령사인 수지상세포가 자신의 PD-L1(Programmed Death-Ligand 1) 수용체를 PD-1에 붙여서 T세포에게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린다. 이것이 면역관문(Immune Checkpoint)으로서 적절한 브레이크를 밟는 과정이다. 그런데 암세포는 자신의 적인 T세포를 속이기 위해 교묘하게 면역관문을 이용한다. T세포가 정찰하면서 암세포에 접근하면 암세포는 PD-L1을 다량으로 발현하여 T세포 표면의 PD-1과 결합해서 T세포가 공격을 단념하게 만든다. 면역항암제인 면역관문 억제제는 바로 이 작용을 막아 방해받지 않는 T세포가 맘껏 암세포를 찾아 공격할 수 있게 만드는 원리이다.
면역항암제의 다른 종류는 키메라항원 수용체 T세포(CAR-T; Chimeric Antigen Receptor T) 치료법이다. 환자의 T세포 표면에 암세포의 특징적 항원을 인지하는 수용체를 삽입하는 방법이다. 몸 속에서 T세포를 꺼내서 유전자를 조작한 다음 다시 배양해 넣는 고난이도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렇게 특수한 검사장치를 장착한 T세포는 보다 효과적으로 암세포를 찾아내어 파괴할 수 있다. 이 방법은 특히 기존에 치료가 어려웠던 혈액암에 큰 효과를 보인다.
2018년 미국의 제임스 앨리슨과 일본의 혼조 다스쿠 교수는 면역항암제 개발 공로로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공동 수상이지만 둘은 각각 독자적으로 면역항암제의 중요 물질을 발견하였다. 앨리슨 교수는 CTLA-4라는 수용체가 T세포의 기능을 방해하는 것을 발견하고 이의 억제제(anti-CTLA-4)를 개발했다. 혼조 교수는 PDL-1이 T세포를 훼방 놓는 것을 찾아내고 이의 억제제를 구상했다.
현재 글로벌 항암제 시장에서는 면역항암제가 대세가 되었다. 1세대 항암제인 화학항암제(Chemotherapy)는 정상세포보다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세포를 인식해 이를 집중 공격하여 분열을 차단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의 단점은 예전 드라마에서 항암치료로 고통을 받고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장인물들을 떠올리면 상상하기 쉽다. 암세포 외에 빠르게 분열하는 혈구세포, 점막세포, 생식세포 등까지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때문에 환자를 말 그대로 피폐하고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2세대 항암제인 표적항암제(Targeted therapy)는 DNA에 변화가 일어난 돌연변이 세포를 찾아내 파괴한다. 암세포만이 가진 특정 유전자를 식별하는 것이다. 1세대에 비해 분명 발전된 기술이지만 유전자 변이를 가진 환자에만 적용 가능하고, 시간이 지나면 환자의 몸에 내성이 생긴다는 게 문제이다. 암세포와 관련된 특정 단백질만 표적해 공격하는 분자표적치료체도 등장했지만 역시 특정 물질이 있는 환자에 대해서만 효과가 있고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게 단점이다. 3세대 면역항암제는 이전 방법과 달리 환자 자체의 면역 능력을 활용하기 때문에 장점이 두드러진다. 이미 개발된 여러 면역항암제를 병용하고, 기존 표적항암제와도 함께 사용하면서 좋은 임상 사례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키트루다(머크), 옵디보, 여보이(BMS), 티센트릭(로슈), 임핀지(아스트라제네카), 바벤시오(머크, 화이자), 리브타요(사노피) 등의 글로벌 제약사의 히트 상품도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항암제 시장에서도 해외 제약사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지만 국내 제약사들도 항암제 신약 개발에서 수십 건의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 대규모의 기술이전을 이룬 사례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해외사의 면역항암제 특허가 만료되면 우리가 강점을 가진 바이오시밀러 기술을 활용해 가성비 높은 항암제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양자컴퓨터, AI 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경우의 수에서 최적값을 더 빠르게 찾아갈 수 있게 됨에 따라 암세포가 T세포를 속이는 다양한 수용체를 발견하는 속도도 가속화될 것이다. 암세포가 유발하는 유전자 변이 기제도 더욱 자세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인류가 암을 점차로 정복해가는 과정을 직접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성 2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