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아메리카에 진출한 스페인은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접근하기 어려웠던 캘리포니아까지 세력 범위를 넓혔다. 스페인이 캘리포니아에 자리잡을 때 핵심 거점은 수도원(Mission) 네트워크였다. 1769년 첫 번째 수도원이 설치된 후 50여 년이 지난 1823년까지 약 600마일(960km)에 이르는 긴 거리에 총 21개의 수도원들이 만들어졌다. 이들 수도원들은 가장 남쪽의 샌디에고부터 샌프란시스코 북쪽 소노마까지 이르는 긴 길을 잇는 역할을 했다. 수도원 간의 간격은 약 30마일(48km) 정도였는데, 이것은 10시간가량 걸으면 하루 안에도 갈 수 있고, 말을 타면 2~3시간 남짓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이렇게 수도원 네트워크를 짜 놓으면 남쪽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물자, 사람, 정보가 오고가는 것이 아주 용이했다. 남북으로 긴 캘리포니아 내부를 이동할 때도 이 길이 가장 중요한 간선도로(El Camino Real, 왕도)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었다. 수도원 네트워크 건설을 총괄한 세라 신부는 1784년 몬터레이 남쪽 도시 카멜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총 9개의 수도원을 직접 세웠다. 그가 세운 수도원들은 오늘날의 샌디에고, LA, 카멜, 몬터레이, 산호세, 샌프란시스코 같은 주요 도시들이 자리 잡는 직접적인 기반이 됐다.
각 수도원들은 교통의 요충지였던만큼 각 지역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수도원들의 가장 큰 수익원은 소 목축업이었다. 18세기 말에는 아직 신선한 고기를 빠르게 나를 수 있는 수 있는 운송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의 소는 주로 가죽(Hide)과 양초기름(Tallow)을 얻기 위해 길러졌다. 풀이 별로 없는 건조한 곳에서 소를 방목해 길러야 했고,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필요로 했던 다른 정착민들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각 수도원들은 엄청난 넓이의 토지를 관장했다. 한 예로 오늘날의 산타바바라에 있었던 수도원은 무려 12만 에이커(480㎢, 서울시 면적의 80% 정도)의 주변 땅을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또한 당시 수도원별로 들여와 길렀던 포도, 오렌지, 살구 같은 과일 종자들은 계속 번식해 훗날 캘리포니아의 주요 농산물들이 되었다.
수도원과 함께 건설된 군사기지(Presidio)와 정착마을(Pueblo)도 스페인 식민지의 중요한 거점들이었다. 군사기지인 프레지디오는 샌디에고, 몬터레이, 샌프란시스코, 산타바바라의 4군데에 설치됐고, 민간인이 거주하는 푸에블로는 1777년 산호세, 1781년 LA를 시작으로 총 6군데에 만들어졌다. 푸에블로에는 보통 수십 명의 주민들이 거주했다. 이들은 주로 농사를 지어 인근 수도원이나 프레지디오에 식량을 공급하면서 생활을 영위했다.
스페인 지배 시기 유명한 탐험가 중 한 명은 포톨라의 첫 탐사로부터 5년이 지난 1774년 오늘날의 애리조나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이르는 험한 사막 길을 개척한 후안 바티스타 안자(Juan Bautista de Anza)였다. 그는 177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할 193명의 대규모 이주민들을 인솔했는데, 인간적이고 윤리적이었던 그의 통솔 방식은 동행한 주민들의 높은 호응을 얻었다. 다른 유명한 탐험가로는 군인 신분으로 1774년 안자의 탐험대에 참여했던 코르넬리오 아빌라(Cornelio Ávila)가 있었다. 아빌라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군인을 전역한 1783년 가족 전체를 이끌고 LA 푸에블로로 와서 영구히 정착했다. 그는 6명의 자녀들을 남기고 1800년 죽었는데, 그의 자손들은 이후 거대한 목장주들이 되어 남부 캘리포니아의 유력한 가문을 형성했다.
한편 오랫동안 캘리포니아에 무관심하던 스페인이 갑작스레 건설하기 시작한 수도원, 프레지디오, 푸에블로는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에게는 큰 재앙이었다. 수만 년간 고립되어 살아온 캘리포니아 원주민들도 유럽의 병원균에 대한 면역 체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스페인 진출 이전 30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주민들의 인구는 50여 년이 지난 후에는 불과 2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스페인은 이처럼 뒤늦게 서북쪽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8세기 말부터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 제국의 힘은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긴 영국이 미국 독립 전까지 한동안 세력을 크게 확장했고, 서쪽에서는 러시아가 공공연하게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19세기에 들어선 1812년에는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 북쪽 소노마 카운티 인근까지 내려와 캘리포니아 내에 정착기지(Fort ross)를 건설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스페인에게 있어 다른 유럽 열강들의 확장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아메리카 식민지의 핵심인 뉴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란이었다. 뉴스페인의 멕시코인들은 1810년 군대를 만들어 스페인 식민정부에 조직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멕시코의 독립 열기는 아메리카와 유럽의 정세 변화 속에서 빠르게 고조되었다. 1783년 미국 독립의 영향으로 인해 유럽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멕시코인들 스스로의 열망이 매우 뜨거웠고,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유럽 내부의 판도도 크게 변한 상황이었다. 스페인 자체도 1808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배함으로써 제국의 힘을 많이 잃어버렸기도 했다. 오랫동안 치열한 투쟁을 벌인 멕시코인들은 결국 1821년 독립을 쟁취했다. (게재 21.11월)
17세기 중반 유럽에서는 많은 전쟁이 발발해 러시아와의 모피 교역로가 막혔다. 마침 소빙하기라고 불리는 전 지구적인 저온 현상이 지속되면서 아메리카산 모피의 인기가 높아졌다. 이런 경향은 19세기 초까지도 내내 이어져 유럽에서 아메리카 비버 모피는 계속 높은 값에 거래됐다. 상황이 이러하자 아메리카에는 산 속 계곡에서 비버를 잡아 모피를 얻기 위한 산사나이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그러나 로키산맥 같은 미국 중부의 산악지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산 사나이들은 방직기술의 발달로 1840년대부터 모피 수요가 감소하자 수입원을 잃었고, 하나둘씩 산에서 내려와 인근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었던 곳은 태평양 해안가, 오늘날의 오레곤 지역이었다. 오레곤은 스페인·멕시코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캘리포니아와는 달리 1818년 체결된 국제 조약(Treaty of 1818)에 의해 미국과 영국이 공동 지배하는 곳이어서 미국인의 접근이 자유로운 곳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태평양 해류의 영향 덕분에 여름철에는 서늘하고 겨울철에는 따뜻했으며, 강수량도 제법 많아서 농사를 짓기에도 좋은 여건을 갖고 있었다. 더군다나 당시까지는 기존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미국인 모피 사냥꾼들이 은퇴해서 살기에는 안성맞춤인 지역이었다. 사냥꾼들 외에도 원주민들에게 포교하기 위한 미국인 선교사들도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와 속속 터전을 잡았다.
그러나 1804년 루이스와 클락의 초기 서부 탐사 이후 모피 사냥꾼들이 많은 길들을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에 내륙을 통해 이곳에 이르는 길은 여전히 험했다. 예를 들어 1824년에 서북쪽 해안에 군사거점을 만들기 위해 중부의 미주리에서 사람과 물자를 보내는 비용은 3만 달러(현재 가치로 82만 달러, 10억 원 가량)에 달했다. 군대라면 모를까 일반 정착자들이 이 정도의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물자와 사람을 이곳에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농사지을 수 있는 공짜 땅에 대한 꿈은 매혹적이어서 1830년대에 들어서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오레곤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결국 1840년대에 들어서는 매년 수 백여 명의 대열이 우마차를 끌고 5~6개월을 걸어 이곳으로 이주했다.
오레곤으로의 이주가 인기를 끌자 당시 멕시코의 영토였던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발걸음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841년 69명의 첫 번째 이주 행렬(Bartleson-Bidwell Party)이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가기 위해 험한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넘었다.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 눈에 고립돼 겨우내 87명중 39명이 목숨을 잃은 도너 일행(Donner Party)도 1846년에 이 길을 따라 캘리포니아까지 가려고 하던 사람이었다.
한편 1839년부터 멕시코 정부에게서 땅을 받아 북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던 스위스 출신 이민자 존 서터(John Sutter)는 1841년 오늘날의 새크라멘토 인근에 큰 규모의 정착기지(Sutter’s fort)를 건설했다. 이 서터 기지는 한동안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넘어 처음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미국인 이주자들이 모이는 관문과 같은 역할을 했다. 1848년 골드러시 때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 기지에 당도해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이 시기 육로 외에 해로를 통한 교류도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 들어서는 증기선 등 항해 기술이 발전하면서 태평양 해안 무역이 크게 늘어났다. 1824년 영국의 모피 무역상들은 오늘날의 캐나다 밴쿠버에 교역 기지(Fort Vancouver)를 건설해 서부 해안의 교역을 주도했다. 영국의 상인들은 밴쿠버 항을 중심으로 주변의 모피를 수집했고 오레곤 등 서해안에 정착한 사람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했다. 또한 이 즈음에는 미국 보스턴의 무역 상인들도 서해안을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캘리포니아 대지주들의 소 목장에서 나온 양초 수지, 가죽 등을 미국 동부에서 가져온 생필품, 가구 등과 교역했다. 수익성이 좋은 이 장사를 위해 미국 상인들이 빈번히 캘리포니아를 왕래했고, 일부는 캘리포니아에 아예 정착해서 자신의 상점을 열기도 했다. 1834년부터 1836년간 캘리포니아행 무역선에서 일했던 미국인 청년 리처드 다나(Richard Henry Dana)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Two Years Before the Mast)을 출판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책은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캘리포니아와 서부 태평양 해안을 미국 동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서부 해안 지역을 공식적으로 영토에 포함시켰다. 1846년에는 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미국과 캐나다의 경계를 확정 짓고 북서쪽 오레곤 테러토리(Oregon territory)를 설치했고, 1848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남서쪽 캘리포니아를 획득했다. 당시 원주민들을 제외한 이 두 지역의 주민 수는 오레곤 13,000명, 캘리포니아 14,000명 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게재 21.11월)
미연방에 편입된 1848년부터 캘리포니아에는 골드러시(Gold Rush)가 시작되었다. 골드러시 당시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멕시코인, 스페인인, 미국인, 기타 유럽인들을 포함해 이주민 14,000여 명과 30,000여 명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주 전체 인구가 당시 50여 만 명이 살고 있던 뉴욕시보다 작았던 것은 물론이고, 7만 여 명이 거주했던 미주리주의 세인트루이스시 같은 중부 지역 한 도시의 인구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 편입과 동시에 일어난 골드러시는 모든 것을 순식간에 바꾸어 놓았다.
골드러시의 광풍이 불어닥친 후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급속하게 증가하기 시작해 금이 처음 발견된 지 4년이 지난 1852년에는 25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50여 년이 지난 1900년 인구는 150만 명이 되었고, 1940년에는 700만 명을 돌파했다. 금이 발견된 지 100년이 조금 지난 1964년에는 인구가 1,800만 명을 넘어섰다. 이때 캘리포니아주는 당시 1,790만 명이 살았던 뉴욕주를 제치고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주가 되었다. 최대 규모의 주가 된 이후에도 인구의 증가세는 멈추지 않았다. 1960년대 이민법의 개정으로 아시아, 라틴계 등 이주민들까지 더욱 빠른 속도로 유입되어 오늘날 캘리포니아에는 전체 미국인의 1/8인 약 4,000만 명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다. 1848년을 기준으로 지금까지 인구가 증가한 비율은 무려 1,000배에 이른다.
특히 20세기 초는 캘리포니아에 더 많은 이주민들이 몰려들고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던 시기였다. 1900년 150만 명에 이른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증가폭을 점점 확대하기 시작했다. 1910년을 즈음해 마침 자동차까지 대량으로 보급되자 주 전체에 개발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철도역에서 먼 곳에도 주거단지가 들어섰고 고속도로 등 자동차 전용 도로망이 등장했다. 풍광이 좋고 기후가 온화한 해안가에는 신생 도시들이 속속 생겨났고, 전국에서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서부 해안으로 여행이나 휴가를 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1914년 개통된 파나마 운하는 다가오는 태평양 시대를 예고하며 서부 해안을 더 들썩거리게 만들었다. 20세기 초 서부의 중심 항구로 급부상한 LA항의 물동량이 크게 늘어났으며, 샌프란시스코(Panama Pacific International Exposition)와 샌디에고(Panama California International Exposition)는 1915년에 경쟁적으로 국제 박람회를 개최해 태평양 교역 선두 주자로서의 이미지를 차지하려고 했다.
이 시기 캘리포니아의 대도시들은 외관 가꾸기에도 열을 올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0년에 UC버클리 대학이 개최한 캠퍼스 개선 국제 공모에서 프랑스의 보자르 양식(Beaux-Arts) 설계안이 당선된 것을 계기로 신고전주의 양식이 크게 유행했다. 1904년 샌프란시스코시는 당시 미국 내 도시 미화 운동(City beautiful movement)의 주도자였고 1893년 시카고 박람회장(White City)을 설계하기도 했던 저명한 건축가 다니엘 번햄(Daniel Hudson Burnham)을 초빙해 도시의 마스터플랜을 의뢰했다. 번햄은 공교롭게도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발생하기 하루 전에 리포트를 제출했는데, 지진 이후 재건 과정에서 그의 계획을 반영해 도시를 전면 개조할 것이냐 아니면 기존 형태로 빠르게 복구할 것이냐는 지역의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결국 서부의 중심지 위상을 놓치기 싫어한 도시 지도층들은 신속하게 도시를 복원하는 방안을 선택했지만 번햄의 구상은 회복 과정에 적지 않게 반영되어 네오 바로크 양식의 시청, 대형 공연장, 중심 광장, 간선 교통망 등이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미쳤다.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선호했던 샌프란시스코와는 다르게 남쪽 샌디에고는 도시 확장 시 남유럽의 건축 양식을 많이 차용했다. 1908년 샌디에고시는 매사츄세츠주의 건축가 존 놀렌(John Nolen)에게 미래 도시계획을 맡겼는데, 그는 야자수, 햇살, 바다와 어우러지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풍의 도시 비전을 제시했다. 1915년 국제 박람회를 위해 발보아 파크(Balboa Park)에 들어선 스페인 양식 건축물들은 물론 원본의 역사와 깊이를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놀렌의 계획을 성실히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 무렵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스페인 풍의 스투코(Stucco) 양식도 일반 주택의 외벽을 처리하는 데 널리 쓰기기 시작했다. 값싸고 질 좋은 목재가 풍부한 미국의 건물은 오늘날까지도 대부분 나무로 지어지는데, 특히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지진의 위협이 상존하기 때문에 나무가 필수적인 건축 재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스투코 양식은 이런 나무 뼈대 집의 외벽을 큰 통나무나 널빤지로 만들지 않고 시멘트와 모래를 섞은 재료를 분사해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시공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나무 집을 마치 단단한 석조건물처럼 일체감 있고 부드러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나무로 자유롭게 구조를 짠 다음에 철망을 덮고 스투코를 뿌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집의 모양이나 색의 표현도 다양하고 유연하게 할 수 있었다. 비에 약하다는 큰 단점도 강수량이 적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명이 길고, 유지관리 비용도 적게 드는 등 다른 여러 가지 이점도 많았기 때문에 남부 캘리포니아에는 오늘날까지도 스투코 기법이 건축물 양식의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보기 좋은 도시를 만들려고 했던 20세기 초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고의 시도는 이후 캘리포니아의 여러 도시들이 새로 만들어질 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캘리포니아에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이주자들의 다양성만큼 여러 형태 건축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로마네스크, 고딕, 고전주의, 바로크 등 유럽의 다양한 건축양식을 모방한 대형 건물들, 서부 프런티어 마을에서 유래한 실용적이고 단순한 모양의 목재 구조물들, 20세기 현대식 빌딩 등은 서로 뒤섞여 캘리포니아만의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전 세계적인 경제호황이 이어지던 1920년대에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300만 명을 넘어섰고 각 지역의 발전은 여전히 이어졌다. 이 시기는 오늘날 국가 단위로 비교해도 세계 5위 수준에 이르는 캘리포니아의 거대 경제를 지탱할 주요 산업들의 씨앗이 뿌려졌던 때였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그때까지의 주산업이었던 금광, 농업, 철도 건설 외에 여러 가지 경제적 기반이 만들어졌다.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은 세계 석유와 영화 산업의 중심으로 올라섰다. 1924년 전성기 때에는 한해에 LA 지역에서만 생산된 석유의 양이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생산량과 엇비슷한 2억 3천만 배럴, 천연 가스의 양은 오늘날의 베트남의 생산량과 비슷한 3천억 입방 피트에 달할 정도였다. 탄생한지 10년 밖에 안 된 할리우드 영화는 전통의 유럽영화를 제치고 미국 시장 전체에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곳곳에 새 도로와 도시들이 조성되고, 대형 운동장, 도서관, 관공서 건물이 속속 만들어지면서 건설업도 규모를 키워갔다. 호텔‧관광업, 금융업 등 오늘날에도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서비스 산업들도 이 시기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경제 호황이 이어지던 1920년대 내내 캘리포니아 사람들도 일확천금을 꿈꾸며 주식, 채권 등을 맹렬히 사들였고, 넘치는 돈으로 인한 개발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자동차와 항공기 제조업도 이 시기 지역의 주요 산업으로서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냈지만 캘리포니아는 이 중요한 산업들의 불씨를 계속 살려 가지는 못했다. 한 때 디트로이트에 이어 미국 내 2위 생산을 자랑했던 자동차 산업은 2차 대전 이후 일본, 독일 등 수입차와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하고 쇠퇴하고 말았고, 최대 크기의 비행기와 첨단 우주선까지 만들었던 항공 산업은 2차 대전 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상업용 비행기 시장을 선도하지 못하면서 마찬가지로 서서히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20세기 초의 흥분이 갑자기 끝나고 대공황의 골이 깊던 1930년대에는 캘리포니아도 다른 주들과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호황기에 기획되어 마침 이 시기 진행됐던 대형 공공사업은 지역 경제의 활력을 유지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수 년여의 공사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베이 브리지(1936), 금문교(1937) 등을 잇달아 준공했고, 이와 연계한 대규모 박람회(Golden Gate Exposition, 1939)를 개최해 경제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교량들은 당시의 불경기 극복에 도움을 줬을 뿐 아니라 바다로 단절된 만의 여러 권역을 하나로 묶어서 이후 지역 경제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샌프란시스코 남쪽에서는 1930년대부터 여러 창업 기업들이 생겨나면서 훗날 실리콘밸리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고, LA를 비롯한 남부 지역의 영화 산업은 오히려 불황 속에서 빛을 발했다. 이미 유성 영화, 대형 블록버스터 시대로 돌입한 영화 산업은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기분 전환을 원하던 미국 소비자들을 효과적으로 공략하며 성장을 이어갔다. 1932년 LA시가 처음 개최한 올림픽도 때마침 불어 닥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이런 영향 등으로 캘리포니아의 경제 사정은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았기 때문에 이 시기 전국의 많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특히 가뭄과 모래 폭풍의 타격이 심했던 중부 평원 지역에서는 30~40만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인해 1940년이 되자 캘리포니아 인구는 더욱 증가해 700만 명에 가까워졌다.
태평양이 주요 전장이었던 2차 세계 대전은 캘리포니아를 전략적으로 더욱 중요한 지역으로 만들어 주었다. 전쟁 기간 중에 캘리포니아에는 군 공항, 비행기 공장, 조선소, 훈련장, 연구소 등을 비롯한 대규모 군사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1940년부터 1946년 사이에 연방 정부는 당시 국방비의 10%에 해당하는 350억 달러(현재 가치 4,700억 달러 정도)를 이 지역에 투입하여 각종 산업 발전을 촉진했다. 덕분에 LA, 샌디에고 일대에는 항공 산업, 샌프란시스코에는 조선업이 번성해 한동안 호황을 이어갔다. 전쟁이 유발한 생산량 증가가 워낙 컸기 때문에 이 시기 캘리포니아 전체에 걸쳐 고용이 6배 이상 증가할 정도였다. 한편 전쟁 중에는 많은 군인들이 캘리포니아에서 훈련을 받은 후 태평양 각지의 전장에 참전했는데, 훈련 중에 이곳의 온화한 날씨를 경험한 군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아예 캘리포니아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캘리포니아는 전후인 1950년 인구 1천만 명을 돌파해 전통의 펜실베니아주를 제치고 뉴욕주 다음 두 번째 거대 주 자리에 올라섰다.
20세기 후반에도 캘리포니아의 인구는 다시 또 3천만 명이 증가해 현재는 4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 1964년에는 뉴욕주마저 제치고 미국 연방 내에서 최대 인구 주가 되었다. 이처럼 전후 짧은 시간 동안에 이전 100년 동안 모여든 사람의 3배에 달하는 숫자가 또 다시 이주해 오다 보니 주택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여전히 넓은 목장이나 경작지가 많았기 때문에 허허벌판에 대규모 도시가 한꺼번에 만들어지는 경우도 흔했다. (게재 21.11월)
골드러시가 거의 끝나가던 1860년 인구 56,000명을 돌파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15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불과 10년 전에는 아는 사람조차 별로 없었던 서부의 작은 항구가 이미 1600년대부터 이민자들이 정착을 시작했던 동부의 쟁쟁한 도시들을 제치고 14위인 수도 워싱턴DC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것 자체가 미국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이주민들의 유입에 힘입어 샌프란시스코는 캘리포니아의 제일 도시를 넘어 서부의 중심으로 빠르게 부상했다. 금·농산물 같은 수출품과 늘어난 사람들이 써야할 수입품들의 양이 엄청났기 때문에 항구의 규모와 물동량은 계속 커졌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된 후로는 동부로의 접근성까지 획기적으로 개선되어 도시 발전 속도는 더 빨라졌다.
남부 캘리포니아 농업의 중심지였던 LA도 1876년 철도가 연결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5년이 지난 1881년에는 뉴멕시코와 이어지는 두 번째 철도 노선까지 만들어졌다. 두 개의 대륙횡단철도가 지나는 곳이 되면서 LA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철도 회사는 이곳의 따뜻한 기후를 홍보하면서 LA 주변의 택지를 판매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880년 1만 명이던 LA시의 인구는 1890년 5만 명, 1900년 10만 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특히 1892년 LA 다운타운 근처에서 유전이 발견된 것은 말 그대로 도시 성장의 불꽃에 기름을 부은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가 넘치는 이 신흥 도시로 몰려들었다. 시 주변으로는 이주민들과 부동산 투자자들이 목장주들의 토지를 대규모로 구입해 새로운 행정구역들을 속속 만들었다.
대륙횡단철도로 돈을 번 센트럴퍼시픽 철도 회사의 대주주들은 빅4(Leland Stanford, Collis Potter Huntington, Mark Hopkins, Charles Crocker)로 불리며 이들 떠오르는 도시들의 상권을 지배했다. 이들은 과도한 독점으로 오랫동안 지역사회에 많은 폐해를 끼치기도 했지만 캘리포니아를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은 더 많은 이주자와 여행객을 유치해 자신들 철도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캘리포니아의 도시들을 쾌적한 삶을 누릴 수 있고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포장해 외부에 홍보했고, 실제로 이곳들을 동부 도시 못지않은 곳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을 했다. 한 예로 빅 4중 한 명인 리랜드 스탠포드는 1884년 16세의 나이에 죽은 외동아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1891년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스탠포드 대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이 학교를 동부의 명문 대학 수준으로 키우기 위해 많은 지원을 했는데, 그의 유지에 따라 스탠포드는 그의 사후로부터 40년이 지난 1930년대까지 학생들로부터 등록금을 받지 않아 곳곳의 우수한 인재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게재 21.11월)
1869년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센트럴퍼시픽 철도 회사(Central Pacific Railroad)를 설립했던 주요 투자자 4명(Big 4)은 발 빠르게 캘리포니아 내부 철도망도 구축해 갔다. 그들은 1865년 부동산 지주회사 성격의 서던퍼시픽 철도 회사(Southern Pacific Railroad)를 만들어서 캘리포니아에 새 철도를 깔고 연방 정부로부터 주변 땅을 받았다. 맨 처음 작업은 남부와 북부 캘리포니아를 철도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서던퍼시픽은 몇 년에 걸쳐 캘리포니아 중앙의 넓은 평원인 샌호아킨밸리(San Joaquin Valley)를 지나가면서 북에서 남으로 철도를 부설했다. 대륙횡단철도가 놓인 지 7년이 지난 1876년에는 당시 인구 1만 명 정도의 LA시까지 철도가 이어졌다. 서던퍼시픽은 LA 동쪽 주 경계를 넘어서까지 철도 건설을 계속해 1881년에는 뉴멕시코주에서 산타페 철도 회사(Santa Fe Railroad)와 철로를 결합시켰다. 이로서 LA는 두 개의 대륙횡단철도가 지나는 도시가 되어 1880년대의 엄청난 토지 개발 붐을 경험했다.
1880년대 말에 이르자 서던퍼시픽은 북쪽의 오레곤주 포틀랜드로부터 남쪽의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노선을 소유하면서 미국 남서부 일대 물류 흐름을 장악하는 회사가 됐다. 이처럼 거대한 철도망을 통해 당시 빅 4의 재산이 워낙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에 그들이 캘리포니아를 비롯한 남서부 지역의 철도, 토지를 독점하는 것은 두고두고 지역 사회의 문제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서던퍼시픽의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산타페 철도 회사(Santa Fe Railroad)와의 경쟁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다. 산타페는 1830년대부터 뉴멕시코, 캔자스 등 중부 지역에 철도를 건설하며 성장한 회사였다. 텍사스의 카우보이들은 이들 철도가 놓인 다지시티(Dodge City), 위치타(Wichita) 등 도시(Cattle town)까지 대량으로 소를 몰고 왔다. 이 소들을 번성하는 동부의 도시로 운송하면서 큰돈을 번 산타페도 태평양 해안 쪽으로도 진출해 다른 수익원을 발굴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산타페는 결국 1885년에 중부 지방에서 출발해 샌디에고와 LA를 연결하는 철도망을 구축했다.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동쪽 사막지대에 서던퍼시픽이 소유했던 철도망을 산타페가 임대할 수 있게 중재함으로써 양 사가 경쟁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1887년 산타페는 자신들이 직접 부설한 철도로 다시 LA까지 연결망을 구축하면서 대륙횡단 승객과 물류를 놓고 서던퍼시픽과 본격적으로 겨루기 시작했다. 당시 산타페와 서던퍼시픽 간의 운임 경쟁은 워낙 치열해서 동부에서 서부로 오는 편도 여객 운임이 한 때 1달러까지 떨어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그러나 남서부의 물류와 땅을 놓고 양보 없는 싸움을 벌였던 철도 회사들은 19세기 말 몇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심각한 구조조정을 거쳐야 했다. 게다가 자동차가 등장한 이후에는 철도가 경쟁력을 크게 잃으면서 몇 개의 주요 노선으로 병합되어야만 했다. 1906년에는 서던퍼시픽이 경쟁 상대였던 산타페에 인수되었고, 1996년 이 회사는 다시 벌링턴노던산타페 철도 회사(BNSF Railway)로 통합되었다. (게재 21.11월)
19세기 말 성장하던 철도 회사들은 항구의 개발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들의 철도를 바로 항만과 연결해 배로 들어온 물건을 곧바로 기차에 실어 내륙 곳곳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1880년대 서던퍼시픽은 샌프란시스코만 동쪽의 오클랜드항을 새롭게 개발해서 1893년까지 독점권을 행사했다. 서던퍼시픽은 1894년 LA 서쪽 오늘날의 산타모니카 해변에도 길이 4,700ft(1.4km)에 이르는 긴 선착장(Wharf)을 만들어 항구를 개발하려 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당시 크게 성장하고 있던 LA의 공식 항구를 어디에 개발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지역 사회의 열띤 논쟁을 일으켰다. LA의 상공회의소(LA Chamber of Commerce)는 서던퍼시픽과 맞붙어 LA에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샌페드로(San Pedro)만을 항구로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벌였고, 결국 연방 정부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당시 LA의 시민들은 7년 동안 소송이 벌어졌던 양 측의 다툼을 독점 철도 회사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공공 항구를 만든 싸움이었다는 의미에서 자유항구 전쟁(The Great Free-Harbor Fight)이라고 불렀다.
LA 도심에서 남쪽으로 20마일(30km)이나 떨어진 샌페드로만이 당초 항구로 개발된 데는 이 지역의 사업가이자 정치가였던 피니스 배닝(Phineas Banning)의 역할이 컸다. 오늘날 ‘LA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배닝은 21세이던 1851년 샌페드만으로 배를 타고 들어와서 캘리포니아에 이주한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상점의 점원으로 취직했다가 당시 인구 2,000명 남짓이던 LA와 샌페드로만을 오고가는 역마차 운전기사 일자리를 얻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은 후에는 자신의 역마차 회사와 해운 회사를 차렸고 샌페드로 항구와 내륙 여러 도시를 연결하는 역마차 노선을 구축해 수익을 냈다. 사업에 성공한 배닝은 향후 샌페드로만이 남부 캘리포니아의 핵심 항구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운송사업의 이익을 항구개발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돌출된 지형인 탓에 서쪽이 아니라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샌페드로만은 샌디에고나 샌프란시스코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일대에서는 남북 방향의 빠른 물살을 피해 배를 정박하기 가장 용이한 곳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곳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항구로 쓰이기는 했으나 문제는 수심이 얕다는 것과 주요 도심지와의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 남부 캘리포니아에는 주로 먹을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중심으로 주거지가 발달해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던 LA, 애너하임, 샌페르난도밸리 등은 샌페드로 항과 수십 킬로미터씩 떨어져 있었다. 이 거리를 매번 우마차로 짐을 실어 나르기에는 물류의 효율성이 너무 낮았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LA에서 샌페드로까지 철도를 놓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비용 문제와 다른 도시들의 반대 등으로 오랫동안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점점 커져가던 LA는 외부와 물자를 교역할 수 있는 항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배닝의 끈질긴 노력으로 1869년 LA시는 이 항구와 도심을 연결하는 길이 21마일(34km)의 첫 번째 철도를 건설했고, 해로를 10ft(3m) 깊이로 준설해 큰 배가 바로 접안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철도가 연결되자 샌패드로항은 LA 도시 자체의 발전과 함께 크게 성장했다. 철도 건설과 동시에 바로 5만 톤의 화물을 처리하기 시작했고 1885년 배닝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50만 톤까지 처리 용량을 늘렸다. 1894년 LA시가 서던퍼시픽의 영향을 배제하고 이곳을 LA의 공식 항구로 만든 다음부터는 물동량이 더욱 증가했다. 항만을 소유하고 있던 LA시는 1909년 샌페드로만 일대 토지를 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하였다. 이 때 LA에서 이 지역에 이르는 21마일(34km) 철도 주변 좁은 폭의 땅도 LA의 행정구역 안으로 같이 들어왔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 LA 시의 경계는 마치 샌패드로 항구 지역을 긴 줄로 매달아놓은 것과 같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1914년 파나마 운하의 개통은 LA항의 발전을 한층 빠르게 했다. 파나마 운하의 등장은 태평양이 향후 전 세계 물류 수송의 핵심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방 정부는 태평양 물동량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남쪽의 LA, 북쪽의 오클랜드 항을 지정해 방파제와 부두 건설을 지원했다. 이 같은 지원에 힘입어 LA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 무역의 중심 항구가 됐고, 1920년대에는 물동량에 있어서 전통적 강자인 샌프란시스코항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아시아와의 교역이 더욱 크게 증가하고 1960년대에 컨테이너선이 본격적으로 바다를 누비기 시작하면서 항구의 규모는 더 커졌다. 현재 LA항은 1930년대부터 개발된 바로 인접한 롱비치항과 한 권역을 이루어 세계 10위권 내외의 항구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이 일대는 우리나라 부산항(2,000만TEU)에 다소 못 미치는 1,800만TEU가량의 화물을 처리한다. 이는 하루에 20피트(6m) 길이의 컨테이너 5만 개가 운송되는 양으로서, 미국 수입 물량의 약 40%가 이 항구를 통해서 들어와 기차와 트럭에 실려 서부 지역 곳곳으로 이동한다. (게재 21.11월)
20세기 초 비행기의 개발은 오랫동안 사막과 바다로 격리돼 있었던 캘리포니아를 외부와 더욱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최초의 동력 조종 비행에 성공한 이후 1910년대 초반이 되자 미국 각지에서는 상업용 비행 노선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추세에 발맞추어 당시 캘리포니아의 도시들도 하나 둘씩 자체적인 공항을 만들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시는 1927년 시 남쪽 샌프란시스코만 인근의 목장을 임대해서 150에이커(0.61㎢) 크기의 공항을 건설했다. 항공 수요가 점점 늘어나자 시는 1930년 1,112에이커(4.5㎢)의 땅을 추가로 매입해 공항 규모를 확대했다. 1937년부터는 이 공항에서 뉴욕, LA 등까지 장거리를 운항하는 항공로도 열렸다. 이는 1869년부터 근 70여 년 동안 사람들이 철도를 통해 일주일씩 걸려 대륙을 횡단하던 시대를 끝내는 또 다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남부의 LA시도 샌프란시스코에 이어서 공항을 건설했다. LA는 1928년 시 남쪽 해안가에 640에이커(2.6㎢)의 밀밭을 매입해 공항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항공 수요가 계속 증가하면서 LA 공항은 3,500에이커(14.2㎢)에 달하는 넓은 면적으로 확장돼 서부 지역의 중심 공항으로 성장했다. 아시아에서 미주 각지를 연결하는 환승 노선 승객에 힘입어 오늘날 이곳에서는 연간 비행기 70만 대가 뜨고 내리고 8천만 명의 승객이 미국과 세계 각지로 이동하고 있다. 최남단의 샌디에고시도 1928년 도심 가까운 곳에 660에이커(2.7㎢)의 공항을 건설해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주요 관문 공항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다. 이들 주요 도시의 공항 외에 캘리포니아의 크고 작은 공항은 모두 150여 개에 달한다. 미국의 다른 지역들에서처럼 항공은 캘리포니아의 장거리 여객 운송의 핵심적인 수단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고, 사람들 간 교류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고 있다. (게재 21.11월)
물이 부족한 남부캘리포니아에서는 LA 수로 건설을 통해 물을 확보하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자연을 다룬다는 것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기도 했다. 수로가 만들어진 지 15년이 지난 1928년 무려 430여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1924년 수로의 저수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LA 북쪽에 만든 프란시스댐(St. Francis Dam)이 붕괴되어 발생한 이 사고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인재 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공사를 총괄했던 멀홀랜드는 책임을 지고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고 큰 비난을 받았다.
LA의 수로는 캘리포니아 물 전쟁(California Water Wars)이라고 불리는 격렬한 지역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북쪽 산악지대를 흐르는 오웬강의 물을 LA로 직접 끌어오게 되면서 그전까지 풍부한 물을 보유했던 오웬 호수가 말라붙었고, 강 자체의 유량도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오웬강 주변의 주민들은 수로가 생긴 이후 농사와 식수가 부족해지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 격분한 주민들이 1924년 수로를 파괴하려는 시도까지 할 정도로 갈등이 고조됐고, 오랜 법정 분쟁 끝에 1994년 수량의 일정부분을 원래의 강과 호수로 돌리는 중재안이 마련됐다.
수로가 건설된 지 23년이 지난 1936년에는 멀리 콜로라도강에 건설된 후버댐의 물 중 일부가 LA를 비롯한 남부 캘리포니아에도 공급되면서 이 일대에 좀 더 많은 수자원이 확보되었다. 각 지역에서는 물을 아끼기 위해 한번 생활용수로 사용한 물을 거리 조경 관리에 다시 쓰는 방법 등 재활용 기술도 적극적으로 개발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물 문제가 영구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다. 미국 남서부 지역에는 장기간 가뭄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물 자체가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수자원 확보는 여전히 이 지역의 큰 고민거리이다.
캘리포니아의 최남단에 있는 샌디에고는 그나마 수로를 통해 북 캘리포니아의 물을 구할 수 있었던 LA에 비해 수자원을 확보하는 게 더 어려웠다. 북쪽의 물은 이미 LA가 사용하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애리조나의 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도시 성장에 적당한 수원을 찾는 것이 더 곤란했던 것이다. 1885년 대륙횡단철도가 샌디에고까지 연결되면서 개발 붐이 일고 인구가 늘어나자 도시의 물 부족 문제는 더 강하게 대두됐다. 이때를 즈음으로 샌디에고는 주변에 대규모 댐들을 많이 만들어서 한 방울의 비라도 더 가두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샌디에고 일대 부동산을 개발하던 회사는 1888년에 샌디에고 도심 남동쪽 산의 스윗워터강(Sweetwater river)에 댐을 만들었다. 캘리포니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샌디에고에도 겨울철에만 비가 오기 때문에 스윗워터강은 겨울에 흐르다가 여름이 되면 마르는 강이었다. 이곳에 건설된 높이 90ft(27m)의 댐은 바다로 그냥 흘러가버리는 겨울철 빗물을 막아 면적 700에이커(2.8㎢), 부피 2만 에이커-풋(2,500만 톤)의 호수를 만들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한 사람의 1년 상수도 사용량이 110톤(하루 300리터가량)이니, 대략 20만 명 정도가 일 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물을 확보한 것이었다. 당시 인구 1만 6천 명가량의 샌디에고 입장에서 이 댐의 물은 매우 반가운 것이었다. 부동산 개발회사들은 1897년 멕시코와의 국경 인근에 로워오테이(Lower Otay)댐을 추가로 건설해 자신들이 보유한 땅의 가치를 계속 높여 갔다.
그러나 몇몇 댐이 가둔 물에 의존하기에는 이 지역의 강수량이 너무 불안정했다. 1898년부터 3년 동안에는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면서 모아 놓은 호수의 물을 다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강바닥에 우물을 파서 얼마 나오지 않는 지하수까지 소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가뭄을 계기로 비상 상황을 대비해 시가 더 많은 물을 저장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1900년 샌디에고시는 그때까지 민간이 관리하고 있었던 물 공급 회사들을 인수하고 추가 수자원을 확보하는 일에 착수했다. 1901년에는 시 소유의 저수지(Chollas reservoir)를 만들었고 1906년에는 남쪽 로워오테이댐의 물을 시내까지 끌어오는 나무로 만든 파이프라인도 설치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911년부터 5년 동안 다시 발생한 가뭄은 재차 시 전체의 물 공급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급한 상황에 놓였던 시는 1916년 1월, 비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술자(Rainmaker)인 찰스 햇필드(Charles Hatfield)에게 1만 달러(현재 가치 24만 달러 정도)를 약속하고 인공 강우를 의뢰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놀랍게도 햇필드가 작업을 한 며칠 후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비의 양이 너무 많아서 남쪽 오테이 계곡(Otay valley)에서는 댐에 물이 넘쳐 주민 14명이 사망하는 불행한 사고가 일어났다. 햇필드는 이후 오랫동안 사고의 책임과 자신이 받아야 할 보수를 놓고 시와 법적 분쟁을 벌였다. 결국 1938년 법원은 이때의 비는 자연적인 현상이었고 햇필드는 피해 보상의 의무도 없지만 보수도 받을 수 없다고 판결했다.
오랜 가뭄이 끝나면서 일단 한숨을 돌렸지만 향후 또 있을지 모르는 가뭄에 대비해 장기적인 물 관리 대책을 세우는 것은 더욱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 시는 추가로 저수지를 만들고 1916년 홍수 때 손상이 간 로워오테이댐을 보수하는 한편 대규모 신규 댐 건설에 대한 검토에 다시 착수했다. 1920년에 7만 명을 돌파한 샌디에고의 인구는 경제호황기 속에서 매년 10%씩 크게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물을 확보하는 것은 더 늦출 수 없는 일이었다.
시는 토목 기술자 히람 새비지(Hiram N. Savage)를 고용해 동쪽 멀리 떨어진 산악 지대에 4,200만 톤의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바렛댐(Barrett dam)을 추가로 건설했다. 하지만 새비지는 이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고 앞으로 지역에 물이 더 모자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었는데 문제는 그 댐을 어디에 건설하느냐였다. 댐을 만들기에 적합한 장소를 둘러싼 논쟁은 이후 수십 년 간 샌디에고 지역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큰 댐을 짓기 위해서는 시민의 세금으로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했기 때문에 어디를 선택해야 경제성이 우수한지, 더 많은 물을 안정적으로 모을 수 있는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댐을 만들 강은 유량이 많은 탓에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샌디에고강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어려운 것은 댐의 위치를 정하는 일이었다. 새비지는 골이 깊어 많은 물을 가둘 수 있고, 기반암이 단단해 기초 설치비용이 적게 드는 하류 쪽 골짜기(Mission Valley)에 댐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기술자들과 반대하는 주민들은 상류 산악지역에 댐을 건설해야 한다고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이 문제는 주민 투표에 붙여졌다. 주민들은 1924년 투표에서 하류 지역에 댐을 건설하기 위해 채권을 발행(360만 달러)하는 새비지의 안을 부결했고, 더 큰 비용(450만 달러)을 들여 상류에 댐을 건설하는 것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 난 것이 아니었다. 시가 샌디에고강 수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 수 있는 권한이 있는가를 놓고 법적 소송이 6년여 간 길게 이어졌다. 시의 인구가 15만 명에 이른 1930년 법원이 시의 개발 권한을 인정하자 댐 건설 지점에 대한 문제는 다시 한 번 주민투표에 붙여졌고, 적은 표차로 상류 지점에 댐을 건설하는 것이 다시 결정되었다. 이런 길고 긴 우여곡절 끝에 1935년 1억 4천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엘캐피탄(El Capitan)댐이 완공되었다. 이 댐은 오늘날까지 샌디에고의 귀한 수자원이 되고 있지만, 당시 계곡에서 살고 있던 수백 명의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46년에는 샌디에고시도 콜로라도강의 물을 막은 후버댐의 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현재 샌디에고 메트로폴리탄은 물 사용량의 절반 이상을 후버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에 지역의 인구가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더 안정적인 물 공급이 필요해지자 시는 또 추가로 댐을 건설해야만 했다. 1954년에는 1927년 건설을 시작했다가 공사의 어려움으로 방치돼 있었던 북동쪽에 멀리 떨어진 서덜랜드댐(Sutherland dam)을 완공해 4,000만 톤의 물을 추가로 확보했다. 이런 노력 등으로 현재 샌디에고 카운티에는 50여 개의 댐이 만들어져 물을 가두고 있지만 물 문제는 이 지역의 여전한 고민거리이다. 이용할 수 있는 물은 정해져 있고 언제 부족해질지 모르기 때문에 시는 물 사용량을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이면서 타 지역에서 이미 확보한 물을 구매해 도시로 들여오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다. (게재 21.11월)
골드러시로 단기간에 인구가 늘어나고 철도의 건설로 물자의 운송이 쉬워지자 맨 처음 눈에 띄게 발전한 캘리포니아의 산업은 농업이었다. 사실 골드러시 자체는 10년 만에 짧게 끝난 일시적 현상이었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농업 발전은 이후 캘리포니아의 지속적인 성장을 이끈 핵심 요소가 되었다. 캘리포니아의 농업은 오늘날까지 지역의 중요한 산업으로서 소득 증대와 일자리 창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농업 생산량은 처음에는 금광에 가까운 지역에서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1850년 6천 배럴(540톤가량)에 불과했던 캘리포니아의 밀 수확량은 금광 주변 농장의 개발에 따라 10년 후인 1860년에는 300배가 넘는 2백만 배럴(18만 톤가량)까지 올라갔고, 남는 양을 국내외에 판매할 정도로 성장했다. 금광 옆으로는 동부에서 가져오기 어려워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과일, 채소 같은 신선 식품 재배 농장도 번성했다. 오늘날 실리콘밸리가 자리한 샌프란시스코만 남쪽 산타클라라라밸리는 체리, 자두, 살구, 아몬드, 호두 등 과일을 재배하는 과수원들의 집적지로 유명했다. 남북 길이 30마일(50km), 동서 너비 15마일(20km)의 서울의 1.6배 정도 면적에 해당하는 분지 지형인 이곳은 원래 강수량이 부족해 온화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짓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금광을 비롯해 대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유발된 폭발적인 수요는 농업 기술의 개발을 촉진했다. 결국 피압정(Artesian well)을 파서 깊은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방법을 도입하면서 이곳은 19세기 말 과수 농업의 최적지가 되었고, 일대에는 1,000개 이상의 우물이 개발되어 농사에 쓰일 물을 공급했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건설된 이후에는 캘리포니아 내 남북 간선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중부 샌호아킨밸리(San Joaquin Valley)의 넓은 평원을 중심으로 농업이 발전했다.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한 철도 자본들은 해안가보다는 그때까지 아직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아 주변 토지를 더 많이 공여 받을 수 있는 내륙 지역에 철도를 놓았다. 노선이 몇 년에 걸쳐 천천히 남진함에 따라 모데스토(Modesto), 머스드(Merced), 프레즈노(Fresno), 베이커즈필드(Bakersfield) 등 도시들이 하루아침에 생겨났고, 그 주변으로 대규모의 밀, 오렌지, 포도, 토마토, 아몬드 농장이 들어섰다.
남진을 계속한 대륙횡단철도가 1876년 LA까지 이어지자(Transcontinental southern pacific line) LA 인근은 오렌지 농업의 중심이 되었다. 날씨가 따뜻한 이 지역에서는 워낙 스페인 수도원 시절부터 오렌지, 레몬 농사가 활발했는데, 미 연방 가입 후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해 이미 그 재배량이 크게 늘어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철도까지 연결되고 1878년에는 냉장 철도차까지 개발되자 이곳의 오렌지는 캘리포니아뿐 아니라 미국 전역으로 팔려나가는 인기 상품이 되었다. 캘리포니아를 오고가던 대륙횡단 기차의 외벽과 동부 도시의 소비자에게 배포되었던 광고 팜플렛 위에 그려진 환한 햇살 속 넓은 오렌지밭의 모습은 동쪽 사람들에게 먼 서쪽 캘리포니아 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폭설로 뉴욕의 증권거래소를 멈춰버리게 했던 1888년의 무시무시한 한파까지 발생하자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캘리포니아를 향한 동경은 동부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번져 갔다.
이 시기 LA 남쪽 리버사이드의 농부들은 겨울에도 수확할 수 있는 오렌지 품종을 브라질에서 들여와 널리 재배하는 데에까지 성공했다. 이 덕분에 캘리포니아 오렌지는 사시사철 출하되어 막 소득 수준이 높아지기 시작한 미국 소비자들의 식탁 위에 매일 오르게 되었다. 이 지역의 농부들은 1893년 협동조합을 조직했고, 1907년에는 태양이 키스한다(Sun kissed)는 의미의 오렌지 브랜드(Sunkist)를 만들어 세계적인 상표로 키워내기도 했다.
19세기 말에는 포도 와인 산업도 본격적으로 성장해 캘리포니아 농업의 부가가치를 크게 높였다. 오늘날 디즈니랜드가 자리 잡고 있는 남부 캘리포니아의 애너하임에서는 1857년부터 정착한 독일계 이민자들이 포도 재배를 시작해 1860년대에 캘리포니아 최대의 와인 생산지를 조성했다. 번성하던 애너하임의 포도 농업은 1880년대 포도나무 전염병이 발생하면서 쇠퇴하고 오렌지 농사로 대체됐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1850년대부터 포도를 생산하기 시작한 북부 캘리포니아의 나파, 소노마 카운티 일대가 1890년대부터 그 자리를 이어받아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로 명성을 높여가고 있다.
20세기 초에는 외진 곳까지 관개시설이 확충되고 기계화가 진행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더욱 증가했다. 샌디에고 동쪽 사막 임페리얼밸리(Imperial Valley)에서는 1901년 멀리 콜로라도강의 물을 끌어오면서 드넓은 농지가 만들어졌고, LA 분지와 중부 샌호아킨밸리(San Joaquin Valley)에도 실핏줄 같은 수로가 속속 건설되면서 경지 면적이 더 늘어났다. 농업의 부가가치가 커지자 주변 도시에서는 농산물의 포장, 운송, 가공을 위한 연계 산업들도 더불어 발달했다.
한편 농업이 발전하면서 오랫동안 캘리포니아를 지배했던 목축업은 서서히 쇠퇴했다. 사실 목축업은 스페인과 멕시코 지배 시절에는 캘리포니아의 유일한 먹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중요 산업이었다. 그 시절 목축업자들은 울타리도 없는 방대한 면적의 랜치(Ranch)에 소들을 풀어 놓은 다음 필요할 때 한 곳으로 몰아 잡는 방식으로 소를 키웠다. 워낙 대규모로 목축을 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는 부유한 목장주들이 많았다. 그 중 한명인 베르나르도 요르바(Bernardo Yorba)는 오늘날의 LA 남부에 4만 에이커(160㎢)가량의 넓은 목장을 갖고 있었다. 그의 목장은 멕시코 지배 시절 말기 그 지역의 사교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방의 숫자만 50개에 일하는 사람만 130명에 이르는 그의 대저택은 주변 목장주들이 승마, 도박, 패션을 함께 즐기는 장소로 유명했다. 동부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아벨 스턴스(Abel Stearns)도 LA 근교에 18만 에이커(720㎢)에 이르는 넓은 목장을 가진 주요한 목장주 중 한명이었다.
캘리포니아가 미국 연방에 가입함과 동시에 터진 골드러시는 이들 목축업자들의 사업에도 엄청난 기회가 되었다. 원래 벌판의 소들은 가죽과 수지를 거둬들일 목적으로만 키워졌지만 지역 내에서 고기를 소비할 시장이 크게 열리면서 소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골드러시 전에 10달러 정도 하던 소 한 마리 가격은 순식간에 75달러(현재 가치 2,500달러)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캘리포니아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결과적으로 이들 목장주들에게는 끔찍한 재앙이 되었다. 새로 온 정착자들은 곧 고기뿐만 아니라 목장주들이 가진 넓은 땅을 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멕시코 지배 시절에 분할된 경계가 불분명한 땅에 대해 소유권 소송을 제기했다. 목장주들은 오랜 시간 동안 동시에 여러 명의 사람들과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고, 그 과정에서의 소송비용과 패소로 점차 재산을 잃어갔다. 1860년대부터는 골드러시의 붐이 서서히 식으면서 소 값이 폭락했고, 설상가상으로 1862~1864년 심각한 가뭄까지 닥치자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대목장주인 아벨 스턴스 혼자 가뭄 기간 동안 5만 마리의 소를 잃었을 정도였다. 자금 압박에 직면한 목장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대규모로 잘라서 매각하기 시작했고, 이는 이 일대에 신규 도시와 마을의 건설을 더욱 촉진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게재 21.11월)
19세기 캘리포니아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보다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이었다. 사실 잡스 같은 경우에도 부모님 세대로 가면 출신 지역이 저마다 다양했다. 이처럼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각양각색의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공동의 뜻을 결정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초기 캘리포니아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주민들은 각각의 주체가 수평적인 위치에서 서로 합의해 미래를 설계하는 거버넌스(Governance) 시스템을 지역의 특성에 맞게 새로 만들어 가야 했다.
1830년대부터 긴 트레일을 따라 오레곤이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길을 걷는 5~6개월 동안 지켜야할 규칙들을 자기들 스스로 정해야 했다. 이들은 대부분 각자 살고 있던 곳을 떠나 우선 중부 지방에 우선 모인 다음, 떠나기 알맞은 시기인 5월까지 머물며 이동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고 서로가 가진 정보를 교환했다. 가장 먼저 앞으로 초원과 황야에서 보내야할 긴 여정 동안 일행을 이끌 지도자를 선출해야 했다. 각자가 떠나온 지역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방에서 모인 사람들이 함께 동의할 수 있는 규칙을 정하고 이를 어겼을 경우의 처벌 방법을 합의하는 것도 필요했다. 강을 만났을 때 건널 방법과 순서에 대해서도 결정해야 했고, 길잡이 사례금 등 공동으로 지출할 비용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했다. 불침번 차출이나 혹시 있을 전투 시 역할 분담 등 대열 전체를 위한 개인의 의무에 대해서도 미리 합의해 놓아야 했다. 장기간의 여행이고 길이 워낙 험하다보니 이 외에도 결정할 것들이 매우 많았고, 하나하나의 선택들은 자신들의 안전과 생존 그 자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목적지인 오레곤이나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이후에도 같이 길을 건넌 무리들을 중심으로 마을을 이루어 살며 자신들의 일들을 스스로 결정해 나가야 하는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캘리포니아에 온 미국인 이주자들은 당시 멕시코 정부가 관할하는 행정 중심 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폭력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일, 다른 지역과 통하는 길을 만드는 일, 물이나 식량을 확보하는 일 등을 모두 외부에 의존하지 못한 채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 해 나가야 했다.
1848년 2월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할양받던 시기에 즈음해 골드러시가 시작되고 이주민이 빠르게 증가하자 연방 의회는 캘리포니아를 신속히 주로 승격시키기로 결정했다.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주 신설 전에 주의 뼈대를 세우는 새 헌법을 제정해야 했다. 1849년 8월 헌법안 마련을 위한 대의원 선거가 있었고, 당선된 48명은 9월 1일부터 당시의 행정 중심지였던 몬터레이에서 43일간 헌법 제정 회의(Convention)를 열었다. 대의원 48명의 대부분은 각양 각지에서 캘리포니아에 온 이주자들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6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오레곤령 출신 1명을 제외하면 모두 미시시피강 동쪽에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이중 19명은 이제 막 정착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던 기간이 채 3년도 안 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대의원들의 직업군도 다양했다. 법률가는 14명이었고, 목장주 12명, 상인 9명, 군인 4명, 언론인 2명, 은행원 1명, 의사 1명 등이 대의원을 구성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 중 32명은 나이가 아직 40이 되지 않은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캘리포니아와 마찬가지로 서부 프런티어였고 2년 전인 1846년 연방에 가입한 아이오와주의 헌법을 주로 참고했다. 또한 뉴욕주 등 동부에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타주의 헌법 조항을 살펴가며 헌법의 기초안을 마련했다. 이들이 마련한 안은 총 12장(Article)으로 이루어진 19페이지의 문서였다. 이 헌법을 비준하는 투표권은 혼혈 캘리포니아인을 포함한 백인 남성에게만 있었다.
캘리포니아의 주 승격에서 중요한 쟁점은 노예제도의 허용 여부였다. 당시는 남부와 북부 주들이 노예제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신생 주의 성격은 연방 차원의 정치 균형을 흔들 수 있는 중요한 사항이었다. 캘리포니아 헌법의 대의원들은 만장일치로 자유주(Free State)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는 흑인 노예가 거의 없었고, 노예제 때문에 주를 남북으로 가르는 것은 별 실익이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지만 이제 막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만든 주에서 주인이니 노예니 하는 구분 자체가 큰 의미가 없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의 이 결정은 연방 의회에서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캘리포니아를 자유주로 하는 대신 남부를 탈출한 노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는 1850년 대타협(Compromise of 1850)이 이루어질 때까지 당시 정국의 큰 불안요소가 됐다.
주 헌법 제정안은 1849년 11월 13일 주민 투표에 상정되어 12,061표의 찬성과 811표의 반대로 가결되었다. 헌법에 근거해 새로 구성된 캘리포니아 의회는 1849년 12월 15일 산호세에서 처음 회의를 열고 미 연방 가입 신청서를 정식으로 제출했다. 다음해 9월 9일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31번째 주가 되었다.
1849년 헌법은 주민의 권리, 투표권, 권력분립,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구성, 주 민병대 설치, 채무, 교육, 헌법 개정 절차, 물 관리 문제 등을 다루었다. 당시 캘리포니아의 헌법이 가장 전면에 내세운 것은 개인의 자유와 독립이었다. 헌법의 전문은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보호하고 재산을 소유하고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불가침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All men are by nature free and independent, and have certain inalienable rights, among which are those of enjoying and defending life and liberty, acquiring, possessing, and protecting property: and pursuing and obtaining safety and happiness : 1849 캘리포니아 헌법 Article 1, Section 1)
이러한 가치들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에 익숙한 이주민들이 모여서 만든 신생 주의 핵심 우선순위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들은 조화, 단결, 충성, 정의, 의무, 평화, 사랑 등의 다른 가치보다 ‘자유’와 ‘독립’을 우선시했다. 미국 연방이나 동부 주들의 헌법에서 부각하는 안정(Tranquility), 복지(Welfare), 평등(Equality), 도덕(Morality), 경건함(Piety)도 새로운 이주민들에게는 자유와 독립보다 앞서는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주 구성의 큰 틀을 짠 캘리포니아 헌법은 1879년까지 30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 기간 중에는 3번 정도의 경미한 개정(Amendment)만 있었을 뿐이었다. 헌법을 전면 개정(Revision)하기 위해서는 주 상하원 의회의 2/3가 찬성하고 투표를 통해 유권자의 과반수가 동의해서 헌법 개정 회의(Convention)를 구성해야 했는데 이는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1869년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되고 캘리포니아로 더 많은 이주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변화된 환경에 맞는 헌법 개정 요구가 거세졌다. 결국 1878년 3월 구성된 헌법 개정 회의가 1년여 간 새로운 헌법안을 마련했고, 1879년 5월 7일 주민투표로 개정안이 승인되었다. 전면 개정된 1879년 헌법에서 가장 특징적인 변화 중 하나는 홈룰(Home Rule) 개념을 도입한 것이었다. 홈룰은 각 시(City)가 광범위한 자치권을 가질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을 주 헌법 자체에 규정하는 것이었다. 홈룰 하에서 각 시들은 자신들의 헌법에 해당하는 차터(Charter)를 제정해 지역의 세금, 예산, 정부 구성, 대규모 재정 지출을 위한 채권 발행 등 핵심적인 사항들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홈룰의 제정은 주민이 가진 권력이 어떤 기구를 통해서 실현되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이와 관련한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었다. 주민의 권력은 주 의회(Legislature)에 위임되었고, 주 의회는 시를 만들고 없애거나 구성 방식을 결정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Dillon’s rule)는 주의 역할을 중요시 하는 것이었다. 반면 지방정부인 시를 만드는 것은 주민들의 고유의 권한이고 주 의회는 이를 침해할 수 없다고 본 견해(Cooley Doctrine)도 있었는데, 이것은 지방정부의 자유로운 역할과 독립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1879년 헌법에서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지방정부의 독자적 권한을 한층 강화하는 쪽으로 의사를 결정했다. 그해 헌법 개정에서는 홈룰 이외에도 21세 이상의 모든 남성에 대한 투표권 확대, 캘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운영을 위한 공익재단 설치, 교육 자율성 확대, 신생 시의 설립을 위한 행정 절차 완화, 신규 정착자에 대한 토지 분배 등의 중요한 사항들이 새롭게 규정되었다.
캘리포니아 헌법은 30여 년이 지난 1911년 또 다시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이번에는 유권자가 발의(Initiative)해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방안이 신설되었다. 기존에는 의회 양원의 2/3가 찬성해야만 헌법 개정 회의의 구성을 주민 투표에 상정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유권자 8%가 서명하면 투표에 붙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런 근거가 생겨나자 이후 주민 발의에 의한 헌법 개정이 매우 활발해졌다. 그 결과 1911년부터 지금까지 캘리포니아 헌법은 무려 500차례가 넘게 개정되었다. 이는 연방 정부 헌법이 전체 27번 개정되었고, 다른 주들의 헌법이 평균 120번 정도 바뀐 것에 비하면 꽤 많은 횟수였다. 개정이 활발해지면서 캘리포니아 헌법도 계속 길어져서 1879년 전체 16,000 단어였던 것이 1960년 이후 약 75,000 단어까지 분량이 늘어났다. 연방에 비해 구체적인 정책을 다룬다는 주 정부 업무 특성을 감안한다 하여도 7,000 단어 정도인 연방 정부 헌법에 비해 굉장히 많은 내용이 담기게 된 것이다. 헌법의 개정을 어느 정도까지 쉽게 해야 하는가, 어느 만큼이 헌법으로서 적당한 분량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지역 내에서 논란이 많지만, 주민 발의 절차를 통해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이루어낸 성과는 적지 않았다. 주민들은 선거권 확대, 지방정부의 과도한 세금 인상 제한, 대기업 감시, 교육 자치 등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헌법 개정을 관철시켰다. (게재 21.11월)
2차 대전 후 미국으로 이주한 많은 사람들 속에는 우리 한인들도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 전체에는 100만 명 정도의 우리나라 출신 이민자가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후 미국으로 이주해 시민권과 영주권을 받은 사람들을 모두 합한 숫자이다. 한인 인구는 미국 내 전체 외국인 이민자 4,500만 명의 2% 정도이고, 미국 전체 인구 3억 3,000만 명의 0.3% 정도를 차지한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에 외국인 이민자로 분류되지 않는 한인 2세까지 합치면 전체 한국계의 인구는 200만 명가량이다. 수만 명의 유학생과 사업, 관광, 연구를 위해 일시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합치면 미국에는 약 250만 명 정도의 한인들이 살고 있다.
저마다의 다양한 이유로 미국으로 이주해 터전을 닦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 한인들도 물론 여느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이주를 선택해 어렵게 낯선 환경을 개척해 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들어서였다. 1903년 인천항을 출발한 7천 명의 사람들이 하와이의 농장으로 이주한 것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가혹한 노동환경을 견디면서도 단단한 기반을 일구어 고국의 대학 설립을 지원하는 등 우리나라의 발전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일제로부터의 독립 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LA인근 리버사이드시의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면서 독립 운동가들을 결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해서는 미국으로 입양되어 가는 아이들도 많았다. 1950년대 이후에는 미국과의 경제적, 군사적 협력 관계 속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이들 중 일부는 미국에 정착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1970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미국에는 공식적으로 39,000여 명의 한국인 이주자가 있었다.
미국으로 이주하는 우리나라 사람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1970년대부터였다. 1965년의 미국 이민법 개정(Hart-Cellar Act)이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이 법은 1920년대부터 유지돼 오던 미국 이민에 대한 민족별 제한을 해제한 것이었다. 1924년의 존슨-리드 법(Johnson–Reed Act)에서는 1890년의 인구 비율을 기준으로 이민자의 민족별 할당량을 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 이민자가 적었던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원천적으로 이민 문호가 막혀 있었었다. 그러나 1965년 이민법에서는 민족 할당제를 폐지했고 가족 초청 영주권과 취업 영주권 발급을 늘렸다. 이에 따라 과거 구성 비율이 낮았던 국가 출신의 이민이 증가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미국으로의 이민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30여 년 간 매년 평균 3만 명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2010년 기준 총 이민자의 숫자는 110만 명까지 증가했다.
초기 한인 이민자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지만 그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고생이 뒤따랐다. 미국에서 아무 기반도 없었던 그들은 맨 손으로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노력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던 일 중의 하나는 자영업이었다. 많은 한국인 이민자들은 남들이 꺼려하는 낙후된 곳에서 잡화점이나 세탁소 등 작은 가게를 열어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차근차근 기반을 쌓아갔다. 자영업을 시작한 사람들은 특유의 친절함과 손재주로 주변 상권을 장악해 나갔다. 직장에 속한 사람들도 우리 민족 특유의 장점인 영리함과 성실함으로 인정을 받으며 조직 내부에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오늘날 한인 이주자들의 중간 가계 소득은 미국 출생자나 다른 나라 이주자들의 평균보다도 훨씬 높고, 많은 한인들이 미국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의 여러 지역들 중에서도 특히 캘리포니아는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장 가깝고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하다는 특성 때문에 많은 교민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현재 우리나라의 미국 이민자 중 셋 중 하나는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LA를 비롯한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으로 범위를 좁혀서 보면 시민권자·영주권자·일반 체류자를 모두 포함해 거의 60만 명에 이르는 한국계 교포들이 살고 있다.
LA 중심부에 있는 코리아타운은 미국 내 한인 상권의 중심이 되는 곳 중 하나이다. 코리아타운은 일정 지점이나 거리(Street)라기보다는 2.7제곱마일(7㎢, 여의도의 2.4배)의 면적에 12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넓은 구역을 이르는 말이다. 이곳은 전체 주민 중 외국에서 태어난 자의 비율이 68%에 이르는 이민자의 공간이기도 하다. 지역 주민 12만 명 중 29% 정도(3.5만 명)는 우리 한국계이고,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계도 54%를 차지해 우리나라 교민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곳의 한국식 음식점, 카페, 사우나, 노래방, 슈퍼마켓은 현지인에게도 잘 알려져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코리아타운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과 같은 사회 혼란 속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당시 폭동으로 타운 내 2,000개의 상점이 약탈을 당했고, 4억 달러(현재 가치 7억 달러)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 같은 큰 상처 속에서도 한인들은 강인한 의지로 빠르게 삶의 기반을 복원하고 다시 일어서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는 한류 열풍과 첨단 기술의 이미지 등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우리 문화의 위상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이뤄 놓은 성과와 축적된 인적자본을 바탕으로 앞으로 더욱 참신한 시도들을 많이 하게 된다면 다른 나라에서 유사함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우리의 문화는 세계 속에서 더욱 굳건한 위치를 차지해갈 것이다. (게재 21.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