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 IT 산업과 할리우드의 영화산업을 창조한 힘은 무수한 혁신가들이 쏟아낸 아이디어와 그들이 마음껏 활개 칠 수 있었던 캘리포니아의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수많은 혁신가들 중에서 특히 두드러진 두 사람은 IT 산업의 스티브 잡스, 영화 산업의 월트 디즈니였다. 이들이 만든 작은 회사들은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해 많은 캘리포니아인들에게 부와 일자리를 제공해 주고 있으며, 세계인들의 일상생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상을 바꾼 신산업을 창조한 주역이었던 이 두 사람은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자신만의 상상력을 펼쳤던 사람들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22세 되던 1977년 동료인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과 함께 개인의 책상에 놓고 쓸 수 있는 단순한 모양의 컴퓨터(애플2)를 만들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컴퓨터 박람회(West Coast Computer Faire)에 들고 나왔다. 이 제품은 한해 전인 1976년 그들이 내놨던 컴퓨터(애플1)와 달리 키보드와 본체가 합쳐져 깔끔하고 단순한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가 있고, 전용 모니터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도 연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애플2는 당시 괴짜(Nerd)들이 모여 조립하고 놀던 퍼스널 컴퓨터(PC)라는 어려운 기계를 대중이 사용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어낸 기념비적 제품이었다. 1,300달러 정도(현재 가치 5,700달러 정도) 했던 이 컴퓨터는 결코 싸지 않았지만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직감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총 5백만 대나 팔려나갔다. 20대의 청년들이 창업한 작은 회사는 단숨에 실리콘밸리의 화려한 스타로 부상했다.
스티브 잡스는 캘리포니아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195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잡스는 1956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가 만들어진 때부터 이 지역에 거세게 불어 닥친 전자산업의 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성장했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양부모인 폴(Paul)과 클라라(Clara)의 가정으로 입양되었다. 원래 위스콘신주에 살았던 그의 생모 조안 시에블(Joanne Schieble)은 시리아 출신 무슬림인 연인(Abdulfattah Jandali)과의 사이에서 잡스를 얻었다.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잡스를 낳을 당시 23세의 젊은 나이였던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까지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는 상황에서 아이를 홀로 키우기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어렵게 입양을 결심했다. 그녀는 나중에 아이를 꼭 대학에 보낸다는 것을 약속받고 부유한 환경이 아니어서 다소 만족하지 못했던 잡스 가정으로의 입양에 동의했다.
생모의 걱정과는 다르게 잡스의 양부모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키워준 사람들이었다.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폴은 기계를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차고에 작업대를 설치해 준 후 같이 물건을 만들고 고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두 살 때부터 살아온 마운틴뷰(Mountain View)시의 학교에 입학한 소년 잡스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자 폴은 오히려 학교가 똑똑한 아들에게 충분한 도전거리를 주지 못한다며 비판했다. 그는 잡스가 12살 되던 1967년에는 인근 로스알토(Los Alto)시의 다른 학교로 잡스를 전학시켰다. 잡스는 이곳에서 당시 실리콘밸리의 핫이슈였던 컴퓨터를 좋아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났다. 한 친구의 소개로 5살 나이가 많았던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맘에 맞는 친구를 몇몇 사귀기는 했지만 그 시절 잡스는 어느 한 또래 집단과의 활동에 특히 열중하지는 않았다. 컴퓨터를 좋아하는 친구들 외에 문학, 음악, 미술을 즐기는 아이들과도 어울렸으나 어떤 그룹들과도 아주 친밀한 것은 아닌, 굳이 말하자면 아웃사이더 같은 성격을 가진 청소년이었다.
전자산업이 태동하고, 반전운동이 확산되고, 히피문화가 유행했던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역동적인 분위기는 어린 잡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1968년 여름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잡스는 안면도 없었던 빌 휴렛(Bill Hewlett)에게 전화를 걸어 휴렛패커드사의 주파수 측정기 조립라인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훗날 잡스는 이 짧은 경험을 ‘천국 같았다’(I was in heaven)고 묘사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양분이 가득한 실리콘밸리는 어린 잡스에게 있어 성장의 더 없이 좋은 토양이었다.
1970년대 당시 잡스도 워즈니악 등 친구들과 함께 홈브루컴퓨터클럽(Homebrew Computer club)에 가입해 활동했다. 잡스가 1974년 7개월간 인도를 여행하고 돌아와 게임기 제조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1976년, 워즈니악은 자신이 만든 새로운 컴퓨터를 홈브루컴퓨터클럽에 들고 나왔다. 워즈니악의 컴퓨터는 변변한 케이스도 없이 모든 회로를 하나의 기판에 꽂은 상태에서 키보드만 연결해 놓은 볼품없는 것이었다. 이 기계는 전용 모니터도 없었고 텔레비전에 선을 꽂아서 화면을 보는 어설픈 것이지만 기존의 알태어 컴퓨터에는 없는 여러 장점들이 있었다. 우선 알태어처럼 온오프 스위치들을 올리고 내려 컴퓨터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키보드에 글자를 쳐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입력하는 내용과 결과를 바로 바로 텔레비전 화면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램프의 불빛이 깜빡이는 것을 기다리며 지켜봐야 했던 것에 비하면 큰 발전이었다. 1971년에는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개발됐고, 1974년에는 이를 이용한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 알태어도 출시된 상황이었지만, 하나의 기판에 소수의 칩만을 부착해서 키보드와 모니터로 소통하는 단순한 형태의 컴퓨터를 만든 것은 괴짜 워즈니악이 거의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낸 엄청난 혁신이었다. 또한 이 조악한 물건이 언젠가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어렴풋하게 느낀 스물한 살 젊은 스티브 잡스의 직관도 놀라운 것이었다.
1970년대 말의 기준에서 이것이 얼마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생각인지는 당시 컴퓨터라는 물건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떠올리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 때의 컴퓨터는 오늘날의 슈퍼컴퓨터 같은 것으로서 큰 회사에서 단지 몇 사람만 쓰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었다. 컴퓨터라는 걸 실제로 본 사람도 몇 명 없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사람은 더 적었다. 만에 하나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컴퓨터가 집 책상에 놓여 있다고 해도 별달리 쓸 데도 없었다.
잡스는 이런 물건을 사람들에게 팔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워즈니악에게 회사를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1976년 두 사람은 잡스의 부모님 집 차고에서 애플(Apple)이라는 이름의 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말이 회사였지 잡스는 주로 부엌에 있는 전화로 전자제품 가게와 대화하는 것이 일이었고, 워즈니악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들려 자신이 작업한 개선된 코드를 가지고 오는 게 업무였다. 놀랍게도 이들 사업의 첫 시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애플1이라 이름붙인 이 제품은 꽤 비싼 가격(당시 666.66달러, 현재 가치 3,100달러 정도)에도 불구하고 애호가들 사이에서 높은 호응을 얻었고, 인텔의 마케팅 매니저로 은퇴한 업계 경험자(Mike Markkula)의 자본 투자도 받았다. 잡스의 끈질긴 설득으로 동네에 있던 전자장비 가게(Byte Shop)는 그 해 200대의 애플1 컴퓨터를 구입해 손님들에게 팔았다.
이들이 1977년 내 놓은 두 번째 컴퓨터(애플2)는 훨씬 진일보한 것이었다. 작으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케이스는 본체와 키보드를 일체화해 복잡한 조립을 필요 없게 만들었다. 전용 모니터도 따로 있었고, 마그네틱 카세트 테이프나 플로피 디스크를 이용해 데이터도 저장할 수 있었다. 그 해 1월 대중에게 제품 형태로 판매되기 시작한 캐나다 기업의 다른 퍼스널 컴퓨터(Commodore PET)처럼 그 전까지 어려운 조립 기계처럼 보이던 컴퓨터를 완결된 형태의 패키지 제품으로 바꾼 것이었다. 애플2가 인기를 끌면서 퍼스널 컴퓨터는 애호가들만이 즐기는 취미에서 누구나 구입해 사용할 수 있는 전자제품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경쟁 상대였던 다른 컴퓨터에 비해 애플2가 가진 또 하나의 강력한 무기는 1979년부터 제공된 계산 워크시트(VisiCalc)였다. 오늘날의 엑셀과 비슷한 이 프로그램은 화면에 나타난 표에 숫자를 쳐 넣으면 장시간의 반복적인 계산을 순식간에 실수 없이 해내는 놀라운 마법을 눈앞에서 보여주었다. 컴퓨터는 마침내 계산을 전문가의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해 낼 수 있는 단순한 일로 만들어 버렸고,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일하고 판단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잡스의 삶의 경로는 널리 알려진 그대로이다. 그는 몇 십 차례에 걸쳐 혁신적인 제품을 만들어냈고, 그것이 표준이 되어 하나의 시장이 형성되면 또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를 반복했다. 그가 바꾼 전자기기의 개념을 통해 기존의 많은 산업들이 사라졌고, 또 많은 산업들이 새로 생겨났다. 1984년 애플의 맥킨토시(Macintosh)는 글자 명령어를 치지 않고도 마우스로 화면을 클릭해 컴퓨터를 조작하는 그래픽 인터페이스(GUI)를 도입해 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만들었다. 1985년 맥킨토시에 적용한 레이저 라이터(LaserWriter)와 그래픽 작업용 소프트웨어(PageMaker)는 개인이 컴퓨터에 앞에 앉아 디자인을 하고 책을 만드는(Desktop Publishing)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잡스가 1985년 애플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난 후 이듬해 창업에 참여한 회사 픽사(Pixar)는 컴퓨터 애니메이션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해 이후 영화 산업의 방향 자체를 바꾸었다. 1997년 다시 애플로 복귀한 후 2001년 출시한 엠피쓰리 플레이어와 디지털 음원시장은 기존 레코드 중심의 음반 시장을 해체하고 음원을 사고 판다는 새로운 개념을 소비자들 사이에 안착시켰다. 2007년에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하고 여러 다른 장비의 성능을 한꺼번에 누릴 수 있는 스마트폰을 내놓아 전자 산업 생태계 자체를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을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잡스는 이 모든 것을 직접 발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사람이 만들어 놓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기술 중에서 대중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 핵심을 찾아내고 이를 제품화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제품은 단순(Simple)하고 쉬워야(User Friendly) 한다는 원칙을 줄곧 잃지 않았다. 그가 기획하는 제품은 상식을 깨는 신선한 용도와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단지 단순하고 쉽다는 것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의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2011년 사망하기까지 그가 일생을 통해 보여준 다름과 새로움을 향한 열망은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캘리포니아의 당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게재 21.11월)
1923년, 당시 22세 젊은이였던 월트 디즈니(Walt Disney)는 중부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에서 열차에 올라 영화산업의 중심으로 막 성장하고 있던 할리우드에 도착했다. 18세 되던 해 캔자스시티의 아트 스튜디오 삽화가로 취직했지만 회사 사정으로 해고당했고, 이후 회사를 3개나 차렸으나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이 젊은이는 캘리포니아에서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당시 그가 만화영화 사업을 하기 위해 꼭 할리우드로 왔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화 산업의 중심은 여전히 뉴욕이었고, 할리우드의 만화는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는 단계였다. 그런데 마침 영화감독 지망생이면서 이곳에서 결핵 치료를 받고 있던 월트 디즈니의 형 로이 디즈니(Roy Disney)가 같이 사업을 해보자고 권유를 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월트 디즈니는 난생 처음 캘리포니아의 할리우드라는 곳에 발을 디뎠다.
두 형제는 자신들의 성을 딴 회사(Disney Brother Studio)를 차려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첫 사업은 월트 디즈니가 미주리에 있을 때부터 만들었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Wonderland)를 계속 제작해 뉴욕의 배급자들에게 판매하는 것이었다. 1927년까지 시리즈로 제작된 이 영화는 만화와 실사가 결합된 당시로선 실험적인 형식의 작품이었다. 스튜디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월트 디즈니는 미주리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 어브 아이웍스(Ub Iweks)도 캘리포니아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1928년 오스왈드 래빗(Oswald the Lucky Rabbit)이라는 만화 캐릭터를 만들어 관객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는데, 당시 배급사였던 유니버설 스튜디오(Universal Studio)와의 사이에 저작권 분쟁이 생겼다. 이런 상황에서 디즈니사의 작가들이 모두 회사를 떠날 때 친구 아이웍스만이 남아 만화를 그리는 일을 계속했다.
당시 27세의 청년들이었던 디즈니와 아이웍스는 오스왈드를 쓸 수 없게 되자 미키마우스(Mickey Mouse)라는 캐릭터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처음 미키마우스의 인기는 신통치가 않았다. 디즈니사는 미키마우스가 출연하는 두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지만 이를 사들일 배급사도 찾지 못했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디즈니는 만화영화로서는 처음으로 동기음향(Synchronous sound) 기술을 도입해 활로를 뚫기로 했다. 이미 유성영화는 1927년 재즈싱어(The Jazz Singer)의 성공으로 할리우드에서 저변을 넓혀 가던 상황이었다. 디즈니의 새로운 시도로 미키마우스가 출연한 다음 영화 스팀보트 윌리(Steamboat Willie)는 소리가 있는 첫 번째 만화영화가 되었고, 비로소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디즈니는 미키의 목소리를 자신의 높은 톤 목소리로 직접 녹음해 캐릭터의 장난스러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후 디즈니사는 계속 최신의 기법들을 도입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실패 속에서도 만화 영화라는 장르를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1932년에는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인 꽃과 나무(Flowers and Trees)를 제작했다. 당시 컬러 애니메이션은 3색 분해로 촬영한 세 개의 네거티브(Negative) 필름을 공장에서 가공하여 다시 천연 색 필름으로 만드는 복잡한 과정(Three strip technicolor)을 거쳐야 하는 것이었다. 비록 짧은 작품이었지만 색이 들어간 만화 영화는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1933년부터는 동화를 이용한 스토리텔링 애니메이션 장르를 개척했다. 19세기 후반의 영국 동화를 발굴해 실험적으로 제작한 아기돼지 삼형제(The Three Little Pigs)가 먼저 인기를 끌었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성공으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직감한 디즈니는 아예 이를 전담하는 부서를 만들어 4년 후인 1937년에는 동화에 기반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독일의 그림형제 동화에서 찾아낸 백설공주(Snow white)를 활용한 애니메이션은 기획 단계부터 큰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의 만화 작업은 한 컷 한 컷을 손수 그려야 했기 때문에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 많은 시간과 비용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디즈니의 이 시도가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조롱했지만 이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백설공주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백설공주의 흥행에 고무된 디즈니사는 이후 피노키오(Pinocchio), 판타지아(Fantasia), 덤보(Dumbo), 밤비(Bambi) 등을 계속 내놓으면서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지만, 당시 2차 대전의 분위기 속에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만화 영화들은 오히려 그 후 꾸준한 인기를 모아 오늘날까지도 어린이들의 상상과 환상을 자극하는 이야기로 사랑을 받고 있다.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장편 애니메이션을 줄기차게 제작한 디즈니사의 노력은 17세기 프랑스 동화를 기반으로 만든 신데렐라(Cinderella)가 1950년에 대성공을 거두면서 큰 결실을 맺었다. 디즈니는 신데렐라의 흥행 이후에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 1951), 피터팬(Peter Pan, 1952), 잠자는 숲 속의 공주(Sleeping Beauty, 1955), 101마리의 달마시안(101 Dalmatians, 1961) 등 많은 이야기를 발굴해 극장 화면 위에 표현해냈다.
동화와 판타지, 가족과 행복, 모험과 긍정, 과거의 향수와 미래의 상상 등 꿈같은 주제를 표현해 내고자 했던 디즈니의 노력은 테마파크라는 또 하나의 신산업을 만들어냈다. 1955년 디즈니는 LA 남쪽의 애너하임(Anaheim)시에 160에이커(64만㎡)의 땅을 매입해 테마파크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당시 그가 선택한 놀이동산의 주제는 모두 이런 추억, 꿈, 환상 등에 연관된 것이었다. 자신이 10살 때까지 살았던 미주리주의 시골도시 거리(Mainstreet USA), 미국의 서부 개척 마을(Frontier land), 동화 속 주인공들의 세상(Fantasy land), 흥미진진한 탐험이 가득한 정글(Adventure land), 상상 속의 미래 도시(Tomorrow land)들은 모두 방문자들의 꿈과 환상을 자극했다. 낯선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설레는 공간들은 어린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온 가족을 만족시켜 개장과 동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1955년 7월의 개막식은 모두 7천 만 명이 지켜봤고, 그 해 연말까지 모두 360만 명이 새롭게 등장한 테마파크를 방문해 입 소문을 퍼트렸다.
디즈니는 1965년 플로리다주에 새로운 아이디어, 기술, 재료, 시스템, 상상이 결합된 창조의 중심(Creative center)를 만들겠다는 디즈니월드(Disney world) 조성 목표를 깜짝 발표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하고 1966년 12월 65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회사의 오너로서 그는 때로는 직원들에게 강압적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는 정신 질환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사업가로서는 꿈과 환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파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었다. 중부 미주리에 살던 어린 시절부터 집 옆을 지나가던 기차를 유독 좋아했다는 그가 만들어낸 동화 속 세상, 과거의 아름다웠던 공간, 신기한 미래 세계는 오늘날에도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매혹하고 있다. (게재 21.11월)